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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셋째 황자 이청순(A.D 1048~)이 기원후 1066년 유럽을 다녀와 작성한 여행기이다. 동로마를 넘어 중부유럽과 동유럽, 북유럽을 다룬 동방 최초의 서적이다. 황자 자신의 주관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으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서술로 진행된다. 특히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서 서하 제국에서 기독교가 퍼지는데 한몫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선교사까지 데려온 이청순 본인은 정작 끝까지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동로마편

나는 고국을 떠나 트란스옥시니아를 거쳐 셀주크 제국에서부터 또 며칠을 이동해서야 마침내 동로마 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자의 신분이 아닌 일개 여행자의 신분으로써 온 동로마 제국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였다. 우리는 먼저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기 위하여 시장에 갔는데, 로마 자체가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저번 여행과 달리 언어와 인종은 달라도 우리 서하의 시장과 크게 다를건 없어보였다. 단지 서하보다 조금 더 부유한 것이 차이점이였으리라. 우리는 지친 몸을 치유하기 위해 한 여관에서 쉬기로 했다. 우린 이들과는 인종 언어 종교가 모두 전혀 다른 이방인이였으나 여관주인은 이방인이 익숙했는지, 우리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어 특식을 내놓았다. 아마 내가 가진 금과 은 때문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호의는 고단한 여행길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바다가 없는 서하와 달리 이들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란 것을 즐겨 먹었는데, 그 맛이 대단해 여러 접시를 먹어치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빠르게 동로마의 수도로 이동하였다.


동로마의 수도는 변방의 도시보다 외국인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 중에는 얼굴이 아예 시커먼 사람 ( 흑인 )이 있어 화들짝 놀라기도 했는데, 그러자 나와 친한 셀주크인 통역관 알 자지리가 "당신 생김새가 이곳 사람들에겐 더 낯설 겁니다"라고 말하여 매우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지리가 말하길 "황자님이 목표를 하시는 비잔틴 너머의 세계의 언어는 제가 잘 모릅니다. 아마 이곳의 역관을 구하셔야할 겁니다."라고 하였다. 곧 우리는 동로마인 역관을 찾기 위해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도시를 돌아보면서 나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승려들에게서 이들의 종교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는데, 예수라는 자는 아마 불교의 미륵불을 말하는 것 같았다. 훗날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도 미륵 신앙과 유사하여 어쩌면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다. 수소문 끝에 통역관을 구한 우리는 준비를 단단히 한 뒤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교황령편

우리는 로바노마에서 배를 타고, 천주교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교황령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동로마 통역관이 이들의 종교가 왜 동서로 갈렸는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해안선을 따라 긴 항해를 거듭한 끝에 우리는 교황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마 시에 도착한 난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로마가 세상에 두 개가 있던 것이다. 내 질문을 들은 동로마 통역관은 로마 제국의 역사와 동서로 갈라진 이유 그리고 서로마 제국의 말로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나는 동돌궐과 서돌궐의 사례를 들어 이해했다. 나는 검투사들이 싸웠다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과 같은 옛 제국의 찬란한 유산들을 보면서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에 접한 국가여서 그런지, 식당에서 극진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었는데 살짝 비려서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았으나 몇 번 먹고나니 중독되어 한동안 조개 요리만 찾았다. 로마 여행을 즐기던 중 셀주크 통역관들의 복장 때문에 이교도로 의심받게 되었고, 평탄한 여행을 즐기던 우리에게 첫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다행히도 셀주크 통역관은 상인 출신 답게 은십자가를 꺼내들고 기도문을 읊어 그들의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위장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나도 이교도인건 변함 없었기에,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교황이 다스리는 영토를 빠져나갔다.

베네치아편

교황령을 빠져나온 우리는 물 위에 세워졌다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내가 베네치아에서도 이교도로 몰려 봉변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어린 시선으로 묻자 동로마 통역관은 "최근 베네치아는 종교의 화합을 추진하고 마법을 내세워 교황과도 대립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라며 나를 안도시켰다. 이윽고 우리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베네치아는 육로 교역으로 큰 이익을 보는 서하와 달리 해상교역으로 크게 번창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더욱 이국적이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특히 물 위의 세워진 도시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게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진 경관은 이전의 여행지처럼 압도적인 건축물은 없어도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우리는 현지인들을 통해 이곳의 근간인 마법에 대하여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을 다스리는 군부의 우두머리가 박정희라는 자라는 것도 알게되었는데, 이름을 보아 고려인이 확실했다. 왜 고려인이 이런 만리타국의 지도자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잃어버린 역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베네치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북쪽에 있는 보헤미아로 향했다.

