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복벽

신군부 병력이 관저로 향하는 모습.
날짜1978년 5월 13일 ~ 1978년 5월 16일
장소해성국 해성국 해성행정시 전역
결과 신군부 및 야당 인사들의 정권 장악
공화정 붕괴와 왕정복고
교전국
신군부 및 야당 세력 구군부 및 공화정 세력
지휘관
한민화
정예훈
지은예
문성익
신윤희
민훈

무오복벽(중국어: 戊午復壁)은 1951년에 공화 쿠데타로 폐지된 왕정을 복고시킨 사건이며, 해성국 내에서는 "왕정복고"라고 표현한다.

개요

1970년대의 해성 공화국 정권은 독재와 탄압으로 얼룩지면서, 공화정 성립에 목적이자 목표였던 민주주의 가치를 도리어 훼손시키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민훈은 군비를 대폭 증대하면서, 엄격한 군사 통제 국가를 이루어 흔들리던 체제의 안정성을 회복하려고 했는데, 많은 민간인들과 야당의 정치인들은 공화국 정부와 해성민주당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큰 반발을 하게 되면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당시 군부는 공화국의 군비 확장 정책을 통해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전개되던 동해 전쟁 시기에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군사적 지원과 교류에 힘업어 군사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또, 미국과 일본에서 파견된 고문관들을 통해서 국군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과 미국의 문화와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일부 군부 인사들은 후에 신군부에 가담하여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는 아이러니를 맞이한다.

과정

1978년, 해성행정시 전역에서 평화 시위가 진행되자 정부측은 이를 진압할 것을 군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군부의 주요 인사들은 정부의 독재와 비인간적인 처우로 인하여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정부를 전복할 것을 결의하면서 스스로를 "신(新)군부"라고 지칭하였다. 신군부 인사들은 시위 주도자와 주요 정치인들과 협력하여 공화정 체제의 전복을 약속하였으며, 이에 따라 거의 대부분의 군부 인사가 가담하면서 공화국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또, 미국은 비밀리에 신군부에게 물적 지원을 약속하고 민훈측에게는 거짓 지원을 약속하면서 무오복벽의 성공에 크게 일조한다. 미국이 신군부를 지원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공화국측과 미국측의 첨예한 대립 갈등을 속히 해결하기 위한 부분이 제일 컸다.

신군부의 선전포고를 들은 민훈은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문성익과 제11 경비단장 신윤희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신윤희가 신군부측에 가담하게 되고 문성익은 교전 중 포로로 생포되면서, 대통령 관저가 위치한 예화구와 남화구를 제외한 해성행정시 전역이 신군부에게 장악되자, 직접 군통수권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독재 몰락과 왕정복고

민훈은 최후의 보루로서 해성 수도경비헌병대를 직접 전두지휘하였으나, 신군부의 치밀한 공작으로 지휘체계의 혼선과 함께 대통령 관저까지 밀리게 되어 수세에 몰리자,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민훈은 유언장을 남기고는 스스로 관저에서 자결하였으며, 수도경비헌병대와 민훈에게 가담했던 이들은 전부 독재·부패 처결 재판에 넘겨지게 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신군부를 비롯한 야당의 주요 정치 인사들은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는 해외로 도피한 해성왕조를 귀국시킨 뒤에 왕정복고를 통한 입헌·민주 정치 실현의 가치를 내세우며 지금의 해성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왕정이 복고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국가를 하나로 통합할 구심점의 필요성과 함께 신군부와 야당 인사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전: 만주 지역에서는

만주 지역에서는 뒤늦게 신군부 주도의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달되면서 본토로 급히 병력을 움직이자는 제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항쟁이 이어졌으며, 만주에서 활동하던 네임드있는 왕정복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도 이러한 항쟁에 가세하였다. 결국 만주 자치 사령부에서는 "이번 쿠데타에 대해 지지를 표방하며, 민주적 정권 수립에 대한 기대가 크다."라는 발표를 내보냄으로서 구군부는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