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천자

동양천자 세계관

동양천자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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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검은 먹물로 그려진 역사는 지울 수 있어도, 붉은 피로 쓴 역사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성조 세황제 이하전-

동양천자 세계관은 조선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뒤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와 문화를 유지한 채 서양과 대등한 동양의 열강으로 거듭나게 되는 대체역사이다.

주요 사건

밀양 음모 사건

견내량-한산도 해전(견산해전)

현해탄 대첩

대마도 정복

병오옥사

무신정위

구주 출정

기유약조

동래 양관 설치(양관 최초 설치)

신해변통

봉산옥사

계축옥사

사르후 전투

가도 정벌

신유옥사

임술정위

삼파변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인군란

기묘숙군

을유역변

갑오정위

심양 정벌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

임오정위

병신군란

상세

분기점이 되는 주요 사건들만 기재했다.

정유재란

1597년, 이순신과 조정을 이간질하기 위한 고시니 유키나가의 계략이 가덕왜성 전투 과정에서 억류된 요시라에 의해 허무하게 탄로나면서,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갈 일이 없어졌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촉에 일본군은 무리하게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고, 이순신은 견내량 해전, 부산포 해전(견산해전)에서 연달아 대승을 거두며 일본군을 몰아넣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수군이 궤멸된 일본군은 처절하게 뗏목까지 만들어 가며 열도로 도망치려 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 명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미처 배에 타지 못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작에 생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효수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고언백과 항왜에 의해 사살되어 역시 효수되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도망치던 일본군들은 이순신이 대마도로 가는 길목을 틀어막고 전 수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펼친 현해탄 대첩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물고기 밥이 되었고, 우키다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수많은 일본의 쟁쟁한 무장들이 단 한 번의 전투로 바다에 잠겨 그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모두가 쾌재를 불렀으며 곧 자신감에 찬 황신의 대마도 정벌 상소도 일사천리로 받아들여져 이순신은 대마도에 상륙, 아예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합병하고 수많은 대마도의 왜인들을 포로로 데리고 개선하였다.

병오옥사

1598년 대마도 정복을 끝으로 6년에 걸친 왜란은 막을 내렸으며, 조정은 1599년 이순신, 권율, 원균을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을 선무공신으로 책봉하고, 1600년 이항복 등 선무공신보다 많은 호종한 신하들을 호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전후 이순신의 위상은 막강하여 그 잠재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 정인홍을 능가하였다. 한편 앞선 1599년 서인과 남인을 밀어내고 집권한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화하였고, 이순신은 부하 공신들에게도 당부하며 항상 정치와 거리를 두고 절제하니, 날이 갈수록 무당파 대신들의 지지까지 얻어가며 점점 인망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1606년 새로 들인 인목왕후가 출산 도중 난산으로 출산 중이던 대군과 함께 사망했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선종은 점차 편집증이 심해져 막나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유영경, 원균을 사주, 역모 사건을 만들어내어 이순신, 정인홍, 곽재우를 투옥시키더니 그들의 주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국문하기 시작했다.

무신정위

선종의 갑작스럽게 옥사를 일으키자 이원익 등 대신들이 만류하자 이원익을 포함한 대신들까지 투옥 및 국문시키는 지경으로 확대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 관료들이 한목소리로 옥사를 확대시키는 것을 반대했으나 선종은 이들조차 국문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신료들이 옥사했다. 그러나 결국 정인홍이 옥사하고, 이에 유영경까지도 우려하기 시작하자 선종은 뒤늦게 이순신, 이원익 등을 석방시켰고, 얼마 뒤 부덕한 신하들을 제 때 판별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지고 선위하겠다는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순신은 옥사 과정에서 자신을 보러 올라오던 노모가 죽고, 삼남 이면까지 옥사하며 이에 대해 원망이 깊었고, 결국 궁궐 수비대와 상당수의 관료들을 포섭하여 선위를 곧바로 받아들이고 진짜로 세자 광해군에게 선위시키고 군사를 동원해 선종를 유폐시켰다. 그리고 양종은 즉위 교서에서 "부왕께서 도를 잃어 사직을 감당치 못하고 부덕한 내게 선위하셨으니 경들의 도움을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달뒤 선종은 유폐된 상태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구주 출정-기유약조

