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6공은 20대 대통령 이재열의 취임 이후부터 눈에 띄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내·외부적으로 수많은 난제에 부딪혔다. 대통령의 참모들과 국회의원은 최소한의 판단력도 갖추지 않고 정책을 시행했으며, 권력은 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결국, 제6공 최후의 5년은 무능한 정치인들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 지지하지 않는 국민 간의 정쟁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 5년간 정부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대외 요건 또한 좋지 않았다. 몇 년 전 창궐한 모종의 감염병으로 일일 확진자가 1만 명 이상 발생했고, 점차 경제적 생산력이 감소하였다. 감염병의 확산을 피해 한국으로 이주하려는 탈북민의 빈번한 침입으로 안보 위협도 계속 높아지던 추세였다. 대한민국이 아직 건재할 때도 탈북민이나 남파공작원이 군의 경계망을 뚫고 잠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최전방에 배치해야 했지만, 이미 저출산과 국론의 분열, 무능한 정치인과 감염병으로 몰락해 버린 한국은 그럴만한 돈도, 인력도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만회하고자 정부는 예비군, 사회복무요원, 모든 남성과 현역 판정을 받은 여성까지 모두 징집해 병력으로 사용하는 가장 쉬운 길을 택했다.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 후한과 로마처럼 대한민국 역시 이 군인 출신 장교들의 쿠데타로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된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2029년 3월, 강제 징집된 군인 출신 장교인 윤성민이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13명의 장교와 2,000명의 예하 병력을 이끌고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윤성민은 뛰어난 조직력과 상상력을 갖춘 인물이었고, 의지할 곳이 없었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울 방법을 설파하며 사로잡았다. 동년 9월이 되자 전국에서 군경과 윤성민을 따르는 국민들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10월에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다음 달에 발포 명령을 받은 사령부마저 쿠데타 세력으로 전향하여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윤성민의 쿠데타 성공 이후 대부분의 군대는 윤성민 정권 휘하에 들어갔지만, 쿠데타 시점에서 윤성민의 계엄군은 한국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엔 아직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군벌과 윤성민 정권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상당했다. 따라서 윤성민은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완전한 새 국가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축출 작업을 시행했고, 반 쿠데타 진영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군벌은 대한민국 제7공화국을 세우고, 반 윤성민 세력은 대구 공화국을 건국한다. 기타 군벌과 국민도 내가 최고가 되겠다며 들고 일어나는 등 각 세력은 군웅할거에 진입했다. 여기에 기존의 갈등이 봉기 세력이 되고, 내전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 또, 미국, 일본을 위시한 UN군이 특정 세력을 지원했다. 게다가 중국 역시 내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중국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기 위해 윤성민을 지원하며 내전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했다. 계엄군과 저항군은 수도권에서 8년 간 교전했고, 곧 전국으로 전투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내전의 확산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이 권력의 공백을 지역 군벌이 메웠다. 그리고 각지에서 격화된 세력들의 분쟁은 대한전국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은 실질 행정력이 청와대 근처에만 미칠 정도로 초라한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