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르만국 (신질서의 황혼)

Destiny634, 2024 - |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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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열강 국가
미합중국 대게르만국 대일본제국


KN 상임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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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하이츠팍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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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족의 대게르만국
Großgermanisches Reich der Deutschen Nation
언어별 명칭
영어 German Reich
일본어 ドイツ国
국기
국장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1933 ~ )
상징
국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Horst-Wessel-Lied)
국목 참나무
국조 검독수리
역사
바이마르 공화국 건국 1919년 8월 11일
대독일국 건국 1933년 3월 24일
• 승전 1945년 8월 15일
대게르만국 건국 1946년 4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사망, 슈페어 집권 1963년 10월 15일
독일 노예 반란 1971년 3월 6일 ~ 5월 29일
제2차 서러시아 전쟁 1976년 7월 20일 ~ 1978년 8월 24일
알베르트 슈페어 시니어 사망 및 알베르트 슈페어 주니어 집권 1981년 9월 1일
마르틴 무스그뉘의 쿠데타 1987년 4월 16일
마르틴 무스그뉘 사망 및 알렉산더 가울란트 집권 1997년 2월 2일
• 2022년 게르마니아 전당대회에서 비요른 회케의 후계자 지명 2022년 9월 2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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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게르마니아 (Germania)
최대 도시 게르마니아 (Germania)
53°5′N 14°25′E
면적 958,763km2[1]
접경국 프랑스국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제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스위스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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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25,037,780명 | 세계 9위 (2024년)
밀도 80.24명/km2
출산율 2.38명 (2024년)
기대수명 81세 (2024년)
민족구성 게르만계 87.34%
슬라브계 9.42%
기타 3.24%
언어 공용어 독일어[2]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분포 기독교 28.1%
가톨릭 13.3%
개신교 9.7%
정교회 2.0%
• 기타 1.1%

기타 2.3%
무종교 69.6%
군대 독일 국방군 (Wehrmacht)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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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급 행정구역 30개 관구
특별시 수도 1개 특급시
(게르마니아 특별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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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국가사회주의(수정파), 공화제, 일당제,
민주주의 지수 0.44점 | 권위주의 (2024년)
(168개국중 167위)
총통 (Führer) 알렉산더 가울란트
정부
요인
수상 비요른 회케
내무장관 프리드리히 메르츠
재무장관 앙겔라 메르켈
국가의회 의장 안드레아스 칼비츠
인민재판소장 파울 뤼넨
집권 여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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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
협동조합주의
GDP
(PPP)
$18조 7,388억 5,154만 4,000 | 세계 3위 (2024년)
1인당 $83,270
GDP
(명목)
$15조 3,307억 5,014만 | 세계 3위 (2024년)
1인당 $68,158
외환보유액 $7조 5,983억 4,100만
신용등급 무디스 Aa1
S&P 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라이히스마르크 (€)
ISO 4217 EUR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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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시간대 GMT+00:00
법정 연호 서력 기원
통행 방향 우측통행
ccTLD
.de
국가 코드
276, BRD, DE, DEU
위치 (지도의 검정색 지역)


개요

1948년 아돌프 히틀러의 국명 변경 선언으로부터, 대독일국 시대부터 포함할 경우 1934년 히틀러의 총통 취임부터, 독일, 폴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일대와 러시아 지역, 아프리카 등의 국가판무관부에 걸쳐 존재하는 국가이다. 오늘날 대일본제국, 미국과 함께 세계 3강인 초강대국의 하나이기도 하다. 국제연합(KN)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다.

대게르만국은 간단히 말해서 세계에 퍼져있는 "독일제국"의 핵심이다. 유럽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 소유물 중 다수는 국가의 통합된 일부로 여겨지지만 종종 국가판무관부라고 불리는 자체 민정기관 하에서 운영되었다. 1979년 이후 국가판무관부가 자취를 감추고, 동부 영토는 현지 협력자들을 통한 팍트회원국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계속 주둔하고, 경제적 착취가 이어지는 등 사실상 크게 달라진것은 없다.