보헤미아편

우리는 들어왔던 것처럼 군사들 몰래 국경을 넘어 베네치아에서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산맥을 넘지 않고 헝가리 쪽으로 우회하여 목표인 보헤미아 왕국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들른 헝가리 왕국은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으나 딱히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그렇게 헝가리를 지나 보헤미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헤미아는 헝가리만한 국력은 없었으나 그들의 수도 프라하는 다뉴브 강이라는 강을 끼고 있었고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웅장한 교회들이 공존하여 꽤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다. 우리는 고된 여행길에 지쳐 도시도 구경할 겸 프라하에서 2주 정도 지내며 쉬기로 하였다. 셋째날에 나는 혼자 시장을 걷다가 치한에게 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를 보고 구해주었다. 치한과 몸싸움을 하느라 얼굴과 복부에 타박상을 입었지만 수행원과 통역관이 도와준 덕에 그를 손쉽게 쫓아냈다. 여자는 나보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였다. 나는 여자에게 왜 여자 혼자 밤에 혼자 돌아다니냐고 다그쳤다. 그 여자는 얼마 전에 집이 화재로 사라져서 동냥 중이였다고 말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나는 그 여자에게 여행의 동행을 제안하였다. 그 여자는 제안을 승낙하였다. 이후 숙소에서 여자의 이름을 물었고, 여자는 하나라고 답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나는 통역관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여자였다. 그녀는 동로마의 언어와 이탈리아 어, 그리고 보헤미아를 기준으로 북방 민족들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동로마 통역관의 한계가 다가오는 참이라서 이 사실은 참으로 반가웠다. 2주 뒤 새 통역관을 데리고 보헤미아를 떠나 북쪽으로 나아갔다

포메라니아편

우리는 독일 일대를 지나 포메라니아에 도착했다. 이곳의 문화는 여태 지나온 국가들과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방에는 교회가 없고 토착신앙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중심도시로 가서야 이제는 익숙해진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덕에 의사소통에 큰 무리는 없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하면 마치 거인같았다. 우린 이곳의 주점에서 노란 색의 술을 다 함께 마시면서 즐겁게 떠들었다. 그러던 중 알 자지리에게 한 독실한 기독교인이 시비를 걸었고, 술에 취한 자지리는 이전처럼 이성적인 대응 대신 주먹으로 응답하였다. 하나는 둘을 중재하였으나 이미 경찰이 온 뒤였고 결국 자지리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우린 자지리의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포메라니아에서 지냈는데, 이곳의 감자 요리는 꽤 먹을만했다. 나는 감자가 구황작물이라는 것을 듣고 서하에서도 재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감자 씨앗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챙겼다. 이윽고 자지리의 재판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벌금으로 은화 5닢을 내야했다. 여행경비가 거의 떨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기에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나아갔다.

스웨덴편

우리는 포메라니아의 북쪽 항구에서 출발하여 기독교 세계의 북쪽 끝이라는 스웨덴을 향해 나아갔다. 이 북쪽의 바다는 서하와 비교해서도 매우 추워 우리는 두꺼운 모피 옷을 입어야했다. 강풍과 추위에 맞서 싸운 끝에 우리는 마침내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먼저 우리는 근처의 여관을 찾아 몸을 녹였다. 난 육지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여태 지나온 곳들과 다르게 우리들을 매우 낯설어했다. 이곳에는 자지리와 같은 아랍인도, 동로마 통역관과 같은 로마인도 없었으며 새하얀 피부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다. 또한 이곳의 옷감인 모피는 매우 질이 좋아 부드러우면서 따뜻했다. 동로마 통역관과 자지리를 포함한 셀주크인들도 이곳은 매우 낯선지 신기하단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행경비 문제로 고민하며 우리는 수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인 스톡홀름에 도착한 우리는 제법 잘 정돈된 도시와 성벽에 감탄하였다. 이들이 야만인이였다는 남쪽 국가들의 평판과는 꽤 다른 모습이였다. 하지만 우린 여관에 묵을 돈이 없어 난방이 안되는 싼 숙소에서 묵어야만 했다. 앞으로의 길이 막막해졌을 때, 우리는 갑작스럽게 왕궁에서 찾아온 병사들을 만났고, 그들을 따라 왕궁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매우 건장한 이곳의 군인들을 보고 압도되어 긴장했지만 왕이 우리에게 흥미를 느껴 불렀다는 말을 듣곤 안도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스웨덴의 국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곳의 국왕은 자신의 나라를 북방의 사자라고 말하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위엄찬 국왕의 모습에 떨면서 "저는 동로마에서 동쪽으로 1만리를 가면 나오는 머나먼 동방의 대하에서 왔으며, 그곳의 황자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출신으로 아랍인, 로마인, 보헤미아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렇게 먼 곳에 나라가 있다는건 들어보지 못했다며 내게 그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였다. 나는 모피 옷을 벗어 속에 입은 비단 옷과 귀에 걸고 있었던 옥으로 만든 귀걸이를 보여주었으며 서하 어로 말하였다. 세 명의 통역관을 통해 언어가 전달되는걸 본 국왕은 그제서야 내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 들어주었다. 이곳의 사람들과 왕은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관심이 많아보였는데, 북방의 야만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여행경비를 충당할 묘책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기독교를 내가 온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 포교할테니 선교사를 보내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 지원해준다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국왕은 처음엔 망설였으나, 내가 "머나먼 동방에 기독교를 전파한 억사상 첫번째 군주"라는 타이틀로 꼬드기자 흔쾌히 승낙하고 여행경비와 식량을 지원해주었다. 우리는 대주교를 만나 2달 동안 지내면서 기독교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5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과 십자가를 챙겨 국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동유럽편