1607년 양종이 즉위하고, 유영경과 원균은 사사되었으며, 선무공신을 위주로 한 이순신 중심의 무관들과 무당파 대신들이 다시 한 번 호국공신에 책봉되었고, 호국공신들은 호성공신을 개정하여 일부 대신을 제외한 대다수의 호성공신 명단을 삭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사상 최초로 무관이 중심이 되고 문관이 참여하는 형태의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608년에 대동법을 최초 실시하고, 체찰부를 설치한 뒤 체찰부(도체찰사-부체찰사-각 도 체찰사-각 도 휘하 순변사/양계 방호사-휘하 양계 갑사)를 설치하여 군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이 과정에서 현지 장수들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오군영의 대장들도 모두 순수 무관으로 뽑혔다. 또한 비변사는 이때부터 최고 기구가 되었으며, 체찰부 고위 장수들까지도 당하관 자격으로 참여가 가능해졌다. 이순신은 초대 도체찰사 겸병조판서 및 비변사 제조라는 직위로 사실상 왕 다음가는 권력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에도 막부는 조선에게 다시 대마도를 반환해줄 것과 무역을 허락해줄 것을 청했는데, 이에 조정은 대마도 반환은 원천 거부하고 무역 재개는 선정릉 도굴의 범인들,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전원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에도 막부가 이를 거부했고, 이에 분노한 이순신과 조정은 양종에게 청하여 구주를 정벌하기로 결정,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순신의 강력한 의지로 관철되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까지 겸한 채 구주로 출정한다. 일기도를 손쉽게 점령한 이순신은 사세보에 상륙했고, 곧이어 나가사키를 공격해 점령, 후쿠오카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후쿠오카 및 기타큐슈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에 어쩔 도리가 없던 에도 막부는 조선에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조선에 상당한 자원과 물자를 보내는 대가로 무역을 재개하는 기유약조에 동의했고, 이 덕에 조선의 재정이 충원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해변통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된 이후 이순신의 위상은 더욱 더 강화되었고, 이 시점에 이미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전쟁공신 세력은 왕권과 문관(북인-무당파 중심)들까지 넘어서게 되었다. 1610년에는 포르투갈 상인 주앙 호드리게스가 일본에서 추방되자 조선으로 건너왔고, 조정에서는 서양과의 교류로 군사 부문에서 도움이 될 거라 판단, 조포수교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동래에 최초의 양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1611년에는 신해변통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는데, 우선 과거제를 개혁해 문과와 잡과를 통합하고, 무관들도 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해 무훈관이 설치, 그리고 영장 전담제로 수령을 지방 속오군에서 배제하고 현지 하급 무관인 영장들을 충원해 상시 정기적 훈련을 실시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 행정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양전을 실시하고 확보한 토지와 정전법을 실시, 지주들의 소작인 수와 토지 수에 상한선을 두고 초과치를 모조리 몰수하여 자영농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얻은 토지를 자영농들에게 분배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화폐 유통을 위해 중인들이 주로 임명되는 대금청을 설치해 환전소 겸 은행을 전국에 설치하여 화폐 유통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마련했고, 요역청을 설치해 죄수, 노비들을 주로 동원하는 방식으로 군역과 요역을 분리하고 이순신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김신국이 참여하여 충무진법을 완성, 정기적인 진법 훈련 체계가 부활하였다. 이 일련의 개혁들로 국력도 크게 회복되었고, 민심의 지지까지 받게 되면서 정권이 더욱 공고해진다.

봉산옥사

신해변통은 상당히 급진적인 개혁이었고, 이에 양반 지주들과 사대부들은 기존부터 쌓아오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러던 와중 옥사 거리도 아닌 걸로 봉산옥사가 터져나왔고, 양종은 이 때 이이첨과 대북 등 친위 세력인 북인들을 사주하여 전쟁공신 세력을 엮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는 내부 고변과 함께 이미 정보망을 확고히 구축해놓은 무관 정권에게 새어들어갔고 이로 인해 양종은 공신들의 압력으로 이이첨을 사사시키고 공신들을 달래야 했다. 이로 인해 왕권을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후 양종은 정사에 뜻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렵 정보기관 및 첩보 부대인 체탐위, 정예 기병대 용마위가 창설되었고, 일본에서 항왜위라는 이름으로 용병을 꾸리며 삼위 체제가 정립, 체탐위는 수도에, 용마위는 북방에, 항왜위는 남방에 배치되어 상비 특수부대들로 육성했다.

사르후 전투

1612~1617년까지 5년 간 전쟁공신 세력들은 대동법을 호서, 호남까지 확대시켰고, 북방에서 여진족이 심상치 않자 용마위를 계속 증강시켰다. 이러던 와중 김신국이 상품세의 영감을 받아 이를 주청했고, 백성의 짐이 과중될 것이라는 반대 여론도 있었지만 시범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주세, 담배세, 인지세, 무명세, 인삼세로 5대 상품세를 부과하게 되었는데, 이는 재정에 크고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을 의식하여 얼마 안가 철회시켰다. 이후 상품세는 재정 충당의 목적으로 잠시 시행되는 관례가 생긴다. 그리고 이 시기 신해변통 때의 제한적 토지 개혁에도 다시 소작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고받은 조정은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호포법을 실시해내어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또한 무관들의 후속 엘리트 무관들을 양성하기 위해 호국관을,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문무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618년에 명의 파병 요청이 있자, 양종의 중립외교 정책을 대다수의 무관들이 찬성했고, 일부 무관과 대다수의 문관들은 파병하는게 옳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르후 전투에는 우선 파병하기로 결정되었고, 황진을 도원수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이외에도 강홍립, 김응하 등으로 구성된 파병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명군의 실책으로 전세가 기울게 되자, 황진은 항전하다가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질서있게 후퇴한 뒤 추격해오는 청군을 용마위의 기습 기동으로 격퇴시키고 전력을 거의 보존한 채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이순신과 양종 모두 비호하면서 황진은 반대로 승진되었고, 이후의 추가 파병은 무산되게 된다.