독일은 식민지를 관리하고 아인하이츠팍트를 통해 소수의 독립 동맹국과의 관계를 관리한다. 이 세력은 1950년대 독일이 주도한 전후 동맹이며, 지중해를 제외한 유럽 일대를 통합적으로 포괄한다.

다만 공식 국명은 대게르만국이나 사실상 냉전 시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본래 국명 "독일"로 불리는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은 Germany, 일본은 ドイツ。

역사

성립 이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4년간 적들의 끊임없는 압박으로 인해 무너졌고, 전쟁 이후 벌어진 경제적 혼란 속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 사회 독일 노동자당이 큰 인기를 얻었다.

NSDAP는 곧 마르틴 보어만, 알베르트 슈페어,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 많은 회원들을 확보했다.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시작했고,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NSDAP의 영광의 복수라는 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 후,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선출했다.

힌덴부르크의 죽음 이후, NSDAP는 독일을 완전히 장악했다. NSDAP는 독일을 일당 전제주의 정권으로 변모시켰고,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1936년, 독일은 라인란트를 재점령하면서 첫확장을 향해 나아갔다. 프랑스와 영국은 그들을 막지 못했고, 1938년 독일은 친 나치 쿠데타로 오스트리아 연방을 평화적으로 합병시켰다.

'갑작스러운 위기' 기간 동안 NSDAP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갈등을 촉발시키기 위해 범독일 정서를 이용했다. 1차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인과 독일국에 거주하는 독일인[3]의 통일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뮌헨 회담이 열렸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함으로써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설립함과 동시에 슬로바키아국을 괴뢰국으로 설립하였다.

독일은 다음으로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분리시킨 단치히 회랑을 요구했다. 폴란드의 거절에 따라 침공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소련 또한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었다.

초기: 히틀러 정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1945년 8월 15일부터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고 히틀러의 57세 생일인 1946년 4월 20일. 대게르만국 헌법이 확정되고 공식적으로 대게르만국이 들어섰다. 수도 베를린의 이름이 게르마니아로 개칭됐다.

1950년에 게르마니아로 개칭된 신수도의 도심 및 도회지가 완성되어서 게르마니아 국제박람회를 열었다.

대게르만국은 이로서 미국, 일본과 함께 냉전의 세 축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이 주도하는 아인하이츠팍트도 출범했다. 하지만 건국된지 불과 수년 만에 독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독일의 그에 대한 반응은 더욱 강화된 탄압이었다. 급기야 1953년엔 대게르만국 국가의회에선 노예제 공인 법안을 가결하여 이제 합법적으로 러시아인 슬라브족에 대한 무급 착취가 가능해졌다. 특히 우크레이네의 농업지역에서 농업 노예는 극성이었다.

운테멘쉬로 불린 민족, 특히 소련 계열 슬라브족에 대한 독일의 강경한 탄압은 피지배민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기에 충분했고, 1955년 9월 동부 영토에서 소련 잔당의 대규모 저항인 서러시아 전쟁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봉기는 막아냈지만 동부영토와 그곳에 거주한 독일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외교적으로는 일본과 갈등을 빛다가 1950년 추축 동맹이 종료되었으며, 1954년엔 독일의 고압적 태도와 유대인 탄압을 문제삼은 이탈리아 제국을 비롯한 지중해 국가들이 독일과 동맹을 파기하면서 급격히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잃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서 경제는 크게 성장하여 적어도 독일인들의 생활 수준은 미국이 부럽지 않았고, 겉으로 독일의 번영은 영원할듯 보였다. 독일인들이 보기에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었고, 게르마니아는 뉴욕이었다. 서부 영토와 영국, 프랑스 역시 최소한 동부영토보단 좋은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 문제"는 1950년대 말까지 모두 해결했다. 해결이라는 것은 유럽 내의 유대인을 제거한 형태였지만, 정부는 유대인이 시베리아 어딘가로 이주되어 섞여 살고 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구 폴란드 영토 역시 폴란드인을 모두 추방하고 독일 본토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은 시간이 지나며 동부영토 또는 그 밖에 위치한 시베리아까지 밀려나 방황했다. 수백만에 이르는 유대인은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이탈리아 제국으로 도피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 1970년대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이렇게 대게르만국의 속한 시민들은 그 인종에 따라 생활 수준이 철저히 구분되었다. 아예 법률에 아리아인 혈통이 입증된 독일인은 1급 시민, 독일에 신규 병합된 지역에 거주하던 인종과 그 혼혈이 2급 시민, 그리고 총독부(폴란드)가 3급 시민, 국가판무관부령에 거주하는 인종(슬라브족, 흑인)을 4급 시민으로 규정해 계급제를 명문화했다. 이중 국가의회 참정권은 1급 시민에게만 주어졌다.

