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제국
대동국
大同國

19351940
국기
동아합중국괴뢰정권 혹은 미승인국
수도 아얼산시(阿尔山市)
정치
공용어 몽골어, 중국어, 동아어
정부 형태 군정, 독재정, 괴뢰 왕정
주석 → 대동왕
主席 → 大同王
진둥허金東河 (초대)
김석범金錫範 (2대)
이규헌李圭憲 (3대)
입법 대동협화회大同協和會
역사
 • 가네야마 사건 1935년 1월 16일
 • 둥허베이 사변 1935년 2월 3일
 • 7.15 사건 1936년 7월 15일
 • 행정 통합 선언 1940년 6월 5일
지리
면적 32,340㎢
인구
어림인구수 342,000명

대동국(중국어: 大同國)은 존속한 몽강제국(夢疆帝國) 서부 내몽골(內蒙古) 지방에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존속한 괴뢰국(傀儡國)이자 미승인국(未承認國)이다. 동아합중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된 국가였던 몽강제국과는 다르게, 일부 탈영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군벌(軍閥) 집단이 내세운 국가였다. 대동협화회(大同協和會)라는 지방 입법기구를 설치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등 실질적인 국가 행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동중전쟁(東中戰爭)이 한창이던 1940년에 동북관군(東北關軍)에 의해 대동항군자치정부(大同抗軍自治政府)가 설치되면서 멸망하였다.

건국운동과 가네야마 사건

1933년, 열하사변(熱河事變)으로 몽강국(蒙疆國)을 건국하고 권력을 차지했던 이용갑(李龍甲)을 눈여겨 본 동북관군(東北關軍)에서는 한바탕 공을 세워 출세해보자 하는 야심에 물든 장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동북관군 정보과장 진둥허(金東河) 참령를 비롯한 고위급 장교들은 바옌나오얼(巴彦淖尔) 일대의 남아있던 몽골 왕공들을 규합시켜 대한의군(大漢義軍)라는 유격대(遊擊隊)를 비밀리에 운용하여 중화민국군(中華民國軍)을 교묘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미 분리독립된 내몽골 일대에 대해서 사실상의 통치권을 포기한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 聯合政府)는 탕구협정(塘沽協定)을 바탕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 일대에 대한 수비만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불필요한 분쟁을 차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동북관군은 몽골인 출신 리서우신(李守信)을 바예나오얼로 침투하여 바옌나오얼특별자치구(巴彦淖尔特別自治區)를 조직시키고 그를 행정장관 및 군장으로 임명시켜 내몽골 서부 일대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몽강국은 내몽골 서부 일대에 대한 권익 확장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었으며, 진둥허를 비롯한 동북관군의 진출을 허용하고 있었다. 진둥허는 내몽골 서부에 대한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기를 고대하였으며, 그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했던 김석범(金錫範) 정위를 비롯한 일부 동북관군을 통해 상부의 보고 없이 중국인을 몽강국 군인으로 변장시킨 뒤 이를 참살한 가네야마 사건(金山事件)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한의군과 함께 린허(临河) 지방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바옌나오얼 일대를 정복한 뒤 덩커우(磴口)에서 지방자치위원회를 수립, 2월 3일에 독립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둥허베이 사변과 왕국의 수립

가네야마 사건과 린허 지방 소요 사태로 대한의군동북관군계엄령(戒嚴令)을 펼치자, 많은 한인(漢人)들은 이에 반발하여 항진 사태(杭锦事態)를 벌이게 되었다. 이에 진둥허는 '살광작전'(殺光作戰)이라고 불리는 둥허베이 사변(東河北事變)을 일으켜 수많은 한인들을 몰살하고 항복한 민간인까지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몰아 기관총(機關銃)으로 쓸어버리면서 7천 혹은 8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과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3대 통치자로 군림했던 이규헌(李圭憲)은 둥허베이 사변에 대해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너무나도 참혹했다.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숨쉬는게 두려웠다. 군대는 여인을 강간하고, 다시 강간하고, 그러다가 여인이 쓰러지면 목을 매달았다. 장군은 살육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살육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동하북참변」(1956)

가히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을 연상한다고 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둥허베이 사변 이후에는 서부 내몽골 일대의 통치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한 진둥허김석범을 주축으로 동북관군의 장교들로 구성된 대동협화회(大同協和會)과 설립되어 공화정을 위시한 자치 정권을 수립할 것임을 밝혔다. 진둥허는 곧장 자치 정권의 주석(主席)으로 추대되었으나 권위주의(權威主義)와 군부독재(軍部獨裁)에 집착한 나머지 '국왕'을 칭하기 시작했으며, 대동인(大同人)이라는 인위적인 민족 정체성 확립 정책을 펼치고 '왕권 강화'라는 명목을 들어 동북관군 출신 관료들의 군권 및 행정권을 몰수하는 등 1인 독재를 위한 작업에 나섰고, 결국 등을 돌린 협화회 관료들은 김석범을 중심으로 7.15 사건(七-十五事件)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제 통치를 앞세운 진둥허는 암살되었으며, 권력을 되찾은 대동협화회는 형식상의 입헌군주제를 본받으며 김석범을 왕위에 올리는 괴뢰국 체제를 성립시켰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몽강제국(夢疆帝國), 신강왕국(新疆王國) 및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와의 교류 서신에서 '대동국 주석'(大同國主席)이라 표현하면서 '내왕외공'(內王外共) 정책을 추진하는 등 합법적인 독립정권임을 과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립화 노력과 멸망

실질적인 대동 정권의 운영은 대동협화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정권의 막대한 영향력과 지지를 등에 업은 김석범이용갑이 추진했던 "몽강제국 경제계획 5개년"의 영향을 받은 경제 계획 정책을 수립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대동협화회 영향권 내에 놓여진 몽골 왕공들과 한인들의 불만 및 소요를 줄이는 것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경제 개발을 통한 독립 정권의 안정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표명했으며, 이에따라 공업진흥을 위하여 현지 한인들을 통한 면직 산업 등 경공업 개발에 치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위안(五原) 일대를 공업도시화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짧은 기간 내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6.5x50mm SR 탄약'과 이에 호환하던 연발 소총인 4식 복사소총(四式複寫小銃)을 생산해냄에 따라 자체적인 군사력 향상을 도모하기도 했다.

역대 통치자

대수 묘호 시호 연호 재위 기간 비고
제1대 덕종(德宗) 무열대동왕(武烈大同王) 진둥허(金東河) 강건대국(康建大國) 1935년 - 1936년 7.15 사건으로 암살.
제2대 무종(武宗) 승화대동왕(昇和大同王) 김석범(金錫範) 함광(咸光) 1936년 - 1938년 급사.
제3대 말종(末宗) - 이규헌(李圭憲) 천희(天禧) 1938년 - 1940년 대동항군자치정부로 왕위 박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