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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도바의 역사(storia Moldovei)
전근대사 근현대사
선사시대 외세의 지배 몰다비아 공국-
양의 몰다비아
몰다비아 공화국
(제1공)
제1차 공산 정권 제2공 제2차
공산 정권
내전기 제3공
로마 제국
/다키아 속주
부족들의 침입 캅차크 칸국
몰다비아 공국 몰다비아 분할
이아시 사건
양의 몰다비아
네암츠
베사라비아
몰다비아 공화국
1월 혁명
파시스트 집권기 스탈린 점령기 몰도바인민공화국
키시너우 항쟁
몰도바 제2공화국 제2차
몰도바인민공화국
몰도바 내전
북몰도바
남몰도바
몰도바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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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사

몰다비아 공국을 건국한 드라고슈 공작

현재의 몰도바 영토 내에서 제대로 된 정착민족의 '문명'이라 볼 수 있는 집단이 거주한 것은 AD 2세기 경이었다. 당시 몰도바 영토 북동부에는 다키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다키아인들 또한 게르만 부족이었던데다 다른 부족과의 국경에 가까웠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몰도바 영토 내에서의 문명 발달이 월등하게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나마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영토를 정복한 이후에는 문명의 영역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몰도바의 영토는 초원길의 바로 직후에 위치해있는데다,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다양한 유목민족의 진출로가 되었다. 다키아인들의 멸망 이후에는 고트족, 훈족, 아바르족, 마자르족, 페체네그족, 쿠만족, 몽골족에 이르기까지 침략을 당했으며, 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영토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14세기 초, 몰도바의 영토는 몽골제국의 후신국가인 캅차크 칸국의 치하에 있었다. 캅차크 칸국은 몰도바를 지나 불가리아를 공격하는 등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에 유행한 흑사병과 함께, 자니베크 칸과 베르디베크 칸의 암살은 캅차크 칸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베르디베크 칸의 암살 이후 무려 네 가문이 칸을 둘러싸고 혈전이 난무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는데, 이로 인하여 캅차크 칸국은 국경에 가까운 자신들의 종속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였다. 몰도바 지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몰도바 지역의 영주였던 체르니히는 군사들을 이끌고 독립한다. 이 국가가 몰도바 최초의 자주국가인 몰다비아 공국이다. 몰다비아 공국은 영토를 확장하여 현재의 몰도바공화국의 영토를 비롯하여 루마니아 동쪽 8개 주를 차지하는 광역이 되었다. 체르니히 대왕 사후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어 통치된다. 형인 슈테판에게는 베사바리아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토 전부를, 동생인 베사라비아에게는 베사바리아주와 그 일대 지역(현재의 몰도바공화국 강역)을 물려받게 된다. 스티븐이 상속받은 영토는 몰다비아-네암츠 공국이, 베사라비아가 상속받은 영토는 몰다비아-베사라비아 공국이 성립된다.

두 공국은 13세기 말부터 치열한 경쟁관계를 가지게 된다. 14세기 초에는 이아시 사건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14세기 중반에 몰다비아-네암츠 공국이 불가리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정교회로 개종하자, 몰다비아-베사라비아 공국은 이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 교황으로부터 주교를 파송받게 된다(몰다비아 종교대분열 사건). 그렇게 몰다비아-네암츠 공국 지역은 정교회를, 몰다비아-베사라비아 지역은 가톨릭을 믿게 되면서 점차 두 집단은 단일한 형제국가로서의 공통점을 상실해간다. 이는 현대에 몰다비아-네암츠 지역이 루마니아를, 몰다비아-베사라비아 지역이 독립 몰도바공화국을 건설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다만 왕족의 혈연적 관계는 계속 이어가서, 슈테판 3세 대공(1457 ~ 1504)과 용담공 미하이(1599~1600)를 비롯한 몇몇 군주의 일부 재위 기간에는 동군연합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담공 미하이를 마지막으로 양 지역의 동군연합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 이때 동군연합에서 모다비아-베사라비아 지역은 상당히 자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1812년 몰다비아-베사라비아 공국은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반면, 오스만 제국령이던 몰다비아-네암츠 지역은 왈라키아와 연합하여 1859년 루마니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14세기부터 이어진 두 지역 간의 갈등은 이후 러시아와 루마니아 관할로 바뀌어도 이어지게 된다.