가도 정벌-신유옥사-임술정위

1622년 모문룡이 넘어오자 양종은 그를 가도에 주둔하게끔 하였으나, 모문룡이 식량을 멋대로 징발하고 약탈하는 패악질이 심해지자, 이순신은 직접 군을 이끌고 가도를 토벌하여 모문룡의 군사들을 전멸시키고, 모문룡을 명나라로 압송시켜버렸다. 이는 상국의 군사를 공격한 것이라는 논란으로 파장이 일었고, 명나라가 불쾌감을 드러내자 파장은 더욱 심해졌다. 이를 계기로 무관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나자 양종은 이런 여론을 이용해 신유옥사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호국공신들 상당수가 공신 작위를 박탈당하고 대거 옥사했는데, 결국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관 중심의 호국공신들의 시선은 이순신을 향했다. 이순신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가도 정벌군으로 그대로 궁궐을 점령해 임술정위를 일으켰고, 양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인성군을 즉위시키니, 민종이다.

삼파변란

1622년 민종을 즉위시킨 이순신은 이듬해 1623년 사망했다. 그동안의 구심점이었던 이순신이 죽자 그의 후계자(후임 도체찰사)로는 우선 이순신의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던 이운룡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압도적인 권위와 권력을 지녔던 이순신이 사라지자 억제기가 풀린 문관들은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가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다시 서인, 남인, 북인으로 재분화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문무융화의 영향으로 문관들 또한 무관직을 겸직해왔었기에 이들 역시 각 붕당으로 나뉘었고, 이는 곧 각 붕당이 무관직 겸직이라는 사병을 거느리고 대치하는 상황과 같았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과 혼란에 극심한 부담감을 느낀 민종은 1625년 상왕 양종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고, 곧 서인, 남인, 북인 구분 없이 양종파와 민종파, 그리고 능양군파로 나뉘며 세 파벌끼리 극한의 갈등 끝에 양종파가 선위를 찬동하며 정위를 시도, 이를 민종파가 저지하려 하며 신하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촌극이 벌어진다. 그리고 국왕 민종은 여기서 어쩔 줄 몰라하며 중재하지 못했다. 이에 뒤에서 지켜보던 능양군파는 행동을 개시, 마침 포섭해둔 용마위를 움직여 궁궐을 점령, 광종파와 민종파를 강제 해산으로 와해시키고, 상왕 양종과 민종을 협박한 끝에 1626년 능양군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니 인조이다.

정묘호란

1626년 새로 즉위한 인조는 기존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으로 선회하였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갔으나, 체탐위는 이를 미리 알아챘고, 조선은 쳐들어온 적군을 의도적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놔둔다. 그리고 지난 날 호국공신 정권 때 개발된 장거리 직사포인 진화포와 여진족까지 소속되어있는 용마위, 왜인이 대거 소속된 천보총 부대까지 진군하던 후금군은 이들의 기습 공격에 전멸해버리며 허무하게 패배하였고, 조선은 이 승리에 깊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금군의 제대로 된 전력이 아니었고, 곧 이 방심이 큰 화를 부르게 된다.

병자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 때까지 조정은 나름대로 방어선을 계속해서 보강하고 파천 장소로 강화도를 점찍어 판옥선들을 배치했다. 9년 내내 철저하게 준비한 결과 그 어떤 적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조선은 자신하고 있었는데, 1636년 후금에서 국호를 바꾼 청나라는 홍타이지가 친정하는 한편 팔기군의 주력을 모조리 들고 왔고, 이에 조선군의 북방 방어선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용마위가 팔기군과의 전투에서 전멸하고, 용마위의 전멸을 시작으로 조선은 연전연패하다가 결국 자신있게 옛 고려 현종처럼 수도를 지키려던 인조는 다급히 파천을 시도했으나 결국 수도 한성이 포위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조가 농성을 시작하자 청군도 슬슬 급해졌다. 조선군을 뚫어내는 과정에서 청군 역시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보급도 떨어져가던 참이었기에 청군은 조청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고 조선의 세자와 후금의 세자를 각각 인질로 보내자고 제안했고, 이에 인조는 고심하다가 이를 수락하니, 겨우 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다.

무인군란

전쟁이 끝났으나 이로 인해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워낙에 막심해서 북방 방어선의 경우 완전히 와해되었고, 용마위는 전멸하여 해체되었으며, 항왜위도 절반 가까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겨우 회복 중이던 국토가 다시 황폐해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와중 조정과 체찰부가 군에 식량을 보급하는 것도 힘들어지자 상당수의 병졸들이 밥도 못 먹고 쫄쫄 굶기 시작했는데, 조정이 사안이 더 심각한 지방과 민생 구휼을 우선으로 삼으며 이들이 아사할 판이 되자, 결국 중앙군이 쌀을 달라며 최초의 군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일시적으로 궁궐을 점령해 인조와 대신들은 인질로 잡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자연스럽게 군란에 합류하는 병졸로 위장한 김육, 최명길 등 대신들의 밀서를 전달받은 진압군이 순식간에 이를 진압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기묘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