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천지 세계관 인물
고조 열황제 -성웅(聖雄)-
개요
조선사, 대한제국사를 통틀어 어쩌면 세계사를 통틀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업적을 새겨서 현재 세계적인 강대국인 조선의 지위를 만든 천재적인 군주. 대한제국의 민족성웅
생애
계몽군주
대한제국 그리고 그보다 이전인 조선국의 역사는 한 인물의 탄생으로부터 달라지게 된다. 후대, 대한제국에 고조 열황제라는 칭호를 받는 조선국 국왕 이연은 1567년 조선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이 된다. 이연은 수렴청정을 받은 뒤 친정이 시작하면서 이준경과 조식, 이황을 주축으로 하는 친정내각을 구성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고 금광건설, 은광건설로 대표되는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조선의 체질을 바꾸게 된다. 이때 광양, 대유동, 운산지방에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게 되고 이 금광들을 개발하기 위해 해방된 노비들이 양계로 이주하면서 조선에서는 1차 북부개척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이연은 나무묘목을 심고 산림보호법을 제정하여 목재자원의 수급을 원할하게 하였다. 농업으로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모내기와 이양법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증가했다.
또 이연은 사회제도의 병폐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연은 먼저 공신전 해택을 3대까지로 제한하면서 면세토지를 급격하게 줄여내었으며 서얼금고법 폐지, 일천즉천의 폐지와 노비 안건법 제정을 통한 노비들의 해방, 과부재가금지법 폐지를 통한 여성권리 향상과 부민고소금지법을 통한 수령의 권력약화 등등 여러 사회개혁정책을 시행하면서 사회적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조선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상인계층은 왕당파적 성향이 강해졌고 이 왕당파 상인 계층의 성장은 곧 왕권강화로 이어졌고 강화된 왕권으로 이연은 개혁작업을 완수하고 보수성향의 사림파들을 몰락시키고 율곡 이이를 주축으로 하는 신파(이황같은 개혁사상가, 실무관료 류성룡, 이론학자 노수신 등 사실상 당시 이연의 총애를 등에 엎은 정치세력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들로 내각을 꾸리면서 조선 역사상 전례없는 왕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연의 개혁에 조선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그로인해 시장이 발달하게 되면서 도시가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공업의 발달과 물산의 증가는 대외무역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대외무역의 증가는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서양 상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러한 상인들의 요청으로 예수회에서는 조선으로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파견한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강화도에 당도한 뒤, 강화도에 서양식 건물들을 짓고 예수회 시설들을 건설시키면서 강화도가 이후 조선 가톨릭의 성지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작자가 강화도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이연은 대뜸 루이스 프로이스와 만나겠다고 반응하였고 강화도로 직접 찾아가면서 루이스 프로이스와 이연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와 이연의 대화 내용은 사관이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들 둘이 대화한 것의 결론으로 이연은 전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조총상인들을 통해 조총구입경로를 구해주었다.
이연은 조총을 대량으로 구입하였고 새롭게 개편된 조선군에 조총을 적극 도입시키면서 조선을 강군으로 건설하였다. 이참에 이연은 조선군의 군대를 7개의 대로 나누고 모병제를 실시해 정예군을 양성하였다. 또 군대가 징집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신작로를 건설하여 도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반역향을 폐지하여 지역차별을 철폐하였고 양계의 주민들에게 군대입대를 적극 권장하여 조선군의 양과 질을 획기적이게 향상시켰다.
계묘북벌
조선지방에 은과 금이 난다는 소식은 북방의 여진족들에게도 들어갔고 조선의 양계지방에서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이 새롭게 이주해오는 조선인들과 갈등이 생기게 되면서 북방의 여진족들은 반조선 정서를 가지게 되었다. 이 결과로 결국 1583년 여진족들이 니탕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니탕개의 난이 발발한다.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자 조선의 북방군은 약탈을 거듭하는 여진족 반란군들을 차례, 차례 격파해 나갔고 이연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행차하여 북방의 반란군들을 모조리 진압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니탕개의 잔존세력들이 만주로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참모부의 장군들은 북방으로 진격하는 것은 출혈이 클 것이라고 경고하였지만 이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5만명의 군세를 이끌고 북방으로 진격하였다. 이연의 이러한 공격에 니탕개의 잔존세력들은 게릴라전으로 저항하였다. 이러한 거센 저항은 조선군에게도 크나큰 피해를 주었지만 당시 이순신 정령(군사계급)의 엄청난 활약과 친조선 여진족들의 토벌참여로 니탕개의 잔존세력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전공에 눈이 먼 이일의 실수로 해서여진 부족이 몰살당하면서 해서여진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써 계미북벌이 시작된다. 계미북벌에서 이연은 이일을 보직해임하고 중형에 처하게 하면서 친조선여진세력들의 불만을 줄였고 대규모 징집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모집홍보를 하면서(전쟁참여 홍보문구, 홍보포스터 등) 북방으로 대규모 국력을 투사하여 여진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해서여진은 멸망하면서 조선은 계묘북벌에서 승리한다.
