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전쟁 발발 직전, 양국 전력 비교

해당 문서는 동중전쟁(東中戰爭) 이전 동아제국(東亞帝國)과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의 전력을 비교하는 문서다.

전력 비교

전쟁 이전 동아제국의 상황

당시 동아제국(東亞帝國)은 중화민국 연합정부와의 전쟁 외에도 대소련(對蘇聯), 대미(對美), 대영(對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었다. 또한 동아제국은 1936년 6월, 「제국국방방침(帝國國防方針)」, 「국방소요전력(國防所要戰力)」, 「용병강령(用兵綱領)」을 개정하였으며 이를 통해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여 작전 초기의 위력을 강력하게 발휘할 것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만약 동아제국을 중국을 비롯하여 미합중국(美合衆國)과 소련(蘇聯)과 추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동아제국이 갖추고 있는 국력만으로는 장기전을 이끌어가지 못할 것이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에 동아제국 군부(東亞帝國軍府)는 강대국들과의 장기전 수행을 위해 1936년 8월, 「국방대강(國防大綱)」을 제정하여 국방준비의 확충을 우선순위로 두고 군사공업투자를 대량으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1938년 동아제국의 군사공업투자는 22.3억 위안(分)으로 1936년에 비해 대략 2.7배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공업생산 총 투자액의 65.8%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동아제국의 공업생산은 평균 성장률 10.7%로 급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1938년에는 동아제국의 공업 총생산액이 65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동아제국 총 국민경제의 대략 75%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공업생산의 투자로 당시 동아제국의 무기 및 장비 연간 생산 능력은 항공기 1,600여 대를 비롯하여 대구경화포 780문, 전차 350대, 차량 9,700대 수준이었으며, 조선(造船) 능력은 5만 3천 여 톤이었다. 그리고 보병 개인화기와 소구경화포 등의 생산능력은 대규모 전쟁 시의 필요한 수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한 동아제국은 대규모의 군사공업투자와 군비를 동시에 증가시켰다. 1938년도 동아제국 육군 예산은 7억 8천만 위안, 해군은 7억 1천만 위안으로 동아제국 정부 전체예산의 50%에 달하였다. 이러한 동아제국의 군사 공업의 발전과 대량의 군비 투자는 동아제국 군사력의 질적·양적 수준의 발전으르 아주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또한 동아제국을 구성하는 구성국들과 식민지를 비롯한 해외 무역 경로를 통해 상당한 양의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전쟁 이전 중화민국의 상황

한편, 중국은 당시 4억 2,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와 900만 ㎢에 달하는 엄청난 국토 면적을 소유하여 동아제국보다 인구 및 영토 면에서 몇 배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중국의 자원은 대부분 개발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개발된 지역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산업은 수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어 1938년 공업생산은 외자 기업 생산량을 포함하여 중국 경제의 10% 안팎에 불과했고, 공업 총생산량은 13.5억 달러에 불과했다.

중국의 무기 생산능력은 겨우 보병의 개인화기 및 중화기, 소구경 정도의 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전차와 차량 등의 생산능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함정과 항공기는 일부 소량 생산할 수 있었으나, 부품은 대부분 외국 수입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였지만 산업 시설이 극도로 미비하였고, 특히 군수산업부문에서 경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부분 이외에 비행기, 전차, 화포, 차량 등은 완전히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다. 동중전쟁(東中戰爭) 직전 중국과 동아제국의 국력은 개량적으로 비교하면, 국토와 인구 면에서만 중국이 동아제국을 앞설 뿐 공업능력이나 주요 무기 생산수준에서는 중국이 크게 뒤떨어졌다.

전쟁 직전 동아제국군의 군사력

전쟁 직전, 동아제국 육군은 19개 상비사단[1], 4개 혼성여단, 4개 기병여단, 5개 포병여단, 3개 전차연대 등 총 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속별로는 동북관군(東北關軍), 한국군(韓國軍), 만주군(滿洲軍)을 비롯해 타이완-류큐 주둔군(台灣-琉球駐屯軍)까지 구분되어 있었다 동원능력 면에서는 동아제국은 징병제를 실시하여, 총동원 가능한 병력은 현역병을 포함해 497만여 명이었고, 실제 전투가용병력은 이 중 제1보충역과 제2보충역을 제외한 190여만 명 정도였다.

