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한자: 美英决裂
영어: United States - United Kingdom Split
중국어: 美英交恶
러시아어: Соединенные Штаты - Америки раскол

미국과 영국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서로를 등지고 있다.

개요

미영갈등, 또는 미영결렬, 미영분열로 불리는 미국과 영국, 나아가 영연방 내에서의 불화와 미국-유럽간의 관계 악화는 미국과 영국 사이의 외교 관계의 분열과 단절로 이어졌다. 9.11 이후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서로 다른 입장과 끝내 영국이 이라크 전쟁에 불참하는 것에서 비롯된 상호간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의 극적인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빌 클린턴 행정부를 거쳐 조지 W. 정권을 맞이하며 미국의 대외적인 개입 횟수는 날로 늘어났고, 이와 관한 미영간의 안보 사안을 둔 논쟁은 영국의 노동당 정권이 워싱턴으로부터 더욱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반대로 또 영국은 미국의 명백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등지고 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함으로서 양측의 단순 입장차는 완연한 분열로 이어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바트당 정권에 대한 최후통첩으로 대표되는 미국과 중동간의 갈등에서 미국은 세계 악의 축으로도 불리우는 미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는 적성국들에 대적하여 더욱 호전적이며 공세지향적인 입장을 취했고 반면 영국과 노동당 정권은 더욱 조심스런 접근을 요구해왔다. 멕시코 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영변 공습 이후 미국의 지나친 공세적인 스탠스에 대한 경계였다.

또, 영국은 미국이 스페인-모로코 전쟁 이후 아랍과 유럽간의 분쟁 이후에도 이라크 전쟁 이후의 미국과 중동간의 관계를 위하여 상대적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아랍 국가들과 관계가 커지는 것에 대해 영국은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서 분노하였다. 반면 미국은 영국의 노동당 정권과 영향받은 다른 영연방 국가들에게서 나타날 미국에 대한 국가적인 배신 행위에 분노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전쟁 전 영국 하원에서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반대적인 연설 이후, 존 브라운 총리는 조지 W. 부시의 무리한 이라크 침공과, 나아가 이라크에는 실체적인 WMD(광역살상병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조지 W. 부시는 이 이후 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영향력 확보에 더욱 골몰하며 노골적으로 과거의 파이브-아이즈 체제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다.

상호간의 밀접한 연관이 있던 미-영의 이러한 충동적인 분열로 양국은 민간 사회에서의 많은 상호 협력이 모두 단절되어갔다. 그런 한편 영연방 국가들에게는 이라크 전쟁 이후부터 미국과 영국의 분열은 장기적으로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 다가왔다.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던 캐나다는 당연히 미국의 편에 섰다.

그런 한편, 호주의 경우 당시 이라크 전쟁을 목전에 두고 벌어진 이러한 미국과 영국간의 대립과 분열에서 훗날 이를 두고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총리는 "불편하고 답답한 해결"이라고 한 침묵을 택했다. 영국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존 하워드 총리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함께 하였고, 결국 전쟁 이후 영국과 호주의 관계는 상당히 냉각되었다.

존 하워드 총리는 2007년 총선 이후 총리 자리를 한번 더 지키는데 성공하면서, 영국과의 관계보단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우선시했다. 2009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부터 호주와 중국간의 갈등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호주는 자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협력 파트너로는 미국이 더욱 우선시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뉴질랜드는 이후로도 한동안 영국의 편에 섰다.

미국과 영국이 사소한 전쟁을 둔 입장차로부터 국가적 분열로 이어질때까지 러시아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제2진영은 이러한 양국의 분열을 또 다른 기회이자, 과거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지던 장장 20년간의 중소간의 분열과 반목을 삼자냉전의 구도를 형성시켰던 것 처럼, 전반적으로 미영간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신냉전 상황에서 이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였다.

미영간의 갈등은 단순 구미권 서방세력과 중국과 러시아의 권위주의 블록간의 대치 상황을 탈피할 기회였다.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전쟁 이후 아랍 연맹이 유럽에 대한 압박으로서 택한 석유 수출 금수 조치는 유럽 내의 에너지 시장에서 러시아가 최대 공급자로 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제공했고, 점차 커져가는 유럽과 아랍간의 갈등 상황에서 러시아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서 이득을 보았다.