몰다비아 공화국

1월 혁명 당시 궁전 전투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자, 자치령인 몰다비아-베사라비아 공국에서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몰도바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화주의 사상을 따르는 몰도바의 지식인들은 독립 몰도바당을 결성하고 몰다비아 공작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몰도바의 국민들은 무능한 공작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왜 타국의 이익을 위하여 먼 전쟁터로 가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동의하지 못했다. 이렇게 몰도바의 국민마저 돌아선 상황에서 몰도바의 공화주의자들은 1월 3일 자신들을 따르는 무장대와 함께 공작의 궁전을 공격했다. 무능한 공작을 지켜줄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공작을 지켜줄 러시아군은 내전을 하기 위하여 모두 국내를 떠난 후였다. 3일 저녁 8시, 근위대도 도망간 공작의 궁전에서 몰도바의 공화주의자들은 공작으로부터 퇴위 서명서에 서명을 받았다.

이들은 가장 먼저 의회를 소집하고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제1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새롭게 취임한 정권에서는 러시아로부터의 보호령 탈피와 독립국가 건설을 선포하였다. 새롭게 건국된 공화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다른 민족들의 이탈 방지였다. 새 정부는 의회에 몰도바 영토 내의 다양한 소수인종 대표들을 포함시켰으며,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하여 단일한 '몰도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기나긴 논의 끝에, 민족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몰도바의 새 민주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민족순환제를 제정하여 민족별로 대통령을 돌아가면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때마침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고자 했던 열강들은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재빠르게 인정했다. 신생 몰다비아 공화국은 순풍을 단 것처럼 잘 운영될 것처럼 보였다.

몰도바 파시스트 집권기

몰다비아 파시스트군

그러나 전간기의 암운이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에 드리워졌다. 독일, 이탈리아, 그밖에 남유럽 국가에서 세력을 늘려가던 파시스트들이 몰디비아에서도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몰디비아 파시스트당은 194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의석에 30%에 달하는 90석을 차지하였다. 1941년, 파시스트당은 우익 정당과 손을 잡고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격한 저항으로 파시스트당이 추진하던 법안들이 줄줄히 부결되자, 이들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무력으로 국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루마니아 파시스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야당이 다수를 차지했던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몰디비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해나갔다. 이윽고 11월에 전후하여 루마니아 파시스트당은 몰디비아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파시스트와 싸우던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지하로 숨어들거나, 영국, 소련 등지로 망명하였다.

몰디비아 파시스트 정부는 추축국에 가담하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국내에 잔류한 레지스탕스들은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파시스트 정부의 군사적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들의 저항은 매우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몰디비아 파시스트 정부는 1944년 남유럽으로 진군한 소비에트 연방이 키시너우를 군사적으로 해방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스탈린 점령기

소비에트 연방을 통치하던 스탈린은 몰디비아 지역이 소비에트로 병합되길 원했다. 그러나 별도의 독립 정부가 존재하는 몰디비아 지역을 병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소련은 몰디비아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소련으로 도주한 몰디비아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내세워 군정 기간 동안 운영할 임시 자치정부를 구성하였다. 이 체제는 스탈린이 급사하는 1953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임시 자치정부는 참으로 특이한 시기를 지냈는데, 바로 공산당 내부에서 온건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몰디비아 임시정부 수장인 니로첸카 보르쉬 국가평의회 의장의 적극적인 옹호로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하였던 온건 자유주의자들은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비밀경찰에 의한 적극적인 체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로 인해 온건 자유주의자 상당수가 엄혹한 스탈린 시기를 거쳐 몰디비아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키시너우 항쟁과 몰도바인민공화국의 성립

파일:Kossuth Lajos utca - Károly (Tanács) körút sarok. Fortepan 23591.jpg
키시너우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자, 공산당 내부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몰디비아 공산당에서는 소비에트로부터의 독립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몰디비아 민족주의적 경향에 따라, 독자정부 수립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공산당 당대회에서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청하는 건의안을 채택, 소련공산당에 안건을 제출하였으며, 키시너우에서의 적극적인 시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독립을 선동하고 나섰다. 이윽고 니로첸카 보르쉬 국가평의회 의장은 소련 정부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요청하는 문서를 제출하였다.