우리는 스웨덴을 떠나 항해를 시작했다. 이대로 북방에 있는 육로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추운데다가 야만인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선교사들의 조언으로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 국가인 폴란드로 가기로 했으나,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결국 폴란드로 가지 못하고 시모기티아에 난파하게 되었다. 이곳은 기독교를 믿지 않고 토착신앙을 믿는 나라였는데, 여태 보아온 국가들과 달리 낙후되어 보였고 심지어 아직도 부족 체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야만국가였다. 하지만 별 이유도 없이 이들의 족장은 나를 굉장히 후하게 대접해주었으며 뒤떨어진 문명과 달리 사람들의 성품은 좋아서 야만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시모기티아를 떠나 폴란드로 향했다.

폴란드는 동구라파의 최강국으로 융성한 문명을 자랑했다. 그 수도인 크라쿠프는 수많은 붉은 지붕들이 눈을 아프게 하는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머나먼 동방으로 선교를 떠난다고 하자 평범한 시민들까지 우리를 도와 재워주고 밥을 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이들의 호의가 고맙기보단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종교로 대동단결하는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경이로웠다. 우리는 폴란드에서 유흥을 즐긴 후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아헨편

우리는 폴란드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당초 계획으로는 이대로 남하하여 동로마로 갔어야 했지만, 선교사의 조언을 듣고 서방세계의 중심이라는 신성 로마 제국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걸은 끝에 우리는 아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또 한번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로 고용한 한 용병은 또 하나의 성당을 소개했다. 지금껏 수많은 성당을 보와 온 터라 이제 질릴대로 질린 나는 큰 기대를 안했지만, 이 거대한 성당은 나의 무료함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높이 솟은 첨탑은 그들의 신에게 닿으려는 듯하였고, 매우 정교한 건축양식은 조물주의 솜씨를 보는 듯했다. 나는 이 성당을 극찬하며 화가 1명을 고용해 이 성당의 풍경화를 간단히 그리게 한 후 그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 하나 또한 아헨에는 처음 와본다면서 황홀한 눈빛으로 성당을 올려다보며 기도했고, 나는 그런 하나를 보며 이곳에 온 보람을 느꼈다. 알 자지리는 점점 기독교에 물드는 내가 달갑지 않았는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우린 와인을 몇 잔을 마시며 남은 여행의 성공을 기원한 뒤 남쪽으로 향했다.

귀환편

우리는 보헤미아에서 여행경비를 보충 받은 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지나 동로마로 돌아와 통역관과 헤어진 후 셀주크를 지나 트란스옥시니아를 거쳐 코초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번에 지나갈 때와는 다르게 민심이 흉흉해보였다. 우리는 한 여관에서 묵었는데 거기서 코초인들이 신기하게 생긴 하나를 보고는 먼저 시비를 털었다. 그 중 한 명이 하나를 추행했고, 나와 수행원들은 분개하여 그들을 제압했다. 이내 신고를 받은건지 코초의 병사들이 들어와 우리를 제압했고 우리는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하국 황자의 증거로 목걸이를 보여주며 우리가 정당방위였음을 밝혔으나 병사들은 날 무시하고 처벌이 있을 것이라며 연행하였다. 그러던 중 자지리가 거액을 뇌물로 바쳐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 대한 증오를 품고 도망치듯 서하로 돌아갔다. 난 나를 반기러 나온 형들 그리고 군사들과 마주쳤고, 형님들과 그간의 일에 대하여 얘기하며 선교사들과 하나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하나와 선교사는 처음 보는 동방의 제국이 신기한 듯 내가 처음 동로마에 갔었던 것처럼 감탄하였다. 나는 나의 나라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며 그들에게 서하를 소개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