1952년에 SS대장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1952년 독일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 쿠데타는 히틀러의 권위에 큰 도전을 남겼다. 이때 알베르트 슈페어가 SS의 무장반란 진압의 총책을 맡게 되며 급격히 부상했다. 힘러는 북동 프랑스로 추방당해 부르군트 SS 기사단국을 세운다.

히틀러의 사망

1963년 1월 히틀러 암살미수를 거쳐, 1963년 10월 마침내 히틀러가 죽자 독일의 강력한 지도자들이 들어섰다.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바로 그들이었다. 장례식에서 애도의 뜻을 표명했던 네 지도자는 곧 대립했고, 게르마니아 투쟁에 들어갔다.

이 상황은 거의 준내전 수준으로 전개되어 행정이 마비, 국가판무관부들은 모두 비상 대책을 논의하며 자체적으로 행정을 관리했고, 폴란드에서 총독부가 무너졌으며 영국에서는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저항군이 일어났다. 다만 협력정부가 승리를 거두었다.

권력투쟁의 승자는 세력은 보어만에 비하여는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로부터 지명받아 정통성에서 우월했던 슈페어였으며, 1963년 12월 총통직을 선언하였다.

슈페어 정권 초기

잠깐의 권력투쟁으로 혼란스러운 독일은 일단 다시금 슈페어에 의해 그 조각을 맞추었다. 슈페어의 자문역에는 4인방(Gang of Four)이 존재했다. 이들은 독일 내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마르 시대 이후 처음으로 독일에 민주주의를 부활시키려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반체제 세력 내의 개량주의 파벌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4인방은 나치의 4명으로 구성되었다.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Kurt Georg Kiesinger),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 헤닝 폰 트레스코우(Henning von Tresckow)가 그 멤버였다. 이 그룹은 군수부 장관 시절부터 슈페어와는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고문 역할을 하며 내무장관, 외무장관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64년 2월 19일, 슈페어는 남아프리카 전쟁에서 독일령 식민정부들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1월부터 미국 측에 경고 성명을 내면서 실트를 공격하지 말라고 비난했으나 결국 국경을 넘자 군을 파견해 OFN과 대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독일원정군최고사령부의 창설로 이어졌으며 남아프리카 전쟁은 교착 상태로 빠졌다가 1965년 7월 정전이 이루어져 기존 국경으로 복귀를 미국과 합의했다.

슈페어는 집권 이후 독일의 자유화와 개혁을 추구했다. 재벌의 범죄 사실을 캐내고 부패한 정재계를 일신하는 한편 1965년부턴 히틀러 시기의 유산인 경직된 사회를 타파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자유화 조치를 취했고, 냉전적 대립의 완화를 위해 미국이나 일본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1964년, 슈페어는 팍트 회원국들을 재편하여 기존의 그로스라움 대신 세로운 관세동맹이자 한층 자율성이 보장된 촐페어아인 (ZOLLVEREIN)을 창설했으며, 고립적인 독일 경제권을 강화했다.