당황한 소련 정부는 진압군을 키시너우로 파견하여 소요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몰도바 정부군과 시민들의 격한 반발로 인해 소련군은 키시너우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정부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를 선택하게 될 경우 주변국으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소련 정부는 독립 정부인 몰도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승인하게 된다. 그렇게 몰도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연합 정부로 탄생하게 되었다. 일당제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의 계급연합국가가 형성된 것이다.

1989년 동구권 혁명과 몰도바 제2공화국 성립

라두 셰르네처 총리

1989년 중반, 동구권 혁명의 연속으로 공산정부는 집단적으로 붕괴되기에 이른다.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재차 혁명이 일어났으며, 동독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공산정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 했다. 이윽고 옆나라 루마니아에서도 차우셰스쿠가 총살되고 정권이 전복되자, 몰도바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공산당은 이들의 요구에 굴복, 제13차 소비에트대회에서 다당제와 즉각적인 선거 진행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정당 건설이 합법화되자마자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자유당과 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진행된 선거에서 자유당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다. 그해 진행된 선거에 따라 미르체아 수네구르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미르체아 수네구르 정부는 개헌을 통해 국명을 몰도바 제2공화국으로 변경하고, 당시 불어닥치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국가가 운영하던 보험, 기업 등을 전폭적으로 민영화하였다. 이후 자유당은 지하정당에서 반공 활동을 해오던 게오르게 김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중부 및 남부 일대 대규모 개발 사업을 제시하여 1993년 정권 재창출과 의회 의석 과반 사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1997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분배 문제를 지목하며 거리로 나섰고, 그 정국 속에 치러진 대선은 분배를 약속한 민주당 소속 마리안 루푸(대통령)-공산당 소속 블라디미르 보로닌(총리) 중도-좌파 연정 정부로 넘어간다.

2001년, 자유민주당 소속 라두 셰르네처 정부가 경제개발, 토목정책, 적정분배 등의 적절한 조화를 통한 중도 융합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당선되었으며, 당시 루돌프 본 합스부르크 총리를 기용하여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을 도입했다. 그러면서 좌우 양 진영에서 각 정당이 이합집산하며 좌는 연합사회당 우는 자유보수연합 체제가 되었으나 연합사회당은 당세를 제대로 활용치 못하고 녹색사회당이 창당되며 좌파는 빠른 속도로 양분되었다. 2005년에는 국민들이 정치 개혁을 요구하여, 신몰도바개혁당 이맹박(대통령)-자유보수연합 라두 셰르네처(총리) 동거 연정이 생성되었다. 기존 라두 셰르네처 정부 정책 그대로 끌고 갔으나 권위주의적으로 변화해갔고, 한비자의 몰도바 입국을 통해 몰도바의 대격변이 야기된다.

몰도바 내전과 현대

파괴된 카홀의 아파트
한비자

2007년 입국한 한비자는 라두 세르네처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권위주의적 행보와 미흡한 경제 정책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한비자의 행보는 라두 세르네처 정부의 권위주의화에 반발하던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한비자는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타격을 입어 몰도바의 경제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가지수는 대폭락하였고, 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위기에 빠져 몰도바는 아이슬란드, 그리스, 아일랜드 등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가 되었다. 한비자는 라두 세르네처의 무능한 경제 경책을 비판하고 나섰고, 경제 위기로 인해 생활이 나빠진 국민들의 큰 지지를 얻게 되어 2009년 총선에서 한비자가 이끄는 공산당은 제1정당을 차지하게 된다.

