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기계들의 유산)


대독일국
Großdeutschland


혁명의 승리자
1918년, 독일 민족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이겨내고
총통과 국방군은 우리를 영광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막을 국가는 없을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영광은 없었던듯 사라졌지만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혁명이라 부를것이고 우리는 혁명의 승리자들 입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 요제프 괴벨스

개요

유럽 일대에 위치한 전체주의 국가다. 1,2차 기업전쟁을 일으켰으며 2차 기업전쟁에서 승리해 미국,일본,이탈리아와 함께 세게 초강대국중 하나며 경제,군사적으로 미국에 대적할수 있는 몇안되는 국가다. 히틀러가 암살되고 국방군의 쿠데타로 총통 종신집권이 사라졌고 선출직으로 바뀌었다

군사,경제 협력기구인 라이히스팍트의 수장국이며 군부가 집권해있고 나치당은 꼭두각시로 있다. 사회적으로 인권과 언론탄압 문제가 심긱한 편이다.

주요도시

노이 베를린
neues berlin
슈페어가 설계하고 지은 이 도시는 그야말로 세계수도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곳입니다,
독일의 중심지로써 모든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고있는줄 알았죠, 하지만 어둠도 존재합니다.
먄약 독일이 혼란에 휩싸인다면 이곳은 제일먼저 잿더미로 변할것이고
모든 이들의 작품은 그저 휴지조각에 불과 해질겁니다.

역사



굴욕의 시대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1871년 독일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독일의 통일 이후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게 되고 영국의 턱밑까지 올라오게 된다. 빌헬름 1세는 경제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고 베를린 국가대학교를 설립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데려와 기술 개발을 가속화 시켰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1880년대 유럽이 경제침체에 빠질때 러시아와 함께 성장세를 유지한다. 이후 1911년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고 적군과 민스크 조약을 채결해 막대한 동방 영토를 채결한다. 자원,식량문제가 해결된 독일은 원동력을 잃어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의 경제정책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고 1913년 영국의 경제력을 추월하며 세계 초강대국으로 등극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MI6를 동원하여 에베르트 총리를 암살하는 뉘른베르크 사건을 일으키고 얼마뒤 영국의 짓이라는것이 밝혀지자 황제인 빌헬름 2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진행하며 1차 기업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동맹국을 결성하고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협상국 군대를 갈아버리며 진격해온다. 1915년 막스 폰 하우젠 장군의 지위 아래에 파리를 함락시키는등 승승장구 하지만 식민지인들까지 강제 징집해온 영국과 프랑스군이 인명경시 사상으로 무장하고 돌격해오자 독일군은 밀리게 되고 1917년 영국군이 파리를 수복하며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이후 총사령관에 오른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공세를 진행하지만 막히게 되고 소련군도 서방공세로 독일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결국 협상의사를 표명하고 베르사유 조약이 채결된다. 하지만 양측의 피해가 매우 컸던탓에 협상을 주도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한테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게 된다. 군대보유 제한, 1500조원의 배상금 지불, 신생국인 폴란드에게 영토할양, 라인강 서부 비무장화, 식민지의 포기등 가혹한 조건이 요구되었다. 협상에서 제국 유지는 결정 되었지만 독일 군부가 일으킨 공화주의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다.

어둠속 빛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에 시달리게 된다.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오고 배상금을 못갚을 지경이 되자 1920년 프랑스가 대독일 무역금지령자르 점령으로 압박하자 보다못한 미국이 투자를 진행하며 인플레이션이 해결되기 시작하고 정부 채계가 잡혀가기 시작하지만 독일 공산당의 사회주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거기에 영국발 대공황까지 들이닥치자 이에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의회에 진출하며 독일내의 유력 정당으로 부상한다. 나치당은 무능력한 경찰과 군대를 대신하여 준군사조직인 돌격대를 운영하며 파업등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1928년 사회민주당에 이은 원내 제2당에 오르게 되고 1929년 미국발 대공황까지 오자 전체주의와 공황 해결을 약속하던 나치당이 원내 제1당에 등극하게 된다. 1930년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 부터 총리로 임명되고 1931년 힌덴부르크 마저 사망하자 총리와 대통령을 합친 총통에 오르게 된다. 1933년 수권법이 통과되어 나치당과 히틀러는 법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934년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 하였고 독소 우호조약으로 소련의 막대한 지하자원을 헐값에 매입한다. 메가코프와 과학자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영국,미국과 다르게 대공황을 빠르게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고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다. 1936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팽창을 본격화 했지만 공황에 아직도 허덕이던 영국이 독일의 행보를 묵인한다. 이후 오스트리아 병합, 폴란드 전쟁등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고 1938년 영국-독일 군사조약으로 묶여있던 해공군의 증강과 군사기술 개발도 해제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목표는 세계정복이었고 1939년 낫질작전으로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침공하며 2차 기업전쟁을 일으킨다.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쟁병기들을 앞세워 영국과 프랑스군을 갈아내버리며 진격해오고 있었고 노르웨이,프랑스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전멸시킨다. 이후 1941년 도버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을 전멸시키고 작전명 매서운 공세로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을 일으킨다. 얼마뒤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이 참전하지만 미국도 빌빌거리고 있었다. 1942년 크릭스마리네는 시대를 초월한 항공모함과 전함을 앞세워 보르도 해전으로 영국 해군을 전멸시키고 루푸트바페는 런던 대공습으로 대규모 폭격을 날리고 있었다. 이후 미국이 태평양에 정신이 팔린 틈을타서 바다사자 작전을 게시하며 영국에 상륙한다. 처절하게 저항하는 미군과 영국군을 갈아버리며 진격해오고 있었고 잉글랜드가 함락되고 마지막 저항거점인 스코틀랜드마저 함락되자 영국도 항복해버린다. 미국도 총체적 패배를 인정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모여 마드리드 조약을 채결한다.

