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암허스트 통상 요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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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암허스트 통상 요구 사건은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1832년의 조선으로 입국을 시도하여 통상을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내용

영국 동인도 회사는 타이완을 거쳐, 조선국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류큐에 이르는 통상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인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겸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Karl Friedrich August G?tzlaff, 1803∼1851)를 통역관, 선장 Rees를 포함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후에 귀츨라프는 "The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 Choo Island" 책을 1834년에 발간한 바 있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27일 중국 광동을 출발하여 1832년 6월 21일(순조 32년) 황해도 몽금포 해안에 나타났다가, 남하하여 충청도 홍주 고대도 뒷 바다에서 20여 일간 정박하며,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전달해 줄 것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제까지의 서양선들과는 달리, 통상을 요구해 옴에 따라 조선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각별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세자(孝明世子)가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들의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주며 청나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처음 통보하였으나, 반청을 목표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려던 효명세자는 전담 특사로 홍희근(洪羲瑾)을 재파견하여 통상을 맺을 것을 허락하였으며, 이에 이들을 외국 특사로서 고대도에 임시 상주할 것을 허락하였다.

7월 21일, 이들 서한과 선물을 다시 받았으며, 확답을 받은 로드 암허스트 호는 1834년의 영국으로 귀국하여 조선국의 답신과 하사품을 전달한 뒤 추가적인 교류 특사들을 파견할 것을 결의, 1835년 8월에 조선국을 재방문하여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게 된다.

귀츨라프 목사의 조선국 첫인상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al)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혀서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지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 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 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인간의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상은 귀츨라프 목사의 항해기 내용으로 동양 사정에 밝은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박해 사실[1]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들 조선국이 통상 개항을 한다는 것을 다시 전달받음에 따라 크게 놀랐다고 전해지며, 그는 선입관과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과 함께 조선의 군주가 통상 개화를 통해 국가를 강하게 만드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1. 다만, 신유박해는 초기에 순조(純祖)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시기였다. 즉, 순조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며 순조가 성인이 되어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 강력한 군권을 바탕으로 천주교 활동을 비공식적으로 묵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