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광지치(중국어: 國光之治)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패전 이후인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비밀리에 민월 지방(閩越地方)을 수복하려던 작전이다. '국광 작전(國光作戰)'이라고도 부르며, '국광(國光)'이라는 뜻은 국가의 영광을 되찾으라는 의미이다.

작전 배경

국민당 망명과 하이난 섬 항쟁

민월 지방은 향후 50년 내에 국민투표(國民投票)로 화향(花鄕)에 편입할 것인지, 특별 행정구(特別行政區)로 둘 것인지, 일개 성(省)으로 놔둘 것인지 결정하는 향중공동선언(鄕中共同宣言, 1947)이 발표됨으로서 앞으로의 존치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허나 국공내전(國共內戰)의 발발로 양쯔강(揚子江) 이남까지 수세에 몰린 장제스(蔣介石)와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은, 화향의 전후 초대 총상이었던 엄경휘(嚴經輝)의 배려로 대만성(臺灣省)의 대략 5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을 데리고 망명하게 되었다.[1]

민월 지방에 남아있던 화향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에 맞서 무이산맥(武夷山脈)에 진을 치고 삼명 전투(三明戰鬪, 1949 9.)를 치루었다. 하지만 보급의 어려움과 공산당의 압박책에 버틸 수 없던 화향군은 진먼 섬(金門島)으로 후퇴하였고, 끝내 중국 공산당은 대륙에서 국민당화향을 모두 몰아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국민당화향해남 방위총사령부(海南防衛總司令部)를 세워 광저우(廣州) 함락 이후 피신해 있던 쉐웨(薛岳)를 하이난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후퇴했던 바이충시(白崇禧)의 병력과 자신의 잔존 병력이었던 5개 군을 규합하여 백릉방선(伯陵防線)이라 불리는 진지를 구축했으며, 45대 규모의 4개 항공 대대와 제2함대 산하 40여 척의 함정을 배치했다. 하지만, 잇따른 패배로 전체적인 규율과 전투 사기는 엉망이었기에 화향에서 파병한 유회(劉恢)의 2개 사단이 합류하여 혼란한 질서를 통제했다.

펑더화이(彭德懷), 덩화(鄧華)가 이끄는 제4야전군 제12병단 제40군과 제15병단 제43군은 하이난 상륙작전(海南島登陸作役, 1950)을 개시하여 소대, 중대 규모로의 해안가 상륙 및 하이난 내륙에서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하여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쉐웨유회는 잔존 군함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광저우, 레이저우(雷州) 일대에 폭격을 시도했다. 한편으로 화향에서 기갑 전력의 증원 요청을 보내 M4 셔먼M5A1 20여 대를 지원받았다.

4월 16일부터 목선 400여 척을 이용해 도하를 시도한 공산당에 맞서 쉐웨는 제3 함대 사령관 왕언화(王恩華)를 통해 해안 방위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이에 린가오자오(臨高角)로 상륙하려던 공산당군은 제3 함대의 포격에 맞서 대전차포, 박격포를 동원하여 항전에 나섰으나, 빈약한 방어력으로 무장했던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했으며, 해안 지대에서도 상륙하는 공산당군에 맞서 화력을 퍼붓고 공중에서는 기총 소사를 통해 철저한 방어 태세에 임했다.