동아제국 해군은 주력함(主力艦) 9척(27.2만 톤), 항공모함(航空母艦) 4척(6.9만 톤), 순양함(巡洋艦) 33척(21.5만 톤), 구축함(驅逐艦) 102척(12.6만 톤)을 포함하여 총 280여 척으로, 배수량은 116만 톤이었다. 이 외에 건조중이었던 주력함 및 항공모함 4척, 순양함 4척, 구축함 12척 등이 있었다. 이러한 해군력은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였다. 이 중 중국 방면을 담당한 것은 제4함대였다. 제4함대는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당시에 조직되어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중국 연해와 장강 유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예하에 제12전대, 제14전대, 제21수뢰전대 및 상하이 해병상륙대가 있었다.

동아제국은 공군이 별도의 군종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항공부대들은 육군과 해군 예하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항공 병력은 육군과 해군을 합한 총 1,6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직전 중화민국의 군사력

한편, 중국 육군은 총 170개 사단(師團), 45개의 독립여단(獨立旅團), 기병 6개 사단(師團) 및 6개의 독립기병여단(獨立騎兵旅團), 포병 4개 사단(師團) 및 20여 개의 독립단(獨立團)과 특수 병종 부대로 구성되어 총 병력은 200여만 명이었다. 그러나 지방군은 명목상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 부대의 지휘 권한은 지방의 실력자 혹은 군벌들에게 있었고, 이들 부대들은 개편된 국민당군(國民黨軍)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동원 제도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합한 형태였으나 징병제는 시작되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특히 군대의 군수보급과 인원보충 등의 각 방면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 해군은 총 5개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해군부 직할의 제1함대(총 12척, 배수량 1만 7천 톤), 제2함대(총 19척, 배수량 1만 톤), 연습(練習)함대(총 2척, 배수량 4천 톤), 순방함(총 14척, 4천 톤)을 포함하여 전체 직속해군함대 배수량은 대략 4만 여톤이었다. 제3함대는 총 14척의 함정으로 배수량은 1만 4,700톤 이었으며, 제4함대(광동강방, 廣東江防)은 총 24척으로 배수량 8천 톤이었다. 그 밖에 전뢰학교(電雷學校) 등에서 보유한 함정의 총 배수량은 2,000톤 이었다. 전쟁 발발 전 중국의 해군 함정은 총 120여 척으로 배수량은 총 6만여 톤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해군력은 배수량 116만여 톤인 동아제국 해군과 비교하면 고작 1/19밖에 되질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 함정들은 오래되었기에 전투력 수준이 낮았을 뿐 아니라, 배수량이 작아 원해(遠海) 작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중국 공군은 3개 폭격대대, 3개 구축대대, 2개 정찰대대, 1개 공격대대로 총 9개 대대 예하에 26개의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대대 이외에 직속 5개 중대 및 4개 수송대를 추가적으로 보유했다. 전쟁 발발 직전에 중국 공군은 전국에 총 6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으며, 주요 비행장 12곳을 포함하여 전국에 총 262개의 비행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성된 조종사는 대략 3천 명에 달했다.

상비 군사력 비교

중화민국 연합정부동아제국간의 상비 군사력은 양적으로만 비교하게 될 경우에 해군과 공군은 동아제국이, 육군은 중화민국이 우세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다. 허나 편제 인원 및 무기 장비 등을 고려하게 된다면 해·공군력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육군은 중국군이 우세하다고 볼 수 없는 결과가 산출된다. 개략적인 육군 전투력을 비교하기 위해, 이하에서 전술작전부대 단위인 중국군 사단(師團, 혹은 師)와 동아제국군의 사단(師團)을 비교한다.

동아제국군 보병 사단의 전시 편제는 2여단(旅團) 4연대(聯隊) 편제였다. 편제 인원은 총 2만 여명이었으며 작전 시에는 기타 특수병종이 사단에 배속되었다. 추가적으로 동아제국군은 경장비를 보유한 보충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실제 전투편성에는 포함되디 않은 채로 수시로 결원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아제국군 1개 사단의 실제 병력은 대부분 편제 인원을 초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중국군의 사단(師團)은 개편된 30개의 사(師) 이외에는 편제가 비교적 혼란스러웠다. 사(師) 예하에는 일반적으로 2여(旅) 4단(團) 편제였고, 병력은 대략 1만여 명 정도였다. 따라서 병력면에서 동아제국군 1개 사단은 중국 1개 사단의 2배 정도였으나, 편제 장비(사단별 전차 보유 등) 등을 고려해 보면 전투력은 그 이상의 차이가 났다고 볼 수 있다.

