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로마 제국 동부, 즉 동방 로마 제국의 기원은 3세기의 위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에서 비롯되었다. 최초로 제국을 각자 분할해 제국의 영토를 4명이 통치하며, 2명의 공동 황제가 각자 1명씩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삼아 함께 제국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르러 사두정치는 폐지되고 제국은 세습의 방향으로 통치정책을 전환 추진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미 행정상의 기능을 전부 잃은 로마를 대신하여 서기 330년,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었던 마르마라 해의 도시 비잔티온에 새 로마(Nova Roma)를 세우고 그 곳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동시켰다.[1] 새 로마의 별칭은, 수도를 천도하고 새 로마를 세운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에서 따와 콘스탄티노폴리스(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이다.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확립한 제위 세습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에 제위는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양분하여 가지게 되었다. 동서분할 이후 (동)로마 제국의 첫 황제는 바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이었던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Augustus)이다.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린 동방의 제국은 그리스와 발칸 반도, 소아시아[2], 레반트와 이집트, 동지중해 제도로써 이루어졌으며 이 영역은 7세기경까지 유지되었다.

4~5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에 비해 더 강건하고 효율적으로 유지되었다. 서방에 비해 풍부한 자원과 경제력을 통해 유목제국들에 공물을 주어 침입을 막았으며, 군사적으로도 용병 등을 고용하여 제국 서방에 위기가 닥쳤을 때 도와주기도 했다. 아르카디우스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교외에 성벽을 요새화하였고 이를 통해 더 강해진 성벽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이후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린다.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하여 제국은 동방의 영토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하자 동방의 황제 제논은 테오도리크와 협상하여 제국 서방의 명목상의 영유권을 보존하였다. 이후 491년, 늙은 행정가였던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미완된 화폐 개혁을 완성하고 제국의 부를 쌓아 그가 사망할 당시에 제국의 부는 약 32만 파운드나 되어 후세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방 재정복 활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제위는 마케도니아 출신 농부이자 로마 황실 근위대장이었던 유스티누스가 황제에 올랐다. 유스티누스의 다음 황제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로, 초명은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Flavius Petrus Sabbatius)로써 삼촌의 재위기에 삼촌이 너무 무식하였으므로 조카였던 그가 통치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26년 삼촌으로부터 공동황제에 지명받았고 이듬해 유스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황제에 등극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법인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로마법 대전을 더욱 성문화하였고, 서방 영토 수복에 총력을 기울여 히스파니아 남부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영토를 상당히 수복하는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재정복 활동으로 인해 전대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이룩한 부를 모조리 소비하게 되면서, 후대 황제들에게 많은 짐을 남기고 말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후 한세기 동안 제국은 사산 왕조를 비롯해 신흥 강자 이슬람교 제국과의 전쟁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였지만, 당대 폭군 포카스를 몰아내고 즉위한 이라클리오스의 개혁으로 제국은 아프리카의 영토를 잃었지만 이후 다시 중흥을 노릴 수 있는 발판을 닦았다. 이라클리오스 왕조가 붕괴되면서 제국은 20여년간의 혼란을 맞았으나,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이 반란을 일으켜 당대 황제 테오도시오스 3세를 폐위시키고 이사브리아 왕조를 개창하면서 종결되었다. 이후 제국은 이사브리아ㆍ니키포로스ㆍ아모리아 왕조를 거치면서 20여년간의 혼란기에 손실된 국력을 재정비했다. 867년 성립된 마케돈 왕조는 제국 국력과 강역의 회복과 재확장을 상징했다. 특히, 요안니스 1세와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 기간에 제국은 그리스 일대를 넘어 다시금 불가리아 및 발칸ㆍ이탈리아 남부 일대, 아나톨리아를 넘어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서부를 평정하여 7세기 이후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발생한 여러 차례의 내란과, 콘스탄티노스 10세 이후 두카스 왕조가 급변하는 중동 지대의 정세를 잘 헤아려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데에 실패하면서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에게 아나톨리아 대다수 지방을 손실하는 등 정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때 등극한 콤니노스 왕조의 현제들은 제국이 아나톨리아 서부를 재정복하고 제국의 경제력을 수복하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2세기 콤니노스 왕조의 성립과 함께 거대한 족벌화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콤니노스 현제들의 연이은 집권으로 제국은 서부 아나톨리아를 다시 수복하였다.

