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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식민지 시대(~1776)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던 시대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재빨리 원양 항해 기술을 익혀 대항해 시대가 막을 열었다. 이탈리아(제노바)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승낙을 받아 대서양 주변의 아시아를 발견하러 나섰지만, 1492년에 서인도 제도에 도달했다. 이어서 영국인 존 캐벗이 북미 대륙의 동해안을 탐사하였고, 영국이 이를 영유(뉴잉글랜드 식민지)하였으며,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이것을 프랑스가 영유(캐나다 식민지)하는 등 서구인에 의한 남북 아메리카의 탐험과 개척, 인디언에 대한 영토 약탈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콜럼버스의 상륙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 학살의 상징일로 매년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시위를 결행하는 날이기도 하다.

미국의 식민지로서의 발전은, 1607년에 현재의 버지니아 주에 있는 제임스타운이 영국인에 의해 건설되어, 영속적인 식민을 개시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현재 미국의 식민지 활동으로 ‘개발’은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가 될 운명을 예정하듯이 진행되었다.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인(뉴잉글랜드)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인(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개발’은 주로 영국인과 프랑스인 두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뉴네덜란드)가, 델라웨어에는 스웨덴인(뉴스웨덴)이, 플로리다에는 스페인 사람(누에바 에스파냐)이 각각 나름대로 오늘의 미국 범위의 식민지를 구축했다. 동부는 이미 17세기 중반에 현재의 미국 문화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가 이식된 것이다.

종교적으로 볼 때 원래의 이민은 가톨릭이었지만, 16세기에 유럽에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출현과 종교 개혁에 이어 종교 전쟁이 일어나면서 퓨리턴(청교도)이 1620년의 이민(메이플라워 호)을 계기로 신천지를 찾는 신교도들이 ​​잇따라 정착했다. 그들은 진보적인 가톨릭과 인디언과 적대하면서 세력을 늘려나갔고, 1620년의 이민은 현재에도 미국의 신교도 사이에서 위업으로 칭송받고 있다.

서구인은 식민지에서 설탕·커피·면화·담배 등의 농작물로 농장을 일구었지만, 이내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서구인은 인디언을 노예화하고 또 이와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 진출하였으며, 현지 아프리카 여러 부족 흑인을 사로잡아 노예 무역을 통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수출하였다. 그것과 교환으로 진보된 화기와 당시 진출한 인도산 면직물을 아프리카의 흑인 유력자에게 팔았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 수요는 카리브해 지역 및 중남미가 압도적이었고, 북미에 노예 수출은 많지 않았다. 18세기는 전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중심으로 인디언 노예 매매가 성행했다. 노예 제도에 의해 유지되는 미국 남부의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북미 동해안을 장악한 영국은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부로 확대했다. 이 단계에서 13개 식민지를 건설하며 주에 따라서는 백인 인구가 인디언을 넘어서는 지역이 등장했다.

18세기에 들어가면, 한랭한 기후로 비교적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동북부에서 양조·조선·운수 등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 본국의 경제를 압박하게 되었다. 원래, 신교도가 다수파를 차지하는 식민지에서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본국은 알력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정신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일찍부터 〈양모제품법〉이나 〈철법〉으로 식민지에서의 공업 발전을 방해했고, 영국과의 무역 이외의 독자적 무역을 금지해 왔지만, 여기서 더 엄격한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를 더욱 압박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 중에서 필요한 자국 군의 주둔비와 전비를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에 대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으로 무역 독점을 꾀했다. 개척민들은 반 과세와 〈인지세법〉 폐지를 주장하였고, 1765년에는 열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영국은 이듬해 이 세금을 철폐했지만, 이번엔 〈차법〉으로 차의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개척민들은 1773년에 보스턴 항구를 습격하여,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회의를 열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결의한다.

1775년 4월 영국의 주둔 병사와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병대 사이에 충돌(렉싱턴 콩코드 전투)이 발생하면서 아메리카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개척민 대표들은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하여, 조지 워싱턴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륙군을 결성하고,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개신교적 사상을 드러낸 현대 민주주의의 원점이 된 미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영국은 1660년대부터 죄수 유배 장소로 미국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거대한 유배지를 잃었고, 형 집행이 곤란하게 되자 새로운 유배 식민지로서의 오스트레일리아를 개척하여 호주의 역사로도 이어져 갔다.

토마스 제퍼슨이 1778년 델라웨어에서 델라웨어 족과 ‘인디언 조약’을 처음 체결한 이후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무력을 배경으로 영토를 구입하고, 그들을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몰아넣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인디언은 땅을 사고 파는 문화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을 이해하지 못했고, 수많은 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디언의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다.

불안한 신생국가(1776 ~ 1849)

건국 초기

위스키 반란

해외 프랑스 문제와 미영 전쟁

루이지애나와 서부 개척 시대

미국 멕시코 전쟁

분열과 내전의 시대(1849 ~ 1867)

디트로이트 체제(1867 ~ 1886)

텍사스 균형(1886 ~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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