국민당군(國民黨軍) 군정부장(軍政府長) 허잉친(何應欽)은 동아제국군 1개 사단의 병력과 화력은 중국군 개편사(師)의 4배에 해당되며, 전투력 면에서는 훨씬 더 강할 것이라고 하였다. 개략적으로 중국군 1개 사단과 동아제국군 1개 사단의 전투력 차이를 1:4의 교환비로 가정한다면 동아제국군 상비사단 19개 사단과 필적하기 위해서는 중국군은 최소 76개의 개편사가 필요했고, 1938년 연합정부군 참모본부에서 판단한 동아제국의 중국 전역 투입예상병력 40여 개 사단과 상응하기 위해서는 무려 190개의 개편사가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연합정부군은 중앙에 겨우 30개의 개편사밖에 보유하지 못했으며, 나머지 수백 여개의 사단은 교환비에 해당되는 전투력이 훨씬 못 미치는 부대들로 평가받았다. 공군 및 포병 화력, 그리고 함포의 지원 등을 고려한다면 실제 전투력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거기에 전장의 공간적 특성상 한 전장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 규모의 제한 사항 등을 고려한다면,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남작(Alexander Von Falkenhausen)이 언급한 것처럼 중국군이 동아제국군을 상대로 정규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전쟁 발잘 직전 동아제국의 군사력은 중국 연합정부보다 월등히 앞섰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정치와 군사 조직력 및 내부 단결과 사기 등의 요소를 더 감안한다면 이러한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1936년부터 연합정부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동아제국도 마찬가지로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군사력은 동아제국의 군사력을 앞서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었다.

소결

열하사변(熱河事變, 1936) 이후 중화민국 연합정부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에 따라 외적으로 동아제국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대동전(對東戰)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1936년 열하사변 이후 구상되기 시작한 연합정부의 對군사전략은 독일 군사고문단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남작의 1936년 비밀문서인 '응부시국대책'(應付時局對策) 안과, 연합정부군의 '민국 27년도(1938년) 작전계획'을 통해서 판단해 볼 때, 1930년대 중반에 이미 동아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명확한 군사 전략에 도달해 있었다. 연합정부군 참모본부는 동아제국이 소련 혹은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 여부에 따라 2가지 작전계획을 작성했는데, 이러한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동아제국에 대한 수세적인 '지구소모전략' 방침을 구체화 한 것이며, 초기 방어단계의 성공에 따른 별도의 공세작전계획도 포함하여 작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연합정부가 동아제국에 대해 '지구소모전략'을 계획하였지만 그러한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의 중앙집권화와 전력 증강이 전제 조건으로 기초되어야 했다. 먼저 군 조직면에서 연합정부는, 1932년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북벌 이후 폐지했던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다시 설치해 군정부(軍政府)를 중심으로 한 연방적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고, 국방위원회(國防委員會)를 신설하여 대동(對東) 국방업무를 전담토록 했다. 이러한 연합정부군 지휘체계의 조정과 국방 전담위원회의 설치는, 유사시 전시지휘의 효율성을 높이고 對東국방업부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기여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군 조직개편에도 불구하고 연합정부는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난징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와 왕징웨이(汪兆銘), 천궁보(陳公博) 등을 주축으로 한 국민당 좌파계열의 우한 국민정부(武漢國民政府)간의 대립을 비롯해 옌시산(閻錫山), 펑위샹(馮玉祥), 리쭝런(李宗仁) 등으로 대표되는 신(新) 군벌들을 완전히 복속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 또한 중앙정부에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2]은 연합정부군 조직 개편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1936년, 협화 시대(協和時代) 선언 이전까지 합중병단(合衆兵端)이 사단 편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합중국 군 편제의 분리 운용으로 인해 합중병단의 규모가 들쑥날쑥했기에 야전군(野戰軍) 혹은 군단(軍團)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2. 물론 중앙정부조차 2개의 국민정부(國民政府)로 이원화된 상황이라 통제의 한계는 명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