계묘북벌 이후 ~ 임진왜란 이전
계묘북벌의 성공으로 만주영토를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데 성공한 이연은 만주에 은광, 금광 개발과 농산물 재베를 장려하면서 북부개척을 장려하니 이로써 2차 북부개척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연은 조선인들의 이주로 여진인들과 조선인들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여진인의 차별에 대한 처벌법을 제정하면서 후일에 일어날 여진-조선 갈등을 미리 약화시켰다.
1585년 조선은 계묘북벌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성공하였고 2차 북부개척시대가 가져온 엄청난 부는 조선의 국력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하였다. 또 이연은 조선의 만주정복에 대하여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명나라로 사신단을 출발시켜 종계변무와 함께 조선은 만주지방의 패권을 인정받는다.
정치적으로도 이연의 친위세력인 신파가 마침내 대통합을 이루며 목릉파라는 새로운 계파로 출범하였고 목릉파는 유연한 정책결정, 뛰어난 전문성을 자랑하면서 조선의 대혁신을 이끌었다. 목릉파의 거두 율곡 이이가 1584년에 사망하자 목릉파는 류성룡, 이원익을 주축으로 하는 관료파와 정철을 주축으로 하는 급진개혁파, 정여립을 중심으로 하는 중립파 등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들은 이이의 유산을 잘 이어나가며 이연과 함께 조선을 운영하여 나갔다.
안정된 국정운영, 광대해진 영토, 그 영토에서 나오는 각종 물산들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태평성대의 결과로 조선은 인구증가, 문화융성, 국방강화와 같은 부수적 효과들을 얻었으며 이로인하여 조선은 훗날 대제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조선의 대다수 백성들은 자유민이자 긍지높은 도시민이라는 정체성과 긍지를 가지며 국왕인 이연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이 이연의 즉위로 변화를 겪고 있을 때 열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580년대 오다 노부나가는 기존의 군벌들을 정리하여 전국시대를 종료시켰다. 그는 강력한 리더쉽과 뛰어난 수완으로 자신의 오와리국을 부국강병시켜 수백년간 이어져온 센고쿠시대를 통일한 불세출의 영웅이자 천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측근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고 결국 혼노지에서 사망한다.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는데 그는 천한 출신으로 군사적 능력보다는 처세술로 권력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하나의 야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 진출하여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 갑작스러운 통일에 반대하던 다이묘들을 만족시키기 위헤서는 전쟁은 필요했다.
조선은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통일시절부터 익문사 소속의 간첩들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확인하였고 그의 이러한 전략으로 조선은 미리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보낸 통신사의 황윤길은 전쟁이 임박한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전쟁이 임박하였음을 깨달은 이연은 계묘북벌에서 큰공을 새운 이순신을 수군 참모부장으로 취임시키고 문관이었던 권율을 삼남권 진위대 총장으로, 김시민을 진주 진위대 정령으로 여진족 족장이었던 이철을 여진족 출신 기병부대인 팔기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남부로 발령시키며 전란에 대비하였다.
그렇게 양국 사이에 전운이 돌던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임진왜란
일본군은 대마도를 통하여 부산진을 공격하였다. 부산진성 주둔군은 조총과 창, 칼로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이들의 저항은 20만명의 규모에 일본군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반도로 안정적인 상륙에 성공한다. 이때 경상도 남해함대의 80여척의 함선들은 배설장군의 현명한 판단으로 통제영에 위치한 서해 수군참모부의 전력으로 가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진성을 왜군이 공격하였고 그렇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은 조정에 전해졌고 이연은 곧바로 개성에 위치해있던 팔기군과 삼남지방 진위대들을 이끌고 세자인 광해대군과 함께자신이 직접 상주로 이동한다.