제1정당을 차지한 공산당은 니콜라이가 이끄던 공산전선과 연정을 이루어 집권했으며, 몰도바의 국명을 몰도바인민공화국으로 변경을 추진하고, 개헌을 시도하는 등 다시 몰도바를 공산주의 체제 국가로 회귀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라두 세르네처를 필두로 한 연합자유당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몰도바는 정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한비자는 연합자유당에 미리 자신의 심복이던 로널드 레이건을 요직에 심어두었으며, 전당대회를 통해 로널드 레이건이 당수가 되자 즉시 연합자유당을 공산당에 합당시키고 라두 세르네처의 당원권을 정지시켰다. 결국 라두 세르네처는 해외로 망명하였고, 보수 세력은 붕괴하게 된다. 그 뒤 공산당은 공산전선까지 흡수하며 사실상 몰도바의 유일한 일당이 되었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게 된 한비자의 주도 아래 개헌안을 통과시키며 몰도바인민공화국이 2014년 6월 수립되었다. 한비자는 대약진운동과 대국민 분배정책 등을 시행하며 몰도바를 다시 공산주의 국가로 회귀시켰다. 그러나 한비자는 2014년 7월 26일 서거하였으며 주석직은 유언에 따라 델샤오핑 공산당 부부장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동지가 8월 갑작스럽게 국내에서 실종되었고, 동시에 공산당 내 반대파들이 많았던 델샤오핑은 불안정한 주석 지위에 놓여있었다. 결국 2014년 9월 1일 델샤오핑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친위 쿠데타 이후 공산당과 인민대표회의가 철폐되고 델샤오핑의 주도 아래 국가정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자유 몰도바를 희망하는 이들의 민중시위와 공산당원들의 군사적 행위가 발생하였고, 몰도바 수도권을 장악한 델 샤오핑 쿠데타 세력과 공산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민중들 및 군부 세력들이 장악한 북부, 자유 몰도바를 희망하는 민중들과 이들을 지지하게된 남부군세력들이 장악한 남부로 몰도바가 나뉘어지게 되었다.

공산 진영의 지도자는 한정자였으며 한비자를 따르던 충실한 공산당원으로서 델샤오핑과 여러차례 인민대표회의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등 새로운 공산당의 얼굴이였다. 그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공산당을 규합하고 군대를 재구축하여 델 샤오핑이 장악한 수도권과 공산혁명으로 숨어들어간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또한 델샤오핑 집권 이후 지지부진하였던 북부지역의 정치범들을 즉각 처리하였으며 가난과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민중들을 구원하여 북부 지방에서의 지지도가 매우 높았다. 자유진영의 지도자는 델샤오핑의 정치범 석방으로 인하여 해외망명으로부터 복귀한, 자유진영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써 활동하고 있던 라두 세르네처였다. 그는 델샤오핑의 친위 쿠데타로 민중들의 시위가 보장받게 되자 비밀리에 규합중이던 자유세력에게 남부를 중심으로 민중시위를 일으키도록 지시하였고 남부지역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공산당군으로 재편되지 않았던 남부 지역의 군부대들이 그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이 덕분에 남부 지역에서 자유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좌우합작운동 지지 시위
니콜라이
토니 마르코

2018년 9월 16일, 한정자는 공산진영 즉 북몰도바의 인민군(공산군)에게 남방한계선을 돌파할 것을 지시했으며 자유진영 즉 남몰도바의 수장이던 라두 세르네처는 방어에 나서며 몰도바 내전이 본격적으로 개전되었다. 동시에 북몰도바는 델샤오핑 쿠데타 세력이 점령하고 있던 키시너우 탈환에 나섰고, 이에 대응해 서수도광역구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델샤오핑군이 동수도광역구에 진입한 공산군에게 폭격을 진행하며 키시너우 광장 및 주변 일대는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이후 커우셰니주-아르치주 접경지대에서의 공산군과 자유군 사이의 첫 전투가 발생하였고 공산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아르치주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동시에 공산군은 키시너우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남몰도바의 카홀에서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청년 10만여명이 무기고를 습격한 뒤 무장해 군인과 시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카홀 항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던 몰도바의 균형은 깨져버렸으며 전 국토가 포화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개전 직후 공산군의 총공세와 자유군의 필사적인 저항의 충돌은 혼란스러웠다. 한 전장에 모든 병력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연출했으며, 아군의 포탄에 적과 아군이 같이 죽는 황당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난전에 의해 양측 진영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낳게 되었다. 이후 공산군은 자유군 해군기지 급습 작전을 시도하였고 이 작전은 고속정 5척과 초계함 3척을 격침시켰으나 공산군 역시 고속정 5척이 침몰하고 구축함이 대파되어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또한 자유군은 후방에 상륙한 공산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으며 이로 인해 공산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반격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군은 공산군을 철수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공산군은 공세가 실패한 이후 포격을 지속했으며 이로 인해 자유연방군의 진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전쟁이 장기전이 될것이라 판단한 공산측은 자유측에 현 전선을 경계로 한 휴전을 제의하고 나섰다.