반면, 미국의 경우 점차 러시아가 유럽과 가까워지자, 반대로 인도와 같은 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에 더욱 많은 패권을 행사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신생 세력의 쿠데타를 모두 진압하고 더욱 커진 알 카에다로 인한 일대 혼란은 미국의 중동 진출에 여러 에로사항을 꽃피웠으나, 반대로 알 카에다의 지나친 확장에 그들과 결별하고 러시아와 대적하기를 택한 무슬림들과 협력을 굳혔다.

이스탄불 폭탄 테러 이후 부쩍 늘어난 터키와 시리아간의 분쟁은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미국의 CIA가 훈련시킨 지하디스트들을 투입함으로서 터키의 시리아 침공과 그 후 시리아 내의 반정부 세력의 궐기를 통해 러시아의 중동 방면의 진출로였던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몰락시켰다. 이러한 과감한 접근법은 중동 내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더욱 좁혀나가고 압박할 수 있었다.


발단

영국 하원 연설과 걸프전 불개입 선언

런던 시내를 가득 채운 300만여명의 반전 집회는 그 자체로 영국 정부에 대한 압박이었다

2003년 2월, 당시 이라크전에 참전하라는 미 정부의 압박에 영국 정부가 진지하게 이라크 전쟁의 참전을 고려할 시기, 영국의 이라크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런던에서의 가두행진을 벌이며 큰 주목을 받는다. 당시 영국에서 또한 200만명을 웃도는 300만여명 규모의 시위대가 런던 거리를 행진하며 이라크전 참전 반대를 외쳤다.

이러한 반전 시위는 영국 뿐 아니라 전유럽적인 기류였으며, 심지어 당사국인 미국에서조차 9.11 이후의 상황 속에서 매우 소극적이지만 그만큼 반전에 대한 여론이 존재하는 만큼, 특이한 사안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특히 더 강한 반전여론이 나타나면서 블레어 총리에게 대내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놀랍게도, 이런 시위에 영국 하원의장이 반전 요구를 긍정하고, 또 호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영국 하원의장 로버트 쿡은 이러한 국민적 반대 여론을 등에 업고 하원에서 이라크 침공은 미국의 예방전쟁이라는 미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는 연설로서 당시 영국 내에서 이라크전에 대한 참전 반대의 입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일 원동력이 되었다.

로버트 쿡의 참전 반대에 대한 연설 이후, 노동당 전체가 이에 호응하여 이라크전에 대한 영국 참전을 반대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혀왔으나 로버트 쿡 의장을 위시로 뭉친 노동당 내에서의 강한 반전 여론에 피로를 느낀 블레어 정권은 이후의 불개입 선언으로 알려진 미국과의 정 반대 노선인 이라크 전쟁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는 조지 W. 부시 이전의 빌 클린턴 행정부의 영향이었단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핵개발이 명확하게 나타나자, 영변에 대한 기습적인 공습을 벌였고, 이는 작전의 성공과 북한의 핵개발 역량 자체를 무력화 시켜 핵개발을 좌절시킨 그 공로와 성과와는 별개로 자칫 잘못하면 전인류적인 핵전쟁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던 일이었다.

이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 정부는 결과적으로 북의 핵보유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그 공 자체에 집중하였으나, 같은 해 벌어진 멕시코 내전에서 미 정부의 본격적인 개입까지, 당시 친미 진영에 있는 서방 국가라 하더라도 미국이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공세지향적인 성향은 어쩌면 인류적인 위기론까지 나올 만큼 불안한 것으로 평가됬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그러한 불개입 선언 또한, 어떻게 보자면 이러한 당대의 세계적인 미 정부에 대한 암묵적인 불신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다. 특히,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에 대한 기습적인 공습을 "예방전쟁"이라 칭하였듯, 이번 이라크전 또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바트당 정권의 이라크가 보유한 WMD를 제거하는 예방전쟁이라 칭한 것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블레어 총리는 미국의 참전 요구를 거부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에 항의하는 대신, 전쟁에 대해 신중론을 제시했던 콜린 파월을 영국으로 보냄으로서 처음에는 영국을 향한 협상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2003년 3월 초, 런던을 방문한 콜린 파월 장관을, 블레어 총리는 의도적으로 피하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국내외적인 강한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콜린 파월 장관을 최대한 완만히 하여 돌려보내려 한 블레어 총리의 이런 태도는 미국의 워싱턴에게는 영국이 미국에게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는 인식까지 심어주었다. 콜린 파월이 영국을 방문한 동안 무려 세번이나 총리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고, 영국에서의 일정 내내 홀로 끼니를 떼우다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런 외교적인 문제는 전쟁을 앞둔 미국에겐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다. 영국 노동당 의원들은 블레어 총리의 뒤늦은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욱 노기가 생겨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는 성명을 냄으로서 갈등을 봉합할 초기의 조치들을 모두 무산시켰다. 이후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며 미국은 더 이상 영국과의 자잘한 소모적인 논쟁에 시간을 소모하는 대신, 다른 다국적군을 알아봐야했다.