그사이 부산진성, 다대포진성, 동래성, 김해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일본군은 4개의 성들에서 조선의 화약무기와 조총, 백성들의 저항에 마주해야 했다.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군과의 일전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오고자 하였다. 조선군 역시 수도로의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퇴하여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자 하였다. 이러한 두 군대의 전략은 상주에서 충돌하게 된다.
상주에서 조선군은 권율, 곽재우 등 경상도 진위대의 총병력과 이연의 시위대, 친위대, 호위대 병력 그리고 여진족의 팔기군을 합하여 2만 여명의 군세가 준비되었다. 일본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8천여명의 군대가 준비되었다.
전투는 치열하였다. 조선군은 전투 시작 직후 거대한 포성을 뿜으머 화포와 신기전을 일본군 진영에 퍼부었으며 일본군은 자국이 자랑하는 총병들의 집중총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하지만 조선군의 집중포격에 일본군의 대열은 와해되었으며 그 와해된 대열을 이철장군의 팔기군이 자랑하는 선기대 중갑기병이 일본군 병력들을 완전히 리타이어시키며 상주전투는 조선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 중도군이 괴멸당하면서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을 맞게 된다.
전라도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병력이 창원부를 거쳐 김해로 이동하고 있었고 경주에서는 권응수 정위가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일본군은 좌도, 우도, 중도에서 모두 패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서도 조선의 승전보가 울려퍼지는데 바로 이순신 수군참모부 총장의 진격으로 일본 수군이 옥포, 합포, 적진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며 일본은 완전히 경상도 남부 지방에 고립당하게 된다. 이때 김시민은 김해를 탈환하고 동래성에서는 백성들의 반란으로 일본군이 무력을 사용하는 등 일본군은 전쟁에서 사실상 완전한 패베를 맞이한다.
그때부터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의 장수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퇴각허용을 요청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약화를 우려하며 퇴각혀용을 거부한다. 그렇게 일본군은 남쪽으로는 이순신의 해군에게 북쪽으로는 이연의 집단군에게 서쪽으로는 김시민에게 포위당했으며 일본군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명하고는 단체로 일본으로 철수한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 수군들을 섬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었으나 이연은 그런 이순신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일본군 퇴각을 허용하게 해준다.
그렇게 조선군의 묵인으로 조선원정군이 일본으로 진입하려 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 원정군의 복귀로 히데요시와의 권력다툼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그는 열도의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히데요시를 급습하여 죽이고 자신이 정권을 장악한다.
열도로 도착하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원정군은 관서지방에서 반도쿠가와 반란을 일으키니 그렇게 간사이 대전이 발발한다.
아무튼 그렇게 임진왜란은 간사이 대전을 촉발시키고는 종료된다.
목릉성세(穆陵盛世)
임진왜란마저 종료되고 조선은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일본 열도는 내전의 참화로 조선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었고 북방의 여진족은 복속시켜 조선의 품안에 넣는데 성공한 지금 조선을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게 되었고 조선의 군대는 임진왜란, 계묘북벌을 거치며 성장하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강군 20만명을 보유한 강대국으로 거듭나었다.
그리고 전투에 공을 세운 이철장군을 발해공작에 봉하고 팔기군인원들에게 포상을 주어 후에 일어날 반란의 씨앗도 남기지 않았다. 조선에게 이제 남은 것은 이연의 전무후무한 업적덕에 이룩된 이 목릉성세를 누리는 일 뿐이었다.
1590년대를 지나 160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인구는 끊임없이 성장하여 1500만에 육박하였고 이러한 인구의 성장과 함께 만주지방에서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목릉성세 당시에는 이밥에 고깃국 먹지 못하는 백성이 없을 정도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조선의 황금기를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변화로 끊없이 팽창하던 도시의 인구로 조선의 상인들은 점점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성장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부민계급이다. 부자의 보통대명사로 쓰는 부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연은 자신의 대에서의 성장에서 멈추지 않고 후대의 왕들에게도 이러한 성장이 계속되도록 <군주론>을 집필하여 자신이 후대의 왕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그렇게 목릉성세를 이끌던 이연의 임종이 다가왔다.