콤니노스 말대 황제, 마누일 1세의 아들이었던 알렉시오스 2세는 1185년 즉위하여 군사령관이었던 앙겔로스 가문의 알렉시오스와 함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안드로니코스 1세)의 집권시도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알렉시오스에게 제국 궁정의 고위관직을 여럿 주는 등 정치적인 이득을 여럿 주었다. 후사가 없었던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를 1193년 자신의 누나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시켜 그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했으며, 혼인 직후에 그를 공동황제로 지명하였다. 1195년 알렉시오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망한 후견인이자 신하였던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마침내 등극하였다.

제국은 앙겔로스 왕조에 이르러 다시 빛을 보게 된다. 1195년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2세의 후임 황제로 등극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실시한 튀르크 부족들에 대한 유화 정책과 반대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정벌로 제국은 다시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을 재복속할 수 있었다. 앙겔로스 왕조는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이전보다 증대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는 고대의 정치적 문화유산으로부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한 일종의 비즈니스 립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다. 여하튼 이후 앙겔로스 왕조는 자신들이 집권했을 당시와 같이, 200여년의 지배를 끝마친 뒤 1453년 경 당대의 명문가였던 팔레올로고스와 혼인정책을 실시하였고 앙겔로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사망한 뒤에는 그들이 제위를 평화적으로 이양받았다.

하지만 명문(明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지배는 전대와 달리 100년 이상 가지 못했다. 첫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니키포로스 5세의 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연이은 재해가 발생했고, 황가는 불안한 후계구도가 구성되어 레온 9세에 이르러선 황권이 약해졌으며 결국 혼란에 봉착했다. 게다가 1451년에 즉위한 레온 9세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고 팔랑귀 기질이 있어서 주관적인 국정을 펴지 못하였기에 권신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자 제국의 부정부패는 극에 다달았다. 결국 1489년 아나톨리아의 유력 귀족들이 노쇠하였지만 경험많은 정치인 아나스타시오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세달만에 콘스탄티노플로 쾌속 진격하여 레온 9세를 폐위시키면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성립 68년만에 붕괴했다.

로마사에서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멸망한 직후의 15세기 말, 즉 아나스타시오스 3세가 즉위한 1489년부터 1497년까지를 10여년간의 혼란이라고 부른다. 이는 7세기 초 황제들이 6번이나 바뀌었던 "20여년간의 혼란"에서 따온 역사적인 이름인데 10여년간의 혼란기 중 황제는 3번 바뀌었으며 그들의 재위기간은 각각 4-2-2년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새로이 즉위한 아나스타시오스 3세는 이미 즉위 당시 상당히 노쇠하여 정무를 혼자서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들 스테파노스를 공동 황제(카이사르)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무의 일부를 맡겼다. 아나스타시오스의 치세에 제국은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즉위 4년만인 1493년에 부자가 급사하면서 마누일이라는 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제위에 올랐다. 마누일 3세 역시 아나스타시오스 3세 옹립에 큰 공을 세운 고위 귀족으로 즉위 이전까지 파플라고니아 지방의 스트라테고스로 재임하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에 이미 전군이 사실상 그의 휘하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마누일 3세가 아나스타시오스 부자를 암살하고 즉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누일 3세의 치세는 겨우 선제 재위기간의 반토막인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미 제국 전역에서 아나스타시오스 3세의 급사가 마누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가 암살을 사주하거나 주도했다는 주장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제국 정부가 손쓸 틈도 없이 1495년 8월에 이르러 소요사태가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전역은 분노에 들끓었고 부콜레온 일대에까지 시민들의 하야 요구가 빗받쳤다. 황제는 동년 11월 10일까지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칩거했으나 수도 전역에서, 11월 16일, 궁전 인근에서마저도 폭동과 화재가 연이어 발생하고 사실상 황제의 손아귀에 있다고 보여지는 원로원마저 23일 황제의 사임을 권고할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벼랑끝에 몰린 마누일 3세는 시민들의 반발에 못이겨 12월 1일 퇴위를 선언하고 도망치듯 수도를 빠져나가 이피로스 일대의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렸다.