영국과의 불화가 시작된 것은 미국과 영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였지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더 많은 다국적군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일본과 대한민국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시키는 "제주 선언"을 통해 영국을 배제시키고 영연방 내에서조차 캐나다와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조차 미국의 편에 서며 미국은 당장 어떠한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다만 전쟁이 시작되고나서 영국 노동당의 지속적인 반미적인 스탠스는 미 정부의 공식적인 경고로 이어질 만큼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이었다. 처음 중동 문제에서 신중론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한 블레어 총리의 미온적인 태도는 그 후임 총리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강경한 영국 자립론을 자극시켰다.

미군의 공습을 받은 바그다드 시내의 대통령궁

미국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하였다. 오히려 영국의 전쟁에 대한 비개입 선언이 영국에게 있어 외교적인 손실로 느껴질 만큼 미국은 지독하게 영국을 배제했다. 전쟁 동안 미국의 모든 외교 사안은 후순위로 밀려났으며, 오직 이라크와 그 주변의 이슬람 아랍 국가와의 관계된 문제들, 즉 중동 지역의 패권만이 주요 쟁점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의 갈등은 잘 조명되지 못했다. 미국이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영국은 미국과의 갈등을 봉합할 선택지와 기회가 존재했으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온 블레어 총리는 미국에 대한 이라크 비개입 선언 이후 영국 사회에서의 반미적인 분위기를 자신의 정치세력들, 즉 영국의 좌익들이 휩쓸려 이끌리는 동안 상황을 방치했다.

미영관계가 방치되는 것은, 만일 전쟁이 오랜 기간이 걸렸다면 몰라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짧고 빠르게 끝났다. 미국은 효율적으로 이라크의 낙후되고 비대한 군 조직의 취약점에 놀랄만한 치명성을 지닌 신형 미사일과 전투기로 공습을 퍼부었고, 이라크는 중동 내에서 상당한 규모를 지닌 군사대국이었으나 초라하게 몰락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과 냉각화된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바트당 정권이 붕괴하고 난 직후부터 이어진 혼란을 수습하느라 잠시 동안 영국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시도를 할 여지가 없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쟁이 끝난 뒤 부터 영국을 간접적으로 거론하며 NATO의 결속과 신뢰를 언급했다.

2006년, 미국은 이라크에 남아있는 많은 이슬람 반군들을 격퇴하는데 총력을 가했다. 이중에는 유일신과 성전의 간부 중 하나이자, 당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섞여있었다. 그는 모사드에 의해 훈련받은 요원이었지만, 미군의 공습에 휩쓸려 사망하면서 당시 이라크 내의 이슬람 반군들은 자연스럽게 알 카에다에 의하여 흡수되었다.

이미 심각하리만큼 갈라진 양국 관계를, 새로이 총리가 될 고든 브라운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2007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직후 중동 정세를 혼란케 만든 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영국의 대외 정책에는 더 많은 신중론과, 워싱턴에게 휩쓸려 화를 보아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총선 기간 동안 미국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이어나가겠다는 립서비스적인 말 뒤에는, 항상 영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과욕이 있었다. 이후 브라운 총리의 잦은 정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든 브라운 총리는 국내에서의 지지율이 문제가 될때마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거론했다. 한편,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도 이에 영향을 주었다.