한편, 슈페어의 조치를 계기로 하여 4인방이 주도하는 개혁은 총통의 것을 넘어선 점점 급진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적당한 개혁 후 독재를 유지하려 했던 슈페어는 점차 큰 위협을 느끼며 그들을 견제, 게르마니아는 거대한 권력투쟁의 장이 되어갔다.

1960년대 동안 슈페어와 4인방은 표면적으로 협력이 유지되었고, 키징어가 부총통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점점 갈등은 수면 위로 올라왔으며, 히틀러의 유산과 독일의 민주화를 놓고 슈페어는 결코 NSDAP의 지도력 약화를 용인할수 없었지만, 4인방, 특히 슈미트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은밀히, 그리고 확실하게 당의 힘을 빼놓기 시작했다.

1968년, 한스 휘티히가 나머지 아프리카 국가판무관부를 침공한 뒤 부르군트 체제의 대아프리카 국가령을 선포하자, 독일 본국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팍트를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며, 아프리카의 아리아화를 이상으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

1970년에는 하인리히 힘러가 지도하던 부르군트 SS 기사단국이 내부 반란으로 인하여 멸망 및 붕괴하면서, 이곳을 차지하고 프랑크라이히 국가판무관부를 수립했다. 또한 SS는 완전하게 해체당했고, 국방군이 독일의 유일한 무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후 수십년간 이어질 SS 잔당의 유럽 전역에서의 테러의 근원이 된다. 이때 니더란데와 오스트란트를 국가판무관부 해체 후 독일 본토로 병합했고, 노예제를 폐지했다.

한편으로 슈페어 본인의 유산이었으면서도 이제는 비효율의 상징이 된 노예제를 1970년 폐지 후, 동년에 대부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출신인 노예들을 다시 송환키로 결정하면서 일이 터진다. 이때 석유 파동이 발생했기 때문. 이때 독일과 팍트의 경제가 파탄이 나며 송환을 바로 진행하기 어렵게 된다.

슈미트는 계속 송환 강행을, 키징어는 신중론을, 슈페어는 송환 중단을 각자 주장하며 갑론을박이 이뤄질 무렵, 일단 논의 도중엔 송환을 보류하는 결정에 이루어지자 분노한 노예들이 대거 봉기를 일으키는 한편, 이 대규모 소요 사태에 기존 현지 빨치산까지 대거 합류함에 따라엄청난 규모의 반란으로 확대, 유럽의 학대받는 민족들 최후의 불꽃 자유 유럽 군단(Armeeverband Freies Europa)이 결성된다.

이 대규모 반란으로 모스코비엔을 제외한 모든 기존 판무관부 및 괴뢰 정권이 붕괴하며, 덩달아 현지 독일군까지 섬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본토, 혹은 그나마 안정된 모스코비엔과 발트란트로 후퇴하면서 이는 곧 전면적인 독일 노예 반란으로 확대 되었다. 이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놀랍게도 독일인으로서 옛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민당 산하 준군사조직인 흑적금 국기단을 이끌며 반나치 활동을 이어가는 인물인 빌리 브란트였다.

슈페어 정권 후기 ~ 1987년

흑적금 국기단 및 그 파르티잔 동맹과의 긴장감 도는 협상 이후, 1971년 11월에 알베르트 슈페어가 폴크스할레에 의기양양하게 서서 반란 노예들과의 합의를 발표했다. 합의에 따르면 노예제 폐지는 그대로 관철될 것이며,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조속한 시일 내에 폐지되는 대신 노예들은 무기를 거두었다. 국기단 지도자인 브란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동반된 NSDAP 내의 혼재된 반응과 대조적으로 대중과 세계, 팍트, 졸페어라인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편 이때 슈페어를 밀어내며 개혁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진 4인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독일의 길게 이어진 권력투쟁에서 갑작스럽고도 전격적으로 슈페어에 의해 판이 뒤집힌 상황이었다고 세계의 관찰자들은 평했다.

