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和國
晨光國, 大東和國
대동화국
신광국
14021853
어기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
표어 경세제민(經世濟民)
1402-1757
군민일체(君民一體)
1757-1853
수도 한성(漢城)
정치
공용어 중세 신국어(16세기 이전)
근세 신국어(17세기 이후)
정부 형태 전제군주정, 내각서사제
주요 국왕 무조 조사의(1402-1416)
현종 조홍(1416-1444)
목종 조경(1532-1567)
덕종 조혈(1659-1689)
성종 조연(1757-1788)
인종 조균(1826-1853)
입법 의정부(議政府)
역사
 • 임오거병 1402년 11월 5일
 • 화민정음 반포 1446년 10월 9일
 • 밀지의 옥 1492년 1월 25일
 • 임진왜란 1592년 ~ 1594년
 • 나선정벌 1652년 ~ 1689년
 • 임진약조 1832년 7월 29일
 • 계축개신 1853년 3월 26일
지리
면적 222,300㎢
내수면 비율 2.8%
기타
통화 (1423~1799)
(1799~1853)

대동화국(한국어: 大東和國) 혹은 신광국(한국어: 晨光國)은 유학(儒敎)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신반도(晨半島)와 그 부속도서를 수백년 간 통치한 왕조이다. 조선(朝鮮, 1392-1402)의 무관이었던 무조 조사의(武祖 趙思義)가 무인정사(戊寅靖社)로 인한 조선 지배층의 권력 다툼에 반발하여 임오거병(壬午擧兵)을 통해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왕조를 개창했다.

조사의이서(李舒)를 의정부(議政府)를 총괄하는 재상으로 임하여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추진한 뒤 신권 정치를 적극 운용했다. 현종(顯宗)은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우대하였으며, 충녕백(忠寧伯) 이도(李祹)를 등용하여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함으로서 학문을 장려하고, 화민정음(和民正音) 창제를 지원했다.

15세기 이후부터는 성리학(性理學)을 비판하고 서경덕(徐敬德) 학파을 중심으로 양명학(陽明學)이 통치 사상에 깊이 침투되었다. 한편으로는 지방 지식인이었던 사림(士林)[1]과 훈구파(勳舊派)간의 대립이 극심해졌는데, 이를 바탕으로 특정 가문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 정치(勢道政治)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자연스레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관료 사회가 중앙 정치에 강력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방 사회를 주도하던 성주들이 중앙 정치에 개입하면서 중앙 관료층과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일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불만이 극심해지면서 지방 영주들을 중심으로 왜정벌론(倭征伐論)이 제시되었고, 남부 지방에서는 독자적으로 일본(日本)과 대마도(對馬島)를 통한 해상 교역을 진행하여 서양 문물이 유입되었으며, 북부 지방에서는 명나라청나라의 체류하던 예수회(耶稣會) 선교사들을 통해 새로운 종교 및 사상이 유입됨으로서 사회는 급속도로 변혁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성종(成宗)이 왕권을 회복하고자 복벽론(復辟論)을 주장했으나 조정의 주도권을 가지던 고창 김씨(古昌金氏)를 중심으로 세습 관료층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후 실학(實學)의 필요성을 제시하던 지방 개혁가들은 지방 성주들의 지원을 받아 중앙 관료 사회의 진출하였고, 일부는 이양선(異樣船)을 이끌던 서양 세력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함으로서 1832년, 로드 암허스트호(The Lord Amherst)의 선장이 제시한 통상안을 인종(仁宗)이 검토 및 받아들임으로서 임진약조(壬辰約條)가 체결되었고, 이후 동화는 개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각주

  1. 이들은 중앙 정치에 관여하려 했던 성주(城主)들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