존 매케인은 대선에 출마하며 당시 공화당 내 젊고 활기넘치는 폴 라이언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고, 선거 국면에서 존 매케인의 일부 지지자, 또는 그의 가까이에서 조언할 수 있는 이들 중 극소수만이 세라 페일린을 여성 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호소했으나 묵살되었다.

미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이라크 총리 알말리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2004년부터 이어진 이라크의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영국의 반대 선언은 오히려 미국, 그리고 미국과 함께하는 연합국의 수 전체는 줄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이미 미 정부와 "합의된 전쟁"을 치루기 때문에 더 많은 전선의 확대와, 더욱 과감하고 치명적인 공격들도 대부분 허용되었다.

이라크 내 대부분의 반군은 미군과 그 연합군에 의해 격퇴당했고, 수니파와 시아파를 망라한 미군의 총공격에 의해 이라크 반란은 진압되었다. 2007년까지 거의 대부분 거점을 상실하고 도주하기 시작한 수니파와 시아파 반군들은 각각 알 카에다와 이란에 의해 흡수되었고, 알 카에다 마저 최대 규모로 확대된 뒤 미군에 의해 토벌당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인 존 매케인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일으킨 아랍에서의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는 것을 정권의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문제는 실제로도 조속히 해결한 것이었다. 당시 아프간과도 함께 미국의 군비 지출의 가장 큰 한 부분이던 두 전쟁에서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지역의 알 카에다는 대부분이 격퇴되었다.

이라크 신정부의 안착, 실제로 미국은 전쟁에 준하는 막대한 전비를 또 쏟아부어 강제적으로나마 이라크의 신정부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켰으며, 2010년 탈레반과 협상을 타진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며 아프간 지역에서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다시 유럽으로 시선을 향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국내에서의 지지율이 떨어질때마다, 미국과의 외교 문제를 거론했다.

존 매케인 대통령은 처음 몇번은 고든 브라운 총리의 단편적인 접근을 허락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교섭과 협상에서 미 정부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나아가 이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극심해진 호주와 중국간의 분쟁에 소극적으로 나온 영국 정부와 달리, 공화당이 주류를 차지한 미 정부는 중국을 장기적인 적수로 판단해 대응했다.

호주와 중국간의 분쟁에서 적절하지 못한 외교적인 조치는 브라운 총리의 영국이 가진 리더십을 의심케 만들었다. 2010년, 총선 국면에 접어든 영국에서 고든 브라운은 2001년 아프간 침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파멸적인 상태에 놓이도록 한 미국이 탈레반과의 협상 이후 철수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일방적인 행위라며 비난했다.

총선 동안 고든 브라운은 자신의 지지율과 평가를 뒤집기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 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브라운 총리의 과욕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총리직은 이제 데이비드 캐머런에게 돌아갔다. 매케인은 캐머런 정권 초기부터 양측에게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으로 관계 회복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전개

매케인-캐머런 협의

매케인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의 만남



브렉시트 좌절과 다시 경직된 미영관계

우크라이나 내전

이라크 내전, 시리아 침공

번외

호주-중국 분쟁

1978년, 아시아에서 서양인 여행객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질러온 프랑스인, 찰스 소브라이는 1976년 뉴델리에서 세명의 프랑스 대학원생 여행객들을 호텔에서 약물로 살해하고 인도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대만으로의 도망을 택했다. 그러나 1978년 소브라이는 대만까지 수사망이 확대되어오자 호주 출신의 부유한 유학생, 케빈 러드를 살해했다.

2007년, 총선에서 호주 노동당의 제니 맥클린과 호주 보수당의 존 하워드 당시 총리의 선거는 존 하워드의 우세로 끝났고, 그렇게 한번 더 연임에 성공한 보수당은 본격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패권을 행사하려하는 중국과 잦은 충돌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시작부터 중국이 위협적인 태도로 호주를 겨냥하기 시작하며 이는 더욱 빠르게 이루워졌다.

존 하워드 총리는 임기가 시작된 뒤 처음으로 겪은 중국과 호주의 분쟁은 호주의 영해를 두고 중국과 충돌한 건이었다. 중국의 잠수함이 호주 영해를 침범했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2007년 호주-중국 분쟁의 시작은 호주 하워드 총리가 티벳의 달라이 라마와 만남으로서 중국을 자극시켰고, 중국 측은 공식적인 비판과 함께 항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