물론 4인방은 뉘른베르크 인종법과 그 이외의 인종 정책을 폐기하도록 성공적으로 강요하여 1974년에 공식적으로 포기되었고, 동부 영토는 현지 부역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 정부들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산은 일부 차용되었을 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었다.

70년대 초 독일을 강타했던 권력투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슈페어는 석유파동의 파장을 해결하며, 반란을 총통의 정치력으로 억누른 뒤에 한때의 정치적 동지들을 한직으로 밀어내며 영향력를 완전히 억제한 뒤 더욱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나치 체제를 만들어냈다.

1976년에 벌어진 제2차 서러시아 전쟁은 독일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소련, 러시아의 붕괴와 군벌시대의 고조 동안 세계 무대에서 잊혀졌던 러시아는 다시금 그 힘을 회복하며 독일에게 잃어버림 것들을 요구했고, 갈등은 1971년 소련의 시베리아 재통일 이후 1976년에 구체화되었다. 국경을 넘어 팍트를 침공하고, 영토수복을 위해 다가오는 러시아 군대가 1955년의 반란 이후 20년만에 다시 독일을 덮쳤다.


1981년 슈페어가 세상을 떠난 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

상징

국기


하켄크로이츠기
Hakenkreuz

대게르만국 국기는 1935년 제정된 하켄크로이츠다. 갈고리 문양이 왼쪽에 치우친 것이 국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나치당기이다.

국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헌법에서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원래 독일의 노래를 쓰다가 1939년 2차 대전 발발 이후로 점차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우선되고, 1948년 헌법에서 아예 정식 국가로 못 박았다.

국장

정치

총통


대게르만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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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은 대게르만국 헌법에 따라 대게르만국의 국가원수이며 유일한 지도자이다. 이러한 무적과도 같은 총통의 권위는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에 의하여 처음 창시되었다. 현임 총통은 알렉산더 가울란트이지만, 그가 83세로 고령이며 실권은 수상이자 강력한 국가사회주의자인 비요른 회케에게로 넘어갔다.

부총통

국가수상

국가의회


대게르만국 국가의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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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872석
재적 872석

국민대회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사회

민족

독일인을 구성하는 주요 인종은 당연히 게르만계, 그중에서도 본래 독일령에 살아왔던 순혈 게르만계라고 할수 있다.

인구 중 오스트리아계를 포함한 순혈 게르만계의 비중은 70% 정도이며 데너마크계, 체코계 등 준게르만계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 대게르만국 시기에 절멸에서 면제되었던 우크라이네계, 벨로루시계, 발트계 등 슬라브 계열 민족들도 인구의 12% 가량을 차지한다. 슬라브계 민족의 주류는 대체로 폴란드계이다.

당시 대게르만국은 우크라이네에서 30% 제외 절멸, 벨로루시에서 25% 제외 절멸, 발트지역에서 50% 제외 절멸(이후 발트 지역은 전면 동화로 방침 변경)이라는 내부 결정 하에 슬라브족 처분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슬라브 혈통의 국민들은 당시 나치로부터 체력, 지능, 금발 등 여러 기준에 따른 심사를 통과해 "명예 아리아인" 지위를 부여받고 학살을 면한 이들의 후손이다.

언어

독일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독일어는 지역마다 방언이 나누어져 있지만, 전반적으로 표준 독일어가 많이 사용된다. 체코어와 데너마크어가 지역어로 있지만 사어가 되었다. 슬라브계 국민들 역시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한지 오래.

독일어는 일본어가 아시아권에서 통용되고, 영어가 영미권에서 통용되듯 유럽권에서 매우 지배적인 지위를 가진 언어이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 정상회담은 독일어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이다.

