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화약

조선의 연호
광무
光武
1844년 9월 10일 ~ 1861년 12월 31일
광무 1년 9월 10일 ~ 광무 18년 12월 31일
함평
咸平
1862년 1월 1일 ~ 1888년 12월 31일
함평 1년 1월 1일 ~ 함평 27년 12월 31일
숭녕
崇寧
1889년 1월 1일 ~ 1921년 12월 31일
숭녕 1년 1월 1일 ~ 숭녕 33년 12월 31일
방갈랄 · 榜葛剌
대한 · 大韓
동래화약
東萊和約
Convention of Dongrae · Convention de Dongrae
1875년 11월 24일 · 함평 14년 11월 24일
영길리 · 英吉利
불란서 · 佛蘭西
동래화약
東萊和約
1875년 11월 24일 · 함평 14년 11월 24일
대한 · 大韓
방갈랄 · 榜葛剌
영길리 · 英吉利
불란서 · 佛蘭西
1. 개요
방갈랄왕은 막와이 황제를 위시하여 덕리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도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영길리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길리는 인도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미리견, 불란서, 오지리, 이태리에게 각지 식민지를 약속하며 연합을 꾀했다. 동인도 회사의 용병들이 방갈랄 일대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5개국 연합은 연합함대와 지상군을 파견하고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천이 함락되고 한성역까지 점령되자 조정은 흥화영, 장용영, 충헌영의 3만 장병을 각지에 집결시키고 근왕병을 소집했다.
경군의 저항이 격렬해 한성 공략에 진척이 없자 연합군은 평양으로 진군하여 흥화병영을 점거했고, 삼화포을 장악해 물자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내 근왕병과 충헌영이 남쪽에서, 장용영이 북쪽에서, 경군이 동쪽에서 공격하자 크게 패하였다. 남은 병력의 일부는 삼화포로, 일부는 제물포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이후 황해 해전으로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고 회항하면서 모든 연합군이 항복하였다. 이후 한국, 영길리, 불란서, 막와이(방갈랄) 사이에 동래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