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내전
German Civil War
기간 1936년 3월 11일1936년 10월 9일
장소 독일 영토 내
원인 나치의 급진적인 정책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이후 발생한 군사반란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왕당파 파시스트파
독일 정통파 나치 독일
지휘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에리히 폰 만슈타인
빌헬름 리스트
에르빈 롬멜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오스카 디를레방어
하인리히 힘러
병력 19만 4천명 21만 6천명
피해 사상자 11만 8천명 사상자 38만 4천명
결과 독일 정통파 승리,독일 입헌제국 건국
영향 파시스트 몰락 촉발
빌헬르니즘의 대두

개요



독일 내전(German Civil War/Deutscher Bürgerkrieg)은 1936년 3월 11일 브릴론 봉기 이후 같은 해 10월 9일까지 벌어진 독일의 내전이다.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을 필두로 한 왕당파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충돌하였고, 이 전쟁으로 인해 나치 정권이 몰락하였으며 유럽 대륙 내 파시즘의 양상이 크게 변화했다. 또한 세계 대전의 판도가 많은 정치학자들의 시선과는 다르게 이때부터 차츰차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배경

수권법 통과

1933년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본격적으로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는 이후 전체주의에 입각하여 여러 확장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단적으로 정당신설금지법을 발의한지 5분만에 통과시키고 수권법 통과 반대연설을 했던 오토 벨스를 즉시 독일에서 추방시키는 등,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권도 장악하여 급진적으로 나치 사상을 확산시켰다. 더군다나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자신을 대통령과 총통을 역임하는 국가원수 '총통' 으로 칭하며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 스트레사 체제 무력화를 연속적으로 성공하며 전쟁으로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히틀러의 시원시원한 행보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군부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히틀러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히틀러가 '라인란트를 재무장시키겠다'라는 파격 선언을 하면서 독일 전체가 술렁였다.

히틀러는 이미 베르사유 조약 파기 시점에 교묘한 술수를 썼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라인란트 재무장에 제대로 대응할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신경쓰느라 라인란트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랐다. 영국의 소수 정부 인사들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예측하긴 했지만 외교적인 방법이 아닌 무력을 사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대공황의 영향으로 독일보다도 군사력이 딸렸고 결정적으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군사력을 30만 대군으로 오판하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하지만 30만이라는 어마무시한 숫자를 지나치다 생각한 프랑스 정부가 다시 측정하자 독일군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군의 숫자는 프랑스군의 숫자보다 많았고, 이에 프랑스 정부는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라인란트 재무장을 막아보기로 결정한다. 영국은 아직 전쟁 준비는 안되어 있지만 외교적 압박으로 충분히 라인란트 재무장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1936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루앙 선언을 통해 라인란트 재무장에 전격적으로 반대함을 표명했다.

브릴론 봉기

하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확고하게 라인란트 재무장을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강경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독일 내의 여론은 이제 히틀러가 너무 지나치게 라인란트 재무장을 외치는 바람에 전쟁나게 생겼다며 히틀러의 지지도가 낮아졌고, 대표적인 반 나치 세력인 독일 군부는 이를 틈타 히틀러의 폭주를 막고 독일을 되돌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모를리가 없던 나치 정권도 군부의 수괴인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을 지속적으로 암살하려 들었으며 하급 장교들을 숙청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마켄젠은 아무 죄없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며 자신을 비롯한 군부는 독일을 패망으로 몰고 가는 히틀러에 맞서 국민들을 이끌고 독일을 지켜내겠다 선언하였다. 이 선언을 흔히 밤베르크 선언으로 부른다. 한편, 이에 격노한 나치 정부가 슈트슈타펠에 소속되었으나 군부 진영으로 넘어간 펠릭스 슈타이너를 본보기로 처형시키면서 군부들을 위축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슈타이너 처형사건으로 독일 내 여론이 히틀러와 나치 정부에 대한 심판론으로 자리잡았고, 이를 기회로 여긴 군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 라인란트 재무장 시점부터 계획해온 반란을 실행한다.

전개

전쟁 발발

Sie werden nicht durchkommen!
그들은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스카 디를레방어, 반군부 연설 중 로베르 니벨의 발언을 인용하며

군부의 주요 관료들의 세력은 주로 브릴론에 국한되었으나 독일 서부에 주둔하던 다른 장교들도 내전에 개입하여, 군부는 빠른 시일 내에 독일 서부 전체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군부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는데, 바로 사기는 넘쳐나지만 흩어져있는 군부세력들을 통솔한 책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나치 정권은 히틀러라는 구심점이 존재했으나 루앙 선언 이후 돌아선 민심으로 인해 병사들의 참전 의욕은 떨어졌다.