과학

독일은 과학을 빼놓고는 이야기할수가 없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과학수준, 특히 물리학에 있어서 독일 물리학의 위상은 세계 어느 나라도 범접하기 어렵다. 나치 시대부터 이어진 과학자 지식인의 철저한 국가 차원의 관리로 이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펼쳤고 핵무기도 독일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독일어는 연구와 학술의 언어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과학기술이 뛰어나고 세계구급 기초과학 수준을 가졌다는 일본조차도 독일에 비해 노벨상 수상자 수가 크게 밀릴 지경이니 이야기는 다한 지경이다. 다만 나치 집권으로 인해서 일부가 미국으로 두뇌유출이 있기는 했었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렇기 때문에 사실 현재는 딱히 미국에 비해 과학기술이 우수하다고 여기기도 어렵기는 하다.

생활

독일인들의 윤택한 생활을 위한 피지배 인종들의 가혹한 노동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취급이 나은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착취를 당해 생활수준이 급락하였으며 독일 식민지의 핵심인 동부의 러시아 지역은 그야말로 노예제까지 등장한 지옥도였다. 자원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일로 항시 들어왔다. 이 거대한 아인하이츠팍트의 착취경제 구조란 일본의 공영권은 도저히 따라할수조차 없는 그러한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그 운터멘쉬들의 피로 이뤄진 대게르만국의 생활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고, 현대 독일과 비교해서 보면 당시 환율기준 오늘날 독일의 2배 정도 높은 소득을 기록했다. 자가용, 컬러TV 모두 1950년대 초반에 대중화됐다. 히틀러는 "지배인종"인 아리아인은 충분한 안락을 느낄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는 1947년 대게르만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보험 제도 및 사회보장 제도를 시행한 것에서 드러났다. 말그대로 대게르만국의 이념은 국가"사회주의"였다.

이 사회보장 제도는 매우 선구적이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됐으며 무려 일을 하지 않고도 매월 수십만 라이히스마르크를 국가에서 지급되는 무기한 지원금으로 백수로 살수 있었고, 최저임금이라는 제도를 반드시 시행토록 하고 4대보험을 이때 이미 의무화하는 등 노동현장 복지에도 최선을 다했다. 특히 군수공장의 봉급은 매우 높아 월급만으로 일반 직장이나 공무원의 반년치 연봉에 해당했다. 이 복지는 비단 독일인(즉 1933년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국적자들)뿐 아니라 "아리아인"으로 간주된 오스트리아계와 덴마크, 네덜란드 등 모든 게르만계 국가에 적용된다.[4]

실업자가 없게 하도록 히틀러는 국가자본주의를 전격 시행하여 재벌들을 국가가 나서서 키우도록 명령하였으며 또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국영 군수공장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독일에서는 본인이 취업을 원할 경우 장애인이 아닌 이상에는 안될 수가 없었고 급은 다를지언정 완전고용을 달성한다.

하지만 폐해도 생기기 시작했다. 실업은 안하게 됐지만, 히틀러가 너무 오냐오냐하며 아리아인이란 이유만으로 퍼다주니 청년들이 일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즉 청년들은 "타의적 실업"이 아닌 "자의적 실업" 상태에 빠져 집에서 놀고먹으며 지원금을 다쓰면서 아시아 여행을 다니는 등 상당수가 니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 핵심인 고출산 유지의 발목을 잡아 출산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미 1950년대에 은둔청년 문제가 터진 선구적인(?) 제국으로 등극했다.

슈페어 집권 후 니트 문제가 크게 부상하자, 슈페어는 실업급여 지급 조건을 적어도 3년간은 연속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꾸어 한번도 일하지 않은 자는 받을수 없게 하고, 그 액수도 크게 줄였으며 일하지 않는 니트 청년들이 라이히를 좀먹는다는 당 차원의 프로파간다를 시행해서 전부 일자리로 보내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부터 부르군트와의 전쟁 등으로 서서히 흔들렸다가 노예제 폐지 및 1970년 석유파동이 터지자 이전만한 부는 못 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독일인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민족에 속했고, 80년대까지 유지된 착취경제에 따라서 영화를 누렸다. 슈페어의 개혁이란 것도 니트 짓만 금지한 것뿐이지 국민 복지는 그대로였으며 이를 위한 식민지 착취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도 독일의 경제적 생활 수준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군사

국방군(Wehrmacht)을 운영하고, 육군(Heer), 공군(Luftwaffe), 전쟁해군(Kriegsmarine)로 이루어졌다. 병역제는 징병제로서 징병은 순수 독일인을 상대로만 진행된다. 대게르만국의 징병법은 매우 엄격하기에 성인 남성을 강대로 한 현역 판정률은 97%에 달한다.

