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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國의北方擴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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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北伐 | 女眞征伐 | 歸源之征 | ||
1357年 ~ 1371年 | 1434年 ~ 1443年 | 1627年 ~ 1645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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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機 | 1357年6月 ~ 1371年5月4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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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因 | 進安帝의反元政策 | ||
交戰勢力 | 朝鮮 建度新政 (攻擊) 勝 |
親元勢力 (防禦) 敗 | |
主要人物 | 指揮官 ㅤ |
指揮官 ㅤ | |
參加者 ㅤ |
參加者 ㅤ | ||
兵力 | |||
結果 | |||
影響 | 李成桂의影響力强化 |
槪要
大北伐은 진안제 때 있었던 북벌로, 원이 쇠퇴하고 원속국기가 끝나며 건도신정이 시작되면서 이루어진 원정이다. 또한 고토 회복의 시발점이 된 정벌이다.
情勢
원나라는 1351년 홍건적이 봉기하는 등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해였던 원나라는 내부 반란 진압에 힘을 쏟기 위해 외부보다 내부에 신경을 더 쓰기 시작했다. 요동으로 밀려난 동녕부 등 친원세력들은 예전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은 병신정변을 일으키며 원의 간섭을 떨쳐낸 아사달 건도신정으로서는 완전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적기가 찾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展開
婆娑府征伐
진안제는 1351년, 군사 검열을 진행하였다. 친원 세력이 버티고 있던 요동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요동 정벌에 대해 재위 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압록강 건너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파사부(현재의 安東道(단둥 인근)) 공략이었다. 진안제는 1357년, 인당(印璫)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계축일. 인당(印璫)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원은 요동의 주요 도로마다 역참을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파사부였다. 당시의 파사부는 현재의 대도시 안동부와 같이 압록강의 하구로서 아사달반도와 요동을 잇는 통로였다. 고구려 미천왕 때 점령한 서안평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그 후에 고구려에서는 구련성(九蓮成)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명나라가 건국한 직후인 1368년, 진안제는 사신을 보내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 요동은 명나라와 원나라 모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내부 친원 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빴고, 원나라는 더 이상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 이성계, 이인임 등 건도신정의 정치적 주역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370년 1월 겨울. 아사달은 파사부에 이어 요동성으로 가는 주요 요충지인 고구려의 첫 수도, 忽本城(졸본성)이 있었던 오녀산성을 공략하게 된다.
遼東征伐
五女山城攻擊
오녀산성 공격에 동원된 병력은 총 15,000명이었는데 서북과 동북의 병사는 각각 보병 9,000명, 기병 600기 / 보병 4,700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고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친위 병력은 1,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은 중앙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오녀산성을 쳤다.
오녀산성을 공략할 때 이성계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이성계는 난전 속에서 본인 활도 아니고 종의 활을 빌려서 편전을 쐈는데 70발 모두를 적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렸다. 이러한 초인적인 포스를 풍긴 이성계의 활약으로 성을 함락시키고 10,000호가 넘는 사람들이 투항했고 그 결과 아사달의 정벌군은 파사부와 오녀산성이라는 두 개의 주요 길목 점령에 성공하며 요동성 정벌에 한발 더 다가섰다.
遼東城攻擊
오녀산성이 점령된 이후 기새인첩목아(기사인테무르)는 아사달 출신 벼슬아치인 김백안(김바얀)과 손을 잡고 요동 일대에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기사인테무르는 진안제에게 병신정변으로 살해당한 권신 기철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1290년 벌내(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전된 동녕총관부를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켜 아사달 북쪽을 침공했다. 아사달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 후, 곧바로 그들의 본거지인 요동성으로 칼끝을 돌렸다.
1370년 10월, 진안제는 요동성에 남아 있던 기사인테무르를 잡아 족치기 위하여 원정군 총 책임자인 이인임을 필두로 지용수, 양백안(양바얀), 이성계, 임견미가 이끄는 군대가 요동으로 향했다.
압록을 도하한 후 요동성 동쪽 200리 지점인 나장탑에 도착했는데 이를 계산하면 당시 아사달군은 하루에 100리씩 행군을 한 셈이다. 이후 나장탑에 군 주둔지를 설치한 후 지용수는 홍인계, 최공초 등에게 기병 3,000기를 주어 요동성을 공략하게 하고 본대는 뒤이어 따라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단순한 공격뿐 아니라 심리전을 펼쳤는데 "요동 땅은 원래 우리 땅이었고 요동 백성은 우리 백성인데 이제 되찾으러 왔다. 다만 투항하면 봐주겠다"라는 방을 요동성 곳곳에 띄웠다.
기사인테무르는 기병 3,000명을 상대하기 위해 공성을 하지 않고 병력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왔으나 아사달군 본대가 도착해 이들을 싹 쓸었다. 기사인테무르가 이끌고 나온 장수중에 처명(處明)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 싸우자 이성계가 몽골어를 할 줄 아는 이원경에게 항복 권유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자 이성계는 활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고 두 번째 권유에도 거절하자 처명의 허벅다리를 맞춰버렸다. 이에 처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고 이성계는 그를 풀어주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온 처명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걸었는데 이원경이 마지막으로 투항을 권했다. 결국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이성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처명이 항복하자 어떤 자가 성 위에 올라와 "우리는 항복하려고 하였는데 성주가 강제로 싸우라고 우릴 몰아붙이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 백성들은 싸울 의도가 없으니) 공격하면 거저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리쳤으며 이에 아사달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반나절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1370년 11월 4일, 대조영이 세운 발해 멸망 후 444년만에, 또한 고영창의 대발해가 멸망한 지 254년만에 아사달은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다. 아쉽게 기사인테무르를 잡진 못했지만 그의 측근인 김바얀을 사로잡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후 진안제는 동녕총관부에 "우리가 요동을 친 건 기사인테무르가 감히 원나라 황제의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요동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땅이었으니 따지지 말라"라는 내용을 요지로 한 공문을 보냈다. 동시에 새로이 복속한 영토의 백성들을 아사달의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대할 것을 지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