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공화국 (검은 피의 마르바스)

개요

독일 연방 공화국(Bundersrepublik Deutschland)은 유럽 중부에 위치한 국가로, 동쪽으로 독일 민주 공화국, 남쪽으로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와 맞닿아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명목상으로는 서베를린이나, 분단된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실질적 수도는 본(Bohn)이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서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 제 4위의 경제대국이며 냉전의 최전선으로서 강력한 국방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2차 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라는 입장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국가이다.

역사

2차 대전의 패배와 독일 분단

유럽 전역에서 약 5천만명을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1944년 5월 16일 경 미군에 의해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항복하게 된다. 이후 독일에는 연합군 점령 기구가 들어서게 되며, 미국 주도로 모겐소 계획을 실행하여 모든 공업기반이 해체되고 유럽의 일개 약소국으로 전락할 뻔 했다. 하지만 전후 처리과정에서 미국과 갈등을 빚던 소련이 무단으로 소련 군정청 관할지역에 독일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 폴란드를 합병하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국가들을 공산화하자 서방 연합국은 이에 맞서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 독일 연방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것이 바로 독일 분단의 시작이다.

재건의 시대,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1950년대)

1949년 자유민주주의와 방어적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첫 헌법을 수립한 독일 연방 공화국은 그해 첫 총선을 치뤘다. 1대 총선의 결과 기민련-기사련 연정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가 당선되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집권 1기 무너진 산업시설과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집중하였다. 이때 마셜 플랜이 가동하여 미국의 자금을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서독의 재건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을 기점으로 냉전이 격화되자 영국과 미국을 설득하여 1955년 독일 연방군을 창설하여 재무장을 개시하였다. 이 독일 연방군에는 나치 독일 국방군 인사들이 자문위원 및 고문 혹은 고위 장교로서 기용되었다고 한다.

50년대 후반, 서독의 경제력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을 넘어서기 시작해 서유럽 1위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 시기를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변화와 혼란의 시대 (1960~70년대)

60년대에 들어서 고속 성장세가 한 풀 꺾이고 젊은 신세대들이 정치계에 많이 유입되기 시작하자 독일의 정치 지형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과거사 청산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는 1966년 나치당 출신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가 집권하면서 큰 논란이 되었고, 결국엔 68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과 반전주의, 진보주의의 태동과 겹쳐 시작된 독일의 68 운동은 주로 나치에 가담했던 구세대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을 띄고 있었다. 따라서 1969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는 실각하고 독일 사회민주당과 자유 민주당 연립내각이 들어서면서 사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한다.

새로이 집권한 빌리 브란트 내각은 사회적 시장 경제를 유지하되 복지 제도를 합리적이고 새롭게 개혁하는 한편, 미-소간 갈등이 완화되는 데탕트 기류에 맞춰 동구권 공산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동방정책을 실시하였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독, 소련을 방문하였으며 나치 정권의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 행보를 보여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를 크게 개선하였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의 행보도 순탄치 않았다. 1972년에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발생하였고, 1973년,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세계 전역이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74년 자신의 비서인 권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라는 기욤 간첩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온갖 성추문이 드러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스스로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총리직은 같은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가 이어받게 된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직도 순탄치 않았다. 총리 취임 직후 독일 전역에 여러 테러 조직에 의한 각종 테러가 발생하게 되면서 헬무트 슈미트 내각은 '불협상기조'를 띤 채로 강경진압에 나섰고, 이 진압이 성공을 거두면서 안보 위기를 잘 넘기는 듯 하였으나 1977년 경 동독에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인 SS-20이 배치되자 이에 맞서 NATO의 핵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일명 '동서독 핵우산 경쟁'이 발생하였다.

이 핵우산 경쟁으로 서유럽 시민들은 큰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나아가 무리수를 둔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또한 당 내에서도 68운동 출신의 신세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헬무트 슈미트를 비판하였으며,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암살로 냉전이 다시 50년대 수준으로 격화되자 동방 정책이 실패해버렸다. 결국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1982년 정치적으로 신임을 잃어 의회에게 불신임을 받게 되었고, 신임 총리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다시 도래한 겨울(1980년대~1990년대)

1982년 집권한 요제프 슈트라우스 내각은 동방정책을 계승하는 것을 포기하였으며, 동구권과 적극적인 군비 경쟁을 추구한 서방권의 기조에 따라 군비를 증강하고 전국적으로 보안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NATO의 핵미사일을 계속 서독 영내에 배치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총리 개인의 직설적인 언동이나 스캔들에 의해 언론의 비난과 당 내 갈등에 시달리다가 1988년 10월 3일 급사하면서 그의 자리는 헬무트 콜에게 위임되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이렇다 할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1991년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