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식민시대
1862년 6월 5일 프랑스와 대남국 응우옌 왕조 간의 제1차 사이공 조약이 맺어지며, 인도차이나 지역에 본격적인 식민화의 물결이 퍼지기 시작한다.
1871년 6월 1일 프랑스와 한국 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된다. 전쟁 초반, 대부분의 나라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변방의 소국에게 유럽의 대국 프랑스가 패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은 프랑스를 빠르게 격퇴한다. 서로 거리가 멀다보니 대부분 전투가 해전으로 전개되었는데, 한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밀어낸다. 한국 남해 인근에서 첫 전투가 발생하고서 프랑스가 점점 밀려나 마지막 해전에서는 사이공 앞 바다까지 밀려난다.
1871년 7월 3일 대한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을 점령한다. 그 결과, 프랑스는 한국과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며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모든 권리를 한국에게 이양한다. 조약 자체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의 권리 포기였다. 하지만 사실상 한국이 인도차이나의 권리를 모두 차지해 식민화하겠다는 조약이다. 그렇게 인도차이나는 한국에게 넘어가 대한령 대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
1886년 탐험가 강철속에 의해 훗날 대월 연방의 라오스 주가 될 지역의 시암의 조공국들을 정복한다. 1893년 시암에서는 이에 대해 항의하지만, 한국은 탐험가 서나준을 죽인 것을 빌미로 시암을 침공한다. 이후 1907년까지 시암에 군대를 주둔하다가 한국은 시암에게 캄보디아 영토를 할양받으며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다. 주변국의 견제로 시암이 한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면했으나, 30년 간 강도 높은 내정간섭을 받는다.
1894년 7월 25일 한청전쟁을 일으킨 한국은 하노이가 있는 통킹 지역의 권리를 청나라로부터 넘겨받으며 대월 지역에 대한 완전한 우위를 점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대월이라는 명칭에 반감을 가지는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이 생겨났다.
대월 독립운동
1930년 2월 3일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호찌민이 대월 지역의 사회주의 조직을 모아 대월 공산당을 창당한다. 대월 공산당은 한국 몰래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대한령 대월에 자신들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1935년 대월 공산단 제1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대월 전역에서 대월 공산당의 사보타주가 발생한다.
1941년 5월 19일 대월 공산당이 기획한 대규모 봉기가 하노이에서 발생한다. 그동안 대월 전역에 사보타주를 진행하며 한국의 행정력이 분산되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월 공산당은 하노이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한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식민지 주민들은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대월 공산당이 식민지 주민들을 상대로 공산주의 선전을 진행하여 대월 북부에서 한국이 일시적으로 통제권을 잃게 된다. 1년 간의 전투는 기습적으로 하이퐁에 상륙한 한국에 의해 허를 찔린 대월 공산당이 당황하여 하노이를 빼앗기며 한국의 승리로 끝이난다. 대월 공산당의 수뇌부는 탈출하여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도망간다.
한국은 이러한 출혈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했기에 식민지에 큰 자치권을 줄 계획을 세운다.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이 연방군주국가로 전환하며 대한합중국으로 국명을 변경한다. 그와 동시에 대월 지역은 대한령 대월을 해체하고 그 산하에 있던 5개 식민지를 자치주로서 편입한다.
독립
냉전 시작과 함께 한국의 기존 식민지인 자치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세진다. 이는 역시 소련의 지원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한국은 더이상 출혈을 감수하면서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은 소련의 뜻대로 이루어줄 생각은 없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좌익 정당이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막으려고 한다. 대월 독립 전, 자치령으로 만들어 한국이 일정기간 관리한다. 그 후에 좌익 성향의 정당을 배제한 총선을 개최해 안정화하기로 한다.
1949년 6월 14일 한국은 대월 지역 5개 자치주를 한국에서 분리된 자치령인 대월 자치령을 수립한다. 대월 자치령은 어디까지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자치령으로 오래 유지된 국가는 아니다.[1]
1954년 7월 21일 대월은 한국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여 대월 연방이 된다.
대월 내전
2012년 4월 14일 대월 공산당이 후에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나 실패하자 바로 다음날인 4월 15일 다시금 하오이에서 대규모 소요사태를 일으키며 대월 내전이 시작된다.
대월 내전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여 하노이를 대월 공산당이 점령하고 통킹 지역을 장악한다. 대월 연방군이 통킹에 집중하고 있을 때, 캄보디아 지역에서도 봉기를 일으키며 대월 연방을 위협했다.
대월 연방은 PRTO 가입국가였으나, 한국이 제대로 개입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이유는 당시 PRTO가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아 회원국 내부의 반란이나 내전과 같은 상황의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열강인 한국이 함부로 개입했다가는 강대국의 주권 침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음은 물론, 북방의 경비가 약해져 중국과 러시아의 도발에 대응하기 쉽지 않은 상황적 이유가 겹치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대월에 물밑 지원을 통해 대월 정부를 지원했고 그 덕에 한때 대월 반도 전역을 차지할 것 같던 대월 공산당의 기세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20세기 때와는 달리 대월의 경제력이 많이 성장해 공산당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국민적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전을 일으키니 국민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그 기세 자체가 20세기보다 약했다. 그런데 2014년 공산중국이 자유중국 침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한국군의 시선이 자유중국으로 돌려진다. 그 틈을 타서 공산중국이 대월 공산당을 지원하고 대월 인민군으로 변장한 중공군이 전장에 뛰어들며 다시 대월 공산당이 날뛰기 시작한다.
2차 대전 직전까지 대월 공산당은 통킹 지역과 라오스 참빠삭 주, 캄보디아 오다르메안체인 주, 프레아비헤아르 주를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3차 국공내전 발발과 함께 대월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공산중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한다고 발표한다. 동시에 대월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선포한다. 통킹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참빠삭에 라오 사회주의 공화국, 오다르메안체인 주, 프레아비헤아르 주에 캄푸치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한다.
- ↑ 인근 바라트 연방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