육군, 즉 헤어는 세계 최대의 육군으로서 군림한다. 루프트바페의 강함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흔히 하는 오해로서 이 시기 독일의 해군력이 약했다는 것인데, 히틀러는 전쟁이 끝난 뒤 핵무기 제공의 대가로 일본에게서 넘겨받은 건함기술과 정보자산을 통해 크릭스마리네를 강화하여서 독일의 해군력은 당시 엄연히 일본과 미국을 이은 세계 3위에 위치하며 유럽-아프리카를 전부 압제하는게 가능하고 이탈리아 해군을 어린애처럼 제압할수 있는 수준의 해군력을 구축했다. 루프트바페 역시 "하늘의 패자"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여 독일 공군에 맞설 자는 미 공군밖에 없다.


무장친위대 (SS)

경제

명목 기준 경제력 순위
순위 국가 GDP
1 미합중국 22,571,373
2 대일본제국 19,422,821
3 대게르만국 15,330,750
4 중화민국 8,562,599
5 이탈리아 제국 6,738,954
6 자유 인도 5,127,011
7 영국 3,173,451
8 광동국 3,060,374
9 대만주제국 2,841,278
10 이베리아 연방 2,362,981
11 브라질 2,343,439
12 캐나다 2,214,796
13 멕시코 2,041,628
14 프랑스국 1,913,316
15 호주 공화국 1,802,006
16 터키 1,647,149
17 인도네시아 1,402,590
18 타이 공화국 1,163,619
19 루슬란트 연방공화국 1,134,553
20 사우디아라비아 1,100,706
21 스위스 942,265
22 러시아 국민국 858,716

세계 GDP 순위 3위, 외환보유액 2위, 수출 3위 등의 기염을 자랑하는 경제대국이다. 1억 8천만이라는 상당한 인구를 가져 내수시장의 규모가 크고, 경제 기반은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올린 탄탄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무역의존도도 그리 높지 읺은 편이기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 기준 약 46000달러 가량으로, 선진국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일의 문제는 지역별, 계층별 빈부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독일의 소득 수준은 서부에서 동부로 갈수록 낮아지는 형국을 취하며 니더란데를 비롯한 베저룩스 지뱡과 구 바이마르 시절 독일 본토까지는 매우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떨어지기 시작한다.

동부의 생활 수준은 그곳 너머 러시아보다 크게 나을것 없고 서유럽보다 낮다. 반면 게르마니아 및 독일 구본토 지역은 알짜배기 땅으로서 일본 도쿄(약 85000달러) 정도의 소득을 자랑한다. 이렇듯 큰 소득 편차는 독일 내에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행정구역

민족

독일인

명예 아리아인

슬라브인

흑인

외교

독미관계

기본적으로 독일과 미국은 2차 대전 때 적대했던 관계기 때문에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군은 태평양 못지않게 북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군인이 갈려나갔고 결정적으로 일본과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던 찰나에 하와이에 핵을 떨궈 전쟁의 패배를 상징시킨 독일을 적대하며 독일은 독일대로 "인종적 혼합"의 산물인 미국을 우생학적 관점에서 더럽다고 멸시한다.

독일의 1940년대 이후 반미 프로파간다의 내용은 일본이 잔학성과 제국주의를 강조한 것과 다르게 미국 그 자체에 대한 비방이 주를 이루었다.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따라서 미국의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계 인구로 인해 순혈 게르만 민족의 피를 수호하는 독일에 비해 치안이 불안하고 국민성이 미개하며 미국에 사는 백인도 유색인종에게 감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유대자본이 미국을 지배한다는 선동도 많았다.