제국은 일시적인 황제 공석 상황에 놓였다. 그건 마치 대혼란의 일종이었다. 마누일 3세는 퇴위 즉시 수도를 빠져나가서 후임을 지명한다던지 할 겨를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앙겔로스 왕조가 이룩한 원로원 권력 증대 작업이 빛을 보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1495년 12월 18일 원로원이 새 황제를 지명하겠다고 발표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로마 궁정에서 대단히 놀랍고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고 원로원이 황제를 지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서유럽에서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당일인 12월 25일에 원로원의 영향력 있던 의원 티베리오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티베리오스는 전통적 관례에 따라 이튿날 성 소피아 교회에서 티베리오스 4세의 이름으로,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에게 대관식을 거행받았다. 이듬해인 1496년 1월 2일, 제국 대다슨의 귀족들은 즉각 충성을 거부했고 자신들이 새 황제와의 내전상태에 놓였음을 전격 발표했다. 결국 티베리오스 4세의 치세는 내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새 황제는 순수한 문인(文人)이었기 때문에 군사를 효율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오직 군사 참모들에 계획을 일임하는 등 의존하였다. 1496년 3월 6일, 제국군과 지방귀족군의 첫 전투가 니코메디아에서 벌어졌다. 황제는 칼도 잡아본 적이 없어 진지에서 대기하였으며, 그의 참모이자 장군인 니키포로스 아말로스가 지휘봉을 잡았다. 훌륭한 군인들을 가진 제국군은 훌륭한 장군의 지도 하에 귀족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제국군은 동년 9월까지도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9월 21일 참모단 10명 중 4명이 적군인 귀족파들에 붙으면서 참모는 6명밖에 남지 않은데다 전투를 거치면서 11월경에는 4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참모는 2명밖에 남지 않았다. 니키포로스 아말로스는 마지막 힘을 다해 12월까지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으나 일흔하나의 늙은 장군은 1497년 2월 15일에 결국 숙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그에 의존하던 황제는 장군의 사망소식을 듣자 마자 1497년 2월 18일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결국 3월 1일 귀족파의 대표 테오도로스 마크렘볼리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황제를 만났으나 티베리오스 4세는 3월 3일 갑작스레 급사하였다. 현대 사가들은 당대 기록의 정황으로 보아 테오도로스가 티베리오스와 만났을 때 그를 목졸라 죽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게 1497년에 이르러 세습되지 않은 무왕조기, 10여년갓의 혼란은 끝이 났다.

마크렘볼리티스 왕조와 원로원의 분쟁

16세기와 17세기는 마크렘볼리티스 왕조의 치세였다. 마크렘볼리티스 황제들은 원로원과의 협치보다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바실리오스 2세같은 전제권 행사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확대된 원로원과 상원의 의원층들이 가지는 불만으로 유발되었다. 원로원과 상원은 더이상 늙은 귀족들이 모이는 친목회가 아니었다. 젊고 중후하며 냉철한 철혈귀족들이 모여 정열적으로 토론하고 황제에게 주장하는 인민 민의의 행사장, 그 자체였다. 황제는 이들을 견제해야 전제권의 행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립이 지속되던 도중, 아나톨리아에서 발생한 가뭄으로 식량 생산량이 급속도로 줄었다. 5대 황제인 레온 8세 치세의 초반기, 주후 1616년 10월이었다. 결국 드디어 이듬해 1월 중반, 이 발생했다. 1616년 1월 23일, 원로원과 상원을 무시한다고 여긴 젊은 귀족 의원층들이 대중을 선동하여, 아브구스테온 광장에서 수많은 행렬을 이끌고 황궁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대중은 황제에 대한 한없는 비난과 "사태의 시정"을 요구했다. 그와중에도, 늘상 군의와 민의를 대표하는 황제의 대처는 어떻게 될지 주목 받았다.

레온 8세는 열렬한 전제정주의자였다. 그는 소요사태가 발생한 지 사흘만에 사태를 파악하고 대중을 선동한 원로원ㆍ상원의 귀족층들이 제위에 내분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고자 민중을 선동해 광장까지 쳐들어왔다며, 친위대를 보내 이들을 무참히 진압하였다. 이는 제2차 니카 반란의 시초였다. 1차 니카 반란이 청색당과 녹색당, 그리고 황제 사이의 무언가였다면 2차는 원로원과 상원, 황제의 정면대결이었다. 사실, 귀족층들 역시 평화로운 시위를 조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민중이 분노하게끔 황제와 정부의 명예를 격하하는 연설을 실시하였고 그들이 낫을 들게 한 다음, 자신들은 갑옷을 입고 칼을 들어 행진하였다. 누구에게도 이 광경은 황제를 폐위하고자 하는 쿠데타의 한 장면으로 비춰졌다. 그들은 아브구스테온 광장으로부터 대황궁에 인접한 구역들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Νίκα!"

반황제파 원로원과 상원의 귀족층 대표 니키포로스 고파스(Νικηφόρος Γκόφας)는

  1. 천도.
  2. Anatolia, 이 시대에 아나톨리아는 소아시아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