유회는 국민당군 제64군 2개 연대와 자신의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교두보를 마련하려던 상륙군에 맞섰으며, 17일 메이타이(美臺)에서 공산당군을 격퇴했다. 공산당 제43군 제127사단은 위바오 항(玉包港)에 상륙하여 푸산(福山)으로 진격코자했으나, 국민당군 제62군에게 전멸되었으며 쉐웨메이팅(美亭)에서 제62군 주력 연대들과 교도사단들을 집합해 23일, 하이커우 전투(海口戰鬪)를 벌여 공산당 제40군을 괴멸시켜 대략 2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구닝터우 전투(古寧頭之役, 1949 10.)에서 패배했던 중국 공산당은 하이난 섬 상륙 작전에서도 소기의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황급히 병력들을 철수시켜야 했으며, 기세를 몰아 국민당군레이저우 포전(雷州砲戰, 1950 8.)을 벌여 광둥성 남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화향은 남방 해역(南方海域)에 하이난 섬 일대까지 확대시켜 해상 방위를 위한 전비 증대 및 군사력 확장을 시도했고, 6.25 전쟁(韓國戰爭)으로 화향해(花鄕海, 남중국해)에 진입한 미국의 제7함대(第七艦隊)는 대만 해협까지 방위 범위를 늘려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민월 수복 계획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후 군정사령부(軍政司令部)가 철수함에 따라, 사실상의 독점적인 실권을 유지하게 된 엄경휘 총상은 민월 지방을 수복하기 위한 계획 아래에 준전시 상태를 유지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6.25 전쟁 말기부터 동남연해에 특공대를 잠입시키고 태국(泰國) 북부에 남아있던 국민당군 패잔병들을 지원하거나 하이난(海南)으로 망명토록 도움을 주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동원평란시기임시조항(動員平亂時期臨時條項)을 통해 중앙정부의 비협조적이던 대만성(臺灣省) 일대에 계엄령(戒嚴令)을 선언해 통제했다. 또,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을 정점으로 한 연립훈정(聯立訓政) 체제를 공고히함으로서 국내 정계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 혹은 집단들을 치안 강화에 명목으로 탄압하는 등 독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1954년에 향미공동방어조약(鄕美共同防禦條約)을 체결하여 미군협방 화대사령부(美軍協防花臺司令部)가 설치됨으로서 주향미군(駐鄕美軍)이 상시 주둔하게 됨에따라 화향 제도(花鄕諸島)와 대만 섬(臺灣島) 일대의 방어가 더욱 강력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1955년부터 엄경휘는 국민당 망명 간부들과 함께 본격적인 수복 작전을 세우게 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고향인 펑화현(奉化縣)과 비슷한 곳이라 동질감을 느끼던 도원시(桃園市) 자오향(慈湖鄕)에서 엄경휘의 원조를 바탕으로 '국광작업실'(國光作業室)을 설치한 뒤 육해공 전문 병력 210명을 양성 및 차출하여 대륙 침공을 지시하였다.

침투 작전 진행과 실패

1961년 4월에 수립된 침투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1. 진먼 섬에서 샤먼(廈門)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도발
2. 공산군이 반격하면 "공산정권의 도발"이라고 국제 사회에 선전
3. 미군, 향군(鄕軍)과 함께 샤먼에 5개 사단, 2개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면적인 침공

 
- 1963년 5월 2일 장제스가 침투 병력에 내린 지시

허나 해당 침투 계획을 검토하던 미군협방 화대사령부화향군 총참모부(花鄕軍總參謀部)는 반대 혹은 계획에 비현실성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1. 국민당 망명군과 작전에 투입될 향군, 미군을 포함하면 70만 명 남짓인데, 군수품 부족 및 보급로 불안정과 함께 물자 상륙이 어렵다.
2. 공산군은 상비 병력만 400만 명에 달하며, 민병 및 동원 명령 병력까지 합하면 수천만 명에 달한다.
3. 베트남 전쟁(越南戰爭)에 치중하고 있는 미국이 대륙 도발을 지원해 줄 여력이나 관심이 없다.

결국 엄경휘도 지시 이행이 힘들다는 의견을 냈고 장제스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장제스는 1965년 6월 7일, 국민당 군관학교(國民黨軍官學敎)를 방문하여 휘하의 고위 군관들에게 대륙 침공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대륙 침공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 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6일, 특전사들을 태운 2척의 함선을 동원해 하이난 섬에서 레이저우 반도(雷州半島)로 진입하려 했으나, 인민 해방군(人民解放軍)에게 발각되어 어뢰를 맞고 침몰함에 따라 탑승 병력 200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11월 12일에는 정보 수집을 위해 팽호 열도(澎湖列島)에서 출발하던 '영자호(永字號)'가 인민 해방군 함대에 걸려 침몰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작전의 실패로 미군은 장제스의 독단적인 작전 수행을 반대하고 '국광 작전'을 지원하던 엄경휘 내각(嚴經輝內角)도 미국의 압박하에 지원 예산을 감축함에따라 장제스는 무력 본토 수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관련 문서

각주

  1. 국민당 출신의 망명자들은 당시 대만성 성장이었던 견신우(甄申佑)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 외성인(外省人)들의 토지·공장·사립 학교의 이권들을 침탈했고, 이는 곧 외성인들의 반발로 이어져 2.28 사건(二·二八事件, 1947)이 촉발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