다만 서로간의 반목은 일본에 대한 것보다는 약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은 기본적으로 같은 인종이라 조금은 관대한게 있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물론 나치 사상이 더욱 강경했지만 미국 내에도 반동양적 사고는 만연했고, 일본은 미국과 인종적 논리로 내세우며 처절하게 싸운 반면 독일과 미국은 이권을 두고 치고받았기에 적대감의 무게가 달랐다. 독일도 일본 견제를 위해서는 미국과 기꺼이 협력할 용의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좋은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독일관계

일본과 관계는 기본적으로 그다지 안 좋다. 과거에 일본이 프로이센을 모방해서 근대화를 한 뒤로 접점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1895년 일청전쟁 직후에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을 반대하는 삼국간섭을 사실상 러시아, 프랑스와 함께 주도했고 이후 영일동맹에 의해 영국과 관계는 나쁘던 독일은 아예 일본과 준 적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을 공격해 전쟁까지 벌이는 사이가 되어 남양군도, 칭다오 등을 따내고 승전국으로서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이때만 해도 독일과 일본은 1차대전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로서 껄끄러운 사이였으며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도 1938년 전까지는 장제스 정권을 지원할 만큼 일본과는 비우호국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같은 해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점점 두 나라는 국재사회에서 고립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 나름의 동병상련이랄 것을 느낀 양국간에 1936년 방공협정이 맺어지면서 일본과 독일은 일단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서로의 감정을 접어두기로 한다. 그러다가 1937년 지나사변 발발,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등이 이어지자 마침내 1940년에 일 - 독 - 이 삼국동맹조약이 정식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위한 임시적 동맹에 가까웠다. 일단 작전반경을 분할한 뒤 앙국의 동맹은 전반적으로 손발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히틀러는 1944년 자신의 유럽에서 입지가 확고해지자 일본을 배신하려고 하기도 하였다. 고작해야 태평양엔 이오지마 전투에 유보트를 조금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오지마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핵까지 개발이 되자 그제서야 일본의 승리에 적극적으로 변했으며 하와이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애초부터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양국은 곧 다시 돌아갔다. 동맹은 삐걱거렸고 1950년 삼국동맹조약이 연장되긴 했으나 독일의 전리품 독식과 일본의 뉘른베르크 인종법 불복 문제로 인하여 독일 측과 관계가 나빠졌다. 이는 마침내 1953년 리야드 회의 이후 일본의 동맹탈퇴와 이후 전면적인 3국 냉전 구도의 돌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냉전 시대 동안 양국은 적대적 관계로 변모하였고, 특히 독일 내에서 혐일적 정서가 확산되었고 이에 질세라 일본에서도 독일인을 서구의 일원으로 격하시키며 험악한 관계가 되었다. 이후 히틀러의 건강이 악화되었던 암살 미수 사건 당시의 범인이 일본 제국 소속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1963년 독일 내전 당시 일본은 슈페어를 은밀히 지지했는데 이때 이후 일본과 독일 간에 관계 개선이 시작됐고 양국간 히틀러 시기의 적대적 기조는 어느정도 청산되었다. 거기에 히틀러 암살 미수의 배후가 일본이 아닌 부르군트로 밝혀졌으므로[6] 나름 관계는 정상화될수 있었다. 그럼에도 결코 우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슈페어 하 4인방 중 가장 강하던 헬무트 슈미트는 혐일적이었다.

  1. 국가판무관부 제외
  2. 1948년 제정된 제국 헌법은 오로지 독일어만이 유일한 공용어임을 규정하고 있다.
  3. 당시 독일인은 수데텐란트에 90%, 체코슬로바키아 전체에 20%를 차지했다.
  4. 다만 말은 전부 아리아인으로 묶었어도 본토 독일인에 비해 돌아가는 몫이 상대적으로 적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