한편 나치 정권을 한시라도 빨리 몰락시켜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몰아내려고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흩어져있던 군부 세력이 통합하는데 도움을 주고, 나치세력에 막대한 경제적 제재를 퍼부었고 게다가 군부세력에 막대한 물자지원까지 더해지며 나치독일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나치세력은 서부가 점령될때 서부에 비축해둔 물자를 동부로 옮기는데 성공한 덕분에 조금이라도 버틸수 있었지만, 쾰른 등 라인란트 점령 직후 생긴 공업지대들이 고스란히 군부 측에 넘어간 점 또한 나치 세력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이때부터 전쟁의 성패가 결정지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쟁 초기-전선의 고착화

전쟁 초기 독일 군부는 뛰어난 공업력을 적극 활용하여 기동전 중심의 전투를 진행해왔다. 이에 나치 독일은 군부의 특기인 기동전을 방해하기 위해 시가전을 고집해왔다.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서방의 지원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군부의 진격을 대부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가 나치의 시가전에 대응하여 편제를 바꾸고, 또한 나치군의 사기 문제가 대두되면서 나치 독일의 방식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뤼네부르크는 대규모 항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게 있어 꼭 지켜야 하는 도시였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독일 군부에게 점령 제 1순위였다는 것이다. 뤼네부르크에서도 나치 독일은 군부의 기동전에 맞서 시가전을 고집했고, 실제로 전투 초반에 군부의 진격은 지지부진했다. 군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판을 감수하고 폭격 등으로 평탄화 작업을 개시하여, 시가전으로써의 불리함을 없애버리고 그대로 나치군을 밀어버리며 뤼네부르크 전투는 군부가 승리했다.

뤼네부르크 전투로 나치 세력을 꺾은 군부세력은 또다른 나치즘의 소굴인 바이에른으로 향했다. 전쟁 극초반 군부세력이 뤼네부르크 등 북독일에 집중할 무렵, 나치세력은 바이에른 전선에서 대규모 반격을 실시해 성공하였는데, 이에 대한 손실을 메꾸기 위함이었다. 한편 지나친 진격으로 보급이 부족해진 나치세력은 일단 후퇴하여 뉘른베르크에서 군부세력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결국 군부세력이 뉘른베르크에 당도하여 뉘른베르크 시가전이 발생하였는데, 시가전이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군부세력은 제공권을 잡아 전쟁을 이끌었으며 나치세력의 병사들 또한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 뉘른베르크 전투에서도 군부세력은 가볍게 승리했다.

뉘른베르크 시가전에서 군부가 승리하자 바이에른은 상당히 위험해졌다. 군부세력이 밤베르크만 넘어가면 바이에른은 포위되기 직전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나치세력은 또 다른 지지세력을 잃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인리히 힘러가 직접 군대를 끌고 나서 뉘른베르크 탈환전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군부세력에서도 만만치 않은 장교인 빌헬름 리스트가 나섰고, 뉘른베르크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전의 날, 힘러의 부대가 뉘른베르크 1km 앞까지 진격했으나, 미리 매복해있던 리스트의 부대는 이들을 포위하여 그들의 탱크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결국 힘러 또한 겨우 탈출하고 뉘른베르크 탈환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 중반, 바이에른 점령과 베를린 공습

뉘른베르크 전투에서 완전히 승리한 서부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밤베르크를 지나 결국에는 7월 31일 오버바이에른 전체를 포위하였다. 나치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으며 어떻게든 바이에른의 포위를 뚫어보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군부가 대공세를 펼친 끝에 뮌헨 등 바이에른 지방의 주요 도시가 점령되었고 끝내 바이에른 전체가 군부의 손에 들어갔다. 한편 북부전선에서는 5월 13일 뤼네부르크 전투 승리 이후 서부군이 조금씩 밀고 들어오고 있었는데, 바이에른 전선에서 승리한 남부군이 지원을 펼치며 진격이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서부에 주요 도시들이 포진해 있었기에 이대로 계속 전투를 이어가며 진격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서부지역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독일에게 큰 문제로 작용할 것이라 예상한 군부는 대신 한 도시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다른 지방의 피해는 최소화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것은 베를린 공습으로 이어졌다.

공습 계획이 막 세워졌을 때는 군부 내에서도 미친 짓이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계속해서 전쟁 피해가 커지자 결국 더이상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해 베를린 공습이 필수적임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8월 14일 베를린 공습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나치군을 이끌던 헤르만 괴링이 사망하면서 결과적으로 군부에게 더 유리한 결과가 나타났다.

(베를린 공습을 펼치는 서부 공군)

전쟁 후반, 주요 장교들의 투항과 동부군의 몰락

9월 후반이 되자 서부군은 라이프치히 전투와 포츠담 전투에서 승리하여 작센을 장악하고 베를린 코앞까지 도달한다. 이에 이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를 손수 암살하고 서부군에 투항한다. 이렇게 9월 30일 베를린은 함락된다. 베를린 함락 이후에도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항전을 이어나갔으나, 슈체친과 포즈난의 함락 이후 디를레방어도 결국 투항하며 10월 9일 공식적으로 독일 내전이 종결된다.

전후처리와 전쟁의 결과

내전 이후 군부는 임시정부를 창설하였고, 나치의 확산을 막지 못했던 무능한 민주주의 정부 대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렇게 나온 해결책이 바로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군부 중에는 제국 출신 장교들이 많았고 제국 시절의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로부터 빌헬름 2세를 초청하였고 이렇게 독일 제국이 부활하였다. 실권은 아버지인 빌헬름 2세 대신 총리 빌헬름 3세가 쥐고 있었고 곧 황제대리에 취임하면서 독일은 군부+빌헬름 3세가 통제하는 과두적 독재체제 하에 놓였다.

한편 독일 내전을 지원하여 종전 뒤 온갖 단물을 빨아내려고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온갖 무리한 요구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이에 여러 정치적 공작을 시도했지만 군부에 의해 실패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내정간섭에 대해, 독일은 세력을 키워 이 둘에 대항하고자 여러 확장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독일 내에서 반영, 반프 감정이 강화되고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의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