높은 성의 사나이

마드리드 조약의 채결로 독일은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대영제국과 프랑스를 해체시키고 자신들의 괴뢰국으로 만들었고 소련도 항복시키며 모스크바까지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1947년 제3차 추축국 회의에서 영토문제로 이탈리아가 독일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1949년 일본과의 갈등으로 일-독 결렬이 일어나며 추축국이 해체된다. 추축국이 해체되고 독일은 라이히스팍트를 결성하며 다시 세력을 구성했고 아프리카와 러시아에서 막대한 자원과 노에를 데려오며 고속 성장하게 된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주도로 베를린 재건설 프로젝트인 뉴 베를린 계획도 성공시키며 뉴욕과 도쿄에 버금가는 대도시로 성장시킨다. 하지만 히틀러의 건강은 급속하게 악화되었고 나치당 내부 권력 투쟁은 심해지고 있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파리를 방문하던 도중 레지스탕스에게 암살당하고 하인리히 힘러,마르틴 보어만,헤르만 괴링,알베르트 슈페어,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등 여러 게파로 갈라져 다투고 있었다. 1951년 히틀러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괴링을 중심으로한 루푸트바페가 어둠의 6월 사건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된다. 이후 친위대와 공군간의 총격전까지 일어나는등 내전 직전까지 치닫게된다. 1955년 히틀러가 사망하고 카를 되니츠가 후계자로 지정되지만 여전히 정국은 불안전했다. 내부 다툼속 되니츠는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해군인 크릭스마리네도 분열되있는 상태였다. 외부에서도 저항운동이 이어져 괴뢰국들과 식민지 곳곳에서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보다못한 국방군에서 개혁파인 한스 슈파이델과 보수파 페르디난트 쇠르너 장군이 연합하여 피의 하루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 직후 총통인 되니츠가 생포당하고 전지역의 친위대 주둔지와,공군과 해군 기지가 일시적으로 공격당한다. 라이히스팍트 곳곳에서 총격전과 폭발소리가 들려오지만 쿠데타 하루만에 베를린이 국방군 손에 넘어갔고 슈파이델은 의회인 라이히스탁에서 대독일 군사정부를 수립한다. 4개월뒤 노르웨이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친위대 사단이 항복하고 국방군의 쿠데타는 성공하게 된다. 붉은 밤인 대숙청으로 나치당 거물 상당수가 대거 숙청당했고 나치당으로 전향했던 당내 온건파 쿠르트 슈마허를 임시 정부수반으로 앉히게 된다. 하지만 오랜 혼란으로 독일은 망가져 있었고 메가코프들도 피의 하루에 휘말려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슈마허 내각은 군축을 진행하지만 이에 국방군이 반발하게 되고 군부와 당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동으로 도망친 서러시아 혁명전선바실리 블류헤르가 군벌들을 통합하고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를 침공하며 1960년 서러시아 전쟁을 일으킨다. 러시아 주둔 독일군이 순식간에 붕괴하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소련군에게 잠시 수복되기도 하는등 독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100만명의 사상자를 낳으며 힘들게 독일군의 승리로 끝난다. 분노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대학살을 자행하며 200만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을 학살해버리고 군부는 슈마트 총통을 몰아내버리고 국발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이 총통에 오른다. 여려 혼란과 전쟁으로 인한 전비소모로 경제는 박살나게 되고 중산층이 붕괴하며 빈부격차가 극심해진다. 카이텔은 민생에 무관심한채 군비만 늘리는데 급급했고 얼마뒤 새로운 행정기구인 국가위원회를 설립한뒤 건강악화를 이유로 사임한다.

방안에서

1966년 국가위원회의 주도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총통으로 선출된다. 키징어는 신헌법인 국가헌법을 비준하고 의회중심 정부인 라이히스탁 임시정부를 설립, 경제개혁을 시도한다. 기업들을 밀어주며 경제가 다시 성장하게 되고 10년만에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만 대부분의 이익은 기업들에게 돌아가고 빈부격차는 여전해진다. 오랜 빈곤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지만 군부는 베를린 학살을 벌이며 잔혹하게 탄압하게 되고 전쟁병기와 화학무기를 각종 분쟁에서 사용한다. 중앙아프리카 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며 수십만명을 죽였고 남프랑스 전쟁에서 카이로 협정으로 금지된 전쟁무기를 투입하는등 국제법을 어기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도쿄의 봄으로 일본에 자유가 찾아올때 독일은 여전히 군부가 실권을 잡고 전체주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치당 내부에서 헬무트 콜을 중심으로한 민주주의 세력인 소장파가 존재하지만 1969년 국방군이 주도한 나치당 대숙청으로 대거 숙청당한다. 키징어는 나치당이 대숙청 당하는것을 보고 개혁정책을 포기하고 군부에 순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