사망
“ 군주는 백성의 첫 번째 종복이다. 그가 대우를 잘 받아야 자신이 맡은 직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군주는 백성의 평안을 위해 도덕적으로 일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 — 고조 열황제 이연, 자신의 유언장에
위의 인용문에 나와있는 내용을 말하고는 끝내 55세라는 짧은 생애를 끝으로 이연은 삶을 마감한다. 화정세자가 국왕에 즉위하여 대행왕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렀다. 조정대신들은 어떠한 묘호로도 선왕의 업적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생애에서 그가 항상 말했던 "선조라는 묘호는 절대로 하지 말라. 인조는 더욱 안된다."라는 말을 지키며 조정대신들과 화정세자는 고조이라는 묘호를 주었다.
그렇게 조선을 16세기의 태풍에서 지켜내며 강대국으로 부상시킨 고조 이연의 시대가 끝을 맞이한다.
평가
대한제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거의 신에 대한 평가 수준이며 조선사 최대규모의 2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대한제국의 여러가지 사회적 제도나 군사제도를 만든 군주이며 노비해방, 여성처별금지, 부민고소금지법 폐지를 제정하면서 조선의 여러 악습들을 폐지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진정한 애민군주. 그가 죽기전에 남겼던 고조유훈과 군주론은 후대의 수많은 군주들에게 읽히며 부국강병과 강대국화, 사회개혁의 정석으로 불리며 동양 계몽주의 사상을 진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조 성황제 -제국의 건설자-
개요
이혼은 전반적으로 아버지 고조의 뒤를 이어 조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으며 특히 그의 시기당시 급변하던 정세에 영민하게 대처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생애
사회개혁
성조 성황제 이혼 그는 세자시절 고조에게 제왕학을 직접 배웠고 고조와 함께 어린나이에 임진왜란같은 전장에 나아갔으며 고조 말기에는 직접 훌륭하게 직무를 보는 등 여러 정치적, 군사적 경험을 쌓은 정말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1608년 고조가 사망하자 재위를 이어받아 조선의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선왕의 죽음은 이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나 이혼에게는 아버지의 유훈과 고조가 남긴 <군주론>의 가르침 이원익, 이순신, 이철같은 선왕이 발굴한 문무에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선왕의 뒤를 이은 그를 지지하고 충성해주었다.
이혼은 먼저 선왕으로부터 내려저온 목릉파의 권력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여러 사회개혁들을 이어나간다. 직접 시찰을 나가 개혁정책들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또 이혼은 부민계급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면서 새로운 사회계층이 탄생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또한 농지개혁법을 실시하여 자영농민의 수를 늘리고 지주들의 힘을 줄이면서 엄격했던 신분제도를 차츰 줄여나갔다. 그리고 대동법을 실행하면서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였다.
이혼의 이러한 사회개혁 정책으로 부민계급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조선 백성들의 삶도 윤택하게 되면서 목릉성세가 유지되게 된다.
대북벌
1618년 만력제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원으로 출정한다. 하지만 만력제의 준비되지 않는 군대는 졸전을 거듭하였고 오히려 전장에서 밀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에 만력제는 조선에 원군파병을 요청하였고 이혼은 그에 응하여 이철장군에게 명령하여 2만 5천명의 팔기군을 파견하여 북원을 복속토록 하였다. 북원의 몽골기병들은 이철장군의 전략과 팔기군의 우수한 전력에 패전을 거듭하였고 그렇게 북원은 멸망하여 명나라, 조선에게 흡수당한다.
조선은 이번 파병의 대가로 대만섬과 류큐 왕국의 패권, 그리고 요동성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만력제는 이것을 흔쾌히 들어주며
광무제 -제국의 건국자-
이지가 즉위하고 난 후 하북에서 이자성이 난을 일으켰다. 이자성의 난으로 중원은 혼란에 빠졌는데 화북에서는 이자성이 순나라를 건립하였고 강남에서는 하북에서 도망쳐온 남명, 쓰촨성 일대에서 궐기한 촉나라가 거대한 중원땅을 두고 삼파전을 벌이는 형국이 생겨났다.
이러한 삼파전에 조선 국왕 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