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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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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金鍾泌 | Kim Jong-pil
기본 정보
직책 대한민국 (뉴 오더) 대한민국제10-11대 대통령
1981년 12월 1일 ~ 1982년 5월 9일 (제10대)
1982년 5월 10일 ~ 1988년 5월 9일 (제11대)
출생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사망 2018년 6월 23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적 대한민국 (뉴 오더) 대한민국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 중퇴)
육군사관학교 (8기 / 졸업)
신체 170 cm, A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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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6, 7, 8, 9, 10
경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장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장
초대 중앙정보부장
제6~7대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
제8대 국회의원 (전국구 / 민주공화당)
제9대 국회의원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국회의원 (충남 5)
제11대 국무총리
제10-11대 대통령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대한민국 (뉴 오더) 대한민국 육군
1949년 5월 ~ 1963년 1월
최종 계급 준장 (중앙정보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개요

대한민국제10-11대 대통령.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1960~80년대 격동의 한국 사회를 관통한 군인 및 정치인으로 자라게 된다. 5.16 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깊이 관여한 인물이며 박정희와는 인척이자 최측근으로 "2인자"로 손꼽혔으나 박정희의 장기 집권 유지를 위해 견제를 당하기도 한 미묘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1981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민주공화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쇄신 차원에서 민주공화당에서 신민주공화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는 동시에 10월 유신 헌법에서 일부 비민주적인 요소를 제거시킨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뒤 1982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45.2%를 득표하였고 1위로 당선된다. 대통령 취임 이후 어느정도 민주화에 기여하였으나 권위주의적 행보도 보여 결국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간접적으로 중앙 정치계의 주요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의 대부로 자리잡았고, 2018년 6월 23일 향년 92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일생

청소년기

군인 시기

박정희 정권 시기

10.26 사태~제4공화국 출범

대통령 시기

퇴임 후

평가

김종필은 군부 출신 인사이자 박정희 체제에 기여한 인물이지만, 어느정도 민주화에도 마찬가지로 기여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등 재야인사 들의 정계 재진입을 허락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며 공산주의나 극좌적인 사상을 제외한 사상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자유를 보장하는 등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또한 제4공화국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적인 의회 선거를 도입하였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제4공화국 헌법에도 권위주의적 요소들은 상당수 남아있었으며 김종필 정권 역시 노동운동이나 여러 시위를 탄압하였던 점은 여전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말기부터 이뤄지던 독일과의 물밑 외교 및 밀월 관계를 지속하였던 것도 뒤늦게 알려져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행보로 결국 김종필 정권도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이 자주 나왔고, 이러한 비판은 1986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이 참패하고 통합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는 배경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당시 한국 사회에 80년대의 낭만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1980년대 당시는 경제발전과 부분적인 민주화로 인한 문화산업 및 국민여가의 발달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라고 느껴졌고, 현재도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 이것을 80년대 낭만이라고 일컫는다.

다만 민주화 기여가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이미지 메이킹에 불과했다는 의견도 최근 나오고 있다. 사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발생한 부산이나 광주 지역 시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어마어마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종필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민주화 기여에 참여하며 헌법을 바꾸고 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는 다른 개혁적 이미지를 추구하고자 했다는 것인데,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 잠재적 라이벌이라는 타이틀이 씻겨져 나간것도 민주화 기여에 어느정도 참여하면서 된 일이기도 하다.

여담

  •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 관련 음모론에서 박정희, 김재규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1981년 거의 개발 완성 직전까지 갔던 핵무기에 대한 기록이 김종필 정권 이후 증발하였기 때문이다. 기밀해제된 문서들과 여러 정황 증거, 증언 등을 살펴보면 1981년까지는 분명히 핵무기 개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거의 90% 정도가 완성되었는데 김종필 정권 이후 그런 기록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에 대해서는 김종필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제4공화국 정권 유지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과 지지를 받고 주한미군을 유지시키는 대신, 핵무기 개발을 전격 취소하고 관련 기록과 연구 결과를 모조리 폐기하기로 했다는 추측이 최근 정설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의 뒤를 이어서 직선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로 대권에서 멀어지기도 하며 의원 내각제 쪽으로 선회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1981년 10.26 사태로 순식간에 민주공화당의 보스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그냥 대통령제를 유지해서 본인이 대통령을 하기로 결심했다.
  • 원래 1981년 '직선제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임시 대통령직 추대를 거절하려 했지만, 군부의 폭주를 방지할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후보는 당신 뿐이라는 설득으로 인해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고 한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1960 - 1963
정계 입문
1963 - 1973
창당
무소속
1973
탈당
1973 - 1978
입당
무소속
1978
탈당
1978 - 1982
복당
1982 - 1989
당명 변경
무소속
1989 - 2018
탈당
정계 은퇴
사망

선거 이력

일시 선거명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1] 45,999 (68.15%)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69,961 (91.06%)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460,581 (48.77%) 당선 (1번)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임명직[2] - 당선 4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3] 134,513 (66.63%) 당선 (1위) 5선
1981 제10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2,465 (100.00%) 대통령 초선
1982 제11대 대통령 선거 6,894,298 (45.2%) 대통령 재선

  1. 부여군 선거구
  2. 대통령 임명
  3.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 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