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지아 내전
Rhodesian Civil War
사열 중인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군
기간 1965년 11월 9일 - 1972년 5월 9일
장소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전역
원인 남로디지아 주방위군의 연방 탈퇴 선언
결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의 승리
로디지아 전범재판 시작
위대한 연방 선언
영향 구 식민지 연방 간의 결속력 강화
교전국 중앙아프리카 연방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
지원국 남아프리카 연방 소련 ~1969
지휘관 롤랜드 로이 웰랜스키[1]
이언 스미스[2]
로버트 무가베
케네스 카운다
에머슨 음낭가과
카난 바나나[3]
헤이스팅스 반다[4]
병력 연방군 346,000명
주 방위군 37,000명
주 방위군 24,000명
민병대 348,000명
피해 115,656명 전사 176,900명 전사

개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중심으로 벌어진 내전을 의미한다. 특히 전쟁 중반까지인 1969년까지는 소련이 남로디지아를 지원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다. 군인 사상자는 양측을 합쳐 30만 여 명이다. 민간인 사상자는 10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전개

발단

1964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권을 회복한 연방은 1965년 6월 19일 연방의 존속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공고했다. 하지만 남로디지아의 경우 연방 존속에 부정적이었는데[5], 주지사인 이언 스미스가 남로디지아도 국민투표를 실시해 연방의 총 투표수에 가산할 것[6][7]이라고 못을 박자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은 반란을 꾀하게 된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허우적대는 것을 본 소련은 로디지아의 상황까지 간섭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보고 사회주의자였던 카난 바나나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 사령관에 접촉해 소련제 무기 대여[8]와 전문 인력 양성을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주변국인 콩고에선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언제 내전이 주변국으로 퍼질지 염려하여 연방 정부나 각 주 정부나 모두 무기의 공급에 혈안을 올리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압도적인 물량의 소련제 무기가 자연스럽게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연방 존속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된 1965년 9월 5일 작전 결행을 준비, 국민투표가 75.8%로 존속으로 결정되어 공고된 9월 5일 새벽 카난 바나나는 소련의 지원 아래 주지사 이언 스미스와 연방 각료와 의회 등 공공기관 인사들을 추방하고[9], 남로디지아 주의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당시 영국으로 나가있던 롤랜드 R. 웰랜스키 총리는 연방의 탈퇴는 용인할 수 없으며,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말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반발한 헤이스탕스 반다 솔즈베리 방위 연대장[10]이 자국 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남로디지아 내의 연방군 주둔지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 점령한다. 결국 1965년 11월 9일 남로디지아 북부의 시노이아(Sinoia) 주둔지에서 연방군이 철수를 거부하자 남로디지아 군은 주둔지를 공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로디지아 내전이 발발한다.

진행

정체된 전선

솔즈베리의 밤

소련의 퇴장과 영웅의 등장

전쟁의 끝

결과

기타

각주

  1. 연방 전시 총리
  2. 남로디지아 주지사
  3.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 사령관
  4. 남로디지아 주 방위군 부사령관
  5. 당시 경제력의 절반 가까이가 남로디지아에 의존 중이었다.
  6. 당시 남로디지아 대 북로디지아+니아살랜드의 인구비는 1:2로 국민투표의 표 수를 합칠 경우 연방 존속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7. 특히 남로디지아 안에서도 연방 존속파와 해체파가 첨예한 대립을 이어나가던 중이었다.
  8. 내전이 종결된 이후 갚는 것으로, 사실상 무상 지원이었다.
  9. 물론 남로디지아 주의 연방 탈퇴에 긍정적인 인사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10. 출신은 니아살랜드였지만, 당시 연방군에 입대하여 엄연히 연방군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