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내전 (1938: 제국의 몰락)

독일 내전
German Civil War
기간 1938년 12월 9일1942년 8월 5일
장소 독일 영토 내
원인 오스트리아 합병 실패 및 전쟁으로 인한 경제 악화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국방군 친위대 및 나치당
독일 정통파 나치 독일
지휘관 루트비히 베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헤닝 폰 트레슈코프✝
에르빈 폰 비츨레벤✝
에리히 펠기벨✝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파울 하우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테오도어 아이케✝
요제프 디트리히✝
병력 19만 4천명 21만 6천명
피해 사상자 11만 8천명 사상자 38만 4천명
결과 나치당 및 국방군 몰락, 독일평의회연방 건국
영향 폴란드의 동프로이센 병합. 독일의 공산화.

개요

우리 모두에게 죄가 깊다. 우리는 옳은 길에서도 잠시 멈춰서야 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독일 민족을 지옥으로 이끌었다.
- 루트비히 베크의 유언
따라서 개인은 결국 자신의 자아가 국가의 존재 앞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필요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1933년 연설

독일 내전은 1938: 제국의 몰락 세계관에서 1938년 ~ 1942년까지 독일 제3제국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배경

1934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집권은 게르만 민족의 유럽 패권을 완벽하게 만드는 야심찬 계획을 통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현실에서와 같이 1938 세계관에서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당선되었으나, 이후의 전개는 완벽하지 않았다. 1934년에 벌어진 엥겔베르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연방총리의 암살 기도가 실패함으로써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궤멸당하고, 암살같은 극단적인 수를 쓰면서까지 내정 개입을 행하는 나치 독일에 대한 국민 정서는 극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실패하고, 이 시도에 대해 규탄하면서 1938년 1월부터 9월까지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짧은 전쟁이 발생한다. 비록 1년도 안 되는 전쟁이었으나 이미 빚덩이로 쌓은 나치 독일의 경제가 파탄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에 국방군 내부에 있던 융커,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독일 제국 복권파, 통칭 검은 관현악단(Black Orchestra, Schwarze Kapelle)이 쿠데타를 행한다.

역사

발단

SS 사관학교를 점거하려는 독일군 병력.

검은 관현악단은 국방군 내의 여러 장교들과 장성들을 포섭하고,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한번에 무력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을 검거한 후 독일 경제를 파탄낸 책임을 물어 처형한 후, 호엔촐레른 왕가를 복권시켜 다시 새로운 독일 제국을 수립하는 통칭 발키리 작전을 계획, 이를 수행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검은 관현악단에 동참한 독일 국방군 장성들과 부대의 상당 수가 게슈타포에 의해 검거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당에 맹세한 국방군 부대들이 쿠데타에 가담한 국방군 세력을 공격, 국방군의 주요 지휘 체계가 마비된 사이에 주요 도시들 몇몇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한다.

전개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호엔촐레른 왕조는 이미 내전 이후의 새로운 독일은 군부가 비선실세가 되어 자신은 바지사장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때문에 새로운 독일의 왕조로써의 복귀를 거부한다. 이는 국방군 쿠데타 세력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검은 관현악단의 주요 인사였던 루트비히 베크가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섭정을 자칭하며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치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독일의 내전은 그 어느 쪽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베를린의 함락을 가까스로 막아낸 이후 친나치 군사 세력이 형성되긴 했으나 이들은 검은 관현악단이 형성한 반나치 군사 세력에 비해 열세인 부분들이 많았고, 반 파시스트 세력들의 구호인 독일 제국으로의 회귀에 혹한, 산업의 중심이 되어야하는 중장년층은 나치당에 반대했다. 독일의 도심에서 벌어지던 시가전은 지지부진했으며, 각 진영에 투신한 민병대들은 제3제국을 멸망시킬 전쟁을 더욱 절망적으로 오랫동안 끌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헤르만 괴링이 국방군 파벌에 의해서 암살당하며 공군은 혼란에 빠졌고, 반나치 파벌과 친나치 파벌로 찢어져 독일 상공은 혼란스러운 공중전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에리히 레더 해군 총사령관은 독일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 해군 함선들과 병사들을 덴마크, 프랑스 등지로 망명시키기까지 한다.

절정

국방군 장성들을 향해 암살을 시도하는 SS 병사.

1941년 7월, 통칭 납의 여름(Summer of Lead)라 불리는, 국방군과 나치당이 서로에게 행한, 상대의 고위 인사와 장성들에 대한 대규모 암살이 행해졌다. 이렇게 서로를 대상으로 벌인 대규모 암살은 독일 내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응집할만한 인물들이 대다수 살해당했다. 독일 제3제국 내부는 군벌 수준으로 찢어졌고, 이 사건 이후 베를린의 권력은 공백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본토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동프로이센 지방은 동프로이센 독일인들이 스스로 이권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통하여 폴란드에 편입,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실상 동프로이센 지방은 영구상실하였다.

4년의 전쟁 끝에 독일 제3제국 전역은 무정부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어느 국가들도 선뜻 무정부 지역이 된 독일에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대공황의 고통에서 겨우 회복하는 상태였는데, 독일의 무정부 지역에 군을 투입하여 굳이 독일에 걸려있던 높은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1942년 1월에는 섭정을 자칭한 루트비히 베크는 절망해 자살하였고, 1942년 3월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병사들이 국방군 지역으로의 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이미 민간인 학살의 악명을 알고 있던 민간인들이 국방군 잔존 병력들과 함께 저항, 결국 좌절되었으며 4월에는 히틀러 역시 자살하고 만다.

결말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무정부 지역을 평정한 세력은 다름아닌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좌익 세력의 연합이었다. 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은 신-스파르타쿠스 연맹(Neu-Spartakusbund)이었다. 발트 해의 항구에서는 매일 무기를 실은 수송선들이 로스토크로 도착했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의 지휘를 받는 소련 병력들과 함께 들어오는 신-스파르타쿠스 연맹의 입장에선 이미 군벌 수준으로 찢어진 독일 국방군과 SS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월부터 시작된 신스파르타쿠스 연맹과 소련군의 독일 평정은 1942년 8월 5일, 신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병사가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건물에 적흑금 깃발을 꽃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완결되었다.

영향

독일의 내전은 독일 제3제국 영토를 황폐화시켰고, 이로 인해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과 독일 국방군의 부상으로 점점 현실화되어가던 세계 2차 대전의 위기가 순식간에 꺼져버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독일을 지배하던 전통적인 군부 및 귀족 세력들과 신흥 파시스트 세력인 나치당의 주요 인사들이 내전에서 대다수가 사망하고 남은 이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