휴전 제의 이후에도 전투는 지속되었으며, 아르치 대격전에는 공산군이 승리하고 타타르부너르 전투에서는 자유군이 승리하는 등 혼전이 지속되었다. 제2차 혼체슈티 공방전에서는 공산군의 돌파가 실패로 끝났으나 자유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후에 자유군이 반격을 개시해 아르치주를 점령하는 등 공방전이 계속되며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공산측은 재차 휴전을 자유측에 제의했고, 남몰도바의 이맹박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함에 따라 2016년 7월 27일 내전은 잠시 휴전되었다. 이로 인해 양측 진영 모두 소강상태에 들어섰으며, 1년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2017년 11월 5일 자유측의 선제타격에 의해 다시 전쟁이 개전되었으며, 다시 양측의 소모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북부와 남부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폰지 사기(Ponzi scheme)를 저질렀던 짭종필이라는 범죄자로 인해 남북을 가리지 않고 몰도바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몰도바 내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바로 좌우합작운동이였다. 2017년 11월 26일 장기간 실종되었던 니콜라이가 다시 입국하였는데, 루마니아로 지병 치료를 위해 갔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긴 시간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것이였다. 니콜라이는 깨어난 직후 몰도바의 상황을 보고 탄식한 뒤 통일을 위해 나서기로 하였으며, 우익 진영의 토니 마르코의 손을 잡고 좌우 지식인 공동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좌우 지식인 공동 선언은 한정자와 라두 세르네처 모두의 축출과 몰도바 민중 중심의 통일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많은 몰도바 민중들이 공감하며 지식인들이 주도하고 민중들이 지지하는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몰도바 민중들의 격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북몰도바와 남몰도바 정계에서도 이 움직임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점점 주전파들은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한정자와 라두 세르네처도 민중들의 요구에 따라 통일협상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 본부의 중재 아래 남북간 통일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후 2018년 12월 2일 최종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자유진영 중심으로 통일하되 공산진영 소속인물에 대한 보복과 정치참여 금지는 없을 것이며 한정자의 공산당에게 차기 선거서 일정수준의 의석을 보장한다는게 그 내용이였고 양측 진영이 이에 합의함에 따라 몰도바는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자유선거에 따라 통일된 정부가 구성되었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몰도바는 민주적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몰도바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혁신공산당, 통일민주당, 미래당의 삼당정치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정치가 안정되자 몰도바 내전에 대한 후속조치도 동반되었다.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청문회였으며, 라두 세르네처, 한정자, 요하임 등 내전 관련 전범의혹자들에 대한 2공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청문회에서 욥 트뤼니히트, 베네딕트, 한유 등의 강경파 의원들의 질의에 따라 청문회 대상자들은 청문회를 통해 학살, 감금 등의 전범 행위가 드러났으며 그에 따른 처벌 역시 이어졌다. 그러나 라두 세르네처는 청문회 직후 이한민주공화국으로 도피하여 처벌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미르체아 지우르지우 내각, 토니 마르코 내각 등을 거치며 제3공화국 체제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몰도바의 경제 재건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2019년 9월 혁신공산당에서 노동자혁명당이 분당되고 미래당이 사회당창준위와 합당하여 사회민주당으로 재탄생, 통일민주당도 9.7선언을 발표하는 등 몰도바 정계는 제3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큰 정계개편을 거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도시락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2019년 10월 10일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부터 몰도바 주 및 부코비나 주를 할양받았고, 이로서 몰도바의 역사적 고토를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