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전쟁 (Le Deuxième Napoléon)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Franco-Prussian War
Guerre franco-allemande de 1870
Deutsch-Französischer Krieg
기간 1870년 7월 19일 – 1871년 1월 12일
장소 프로이센 왕국, 프랑스 제2제국
원인 엠스 전보 사건으로 촉발된 국민감정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프로이센 측 프랑스
프로이센 왕국 프랑스 제2제국
지휘관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헬무트 폰 몰트케 †
알브레히트 폰 론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프리드리히 황태자 ◎
카를 폰 슈타인메츠
나폴레옹 3세
파트리스 드마크마옹
병력 120만 명 115만 명
피해 110,600명 전사
107,321명 부상
395,021명 포로
39,245명 전사
82,610명 부상
15,021명 포로
결과 프랑스 제2제국의 승리
영향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북독일 연방 해체
프랑스의 라인란트 합병


개요

프랑스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전쟁. 이 전쟁으로 독일에서는 북독일연방이 무너지고 통일의 꿈이 무산되었으며, 프랑스 주도의 체제가 시작되게 된다.

일명 보불전쟁. 오랜 세월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되어 과거 나폴레옹에서 당했던 치욕을 돌려주려다 다시 한 번 나폴레옹에게 당한 전쟁이다.

전개

초반

프랑스는 이미 보오전쟁에서의 프로이센을 보고 군대를 개혁하였고, 빠른 동원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40만, 프로이센군은 38만 5천을 집결하였으나 프로이센 추가 증원군까지하면 당장 전선에서는 프랑스군의 수적 열세였다. 프랑스군은 분전했으나 프랑스의 국경요새가 함락당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고, 프랑스군 15만명이 메츠 요새에 포위되고 만다.

스당 전투

이를 구출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는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프로이센군이 길을 막아섰고, 프랑스군은 스당 요새에서 재정비한 뒤 다시 공세하기로 한다. 그 순간 헬무트 폰 몰트케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스당 요새를 포위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첩자 등으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포위하던 적군의 중앙부를 기병돌격해 지휘부에 혼선이 빚게 한 뒤 15만의 군대로 빠져나온다. 프로이센의 지휘부가 재정비될 쯤 프로이센은 이미 스당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이미 프랑스군은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후퇴한 뒤였다.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스당 방어군이 항복하려 고민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 3세가 적의 포병대를 직접 타격해 궤멸시키는데 성공한다. 프로이센군은 수적우세였으나 포위하느라 포위망이 얇은 곳도 있었고, 그 곳을 공격하는 척 기만작전을 하며 포병대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후 나폴레옹군은 다시 후퇴해 지휘부를 공격해서 지휘부를 궤멸시킨다. 그 과정에서 헬무트 폰 몰트케가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포로로 잡히고 만다. 프로이센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자 병사들은 스당에서 도망치기 바빴고, 프랑스군은 도망치는 군대를 공격해 포로로 잡았다. 몰트케가 사망하고 프랑스가 스당에서 승리한 9월 2일을 프랑스 제2제국에서는 '스당 전투의 날'이라는 이름의 국경일로 후에 지정한다.

후반

이후 주공이 붕괴된 프로이센은 메츠에서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프랑스는 군대를 재정비해 11월 총공세를 시작한다. 독일의 라인란트를 넘어 베스트팔렌까지 넘어서자 프로이센은 마지막 모든 군대를 끌어모아 뮌스터에 배치했으나 이미 질적 수준으로나 양적 수준으로나 모두 프랑스군에 밀리는 상태였고, 결국 뮌스터에서 프로이센군이 격파당하고 뮌스터가 점령당한다. 결국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프랑스에 항복하고 만다.

결과

프랑스 제2제국

외교적으로 무능하다 여겨졌던 나폴레옹 3세의 능력이 입증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의 지지율은 더욱 증가하여 반대 세력이 없어지다시피 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항복 조건으로 베를린에서 프랑스군의 개선식을 하루동안 하고자 하였으나 프로이센의 반대로 뮌스터에서 프랑스군의 개선식을 진행한다. 이때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 가한 굴욕을 프로이센은 매우 치욕스럽게 생각했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다린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을 완전히 해체해 놓아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 자그마치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요구하고,
  • 소라인란트와 룩셈부르크를 가져가고,
  • 북독일연방을 해체, 프로이센 왕국의 동부 영토를 제외하고는 모두 뺏어 독일 연방을 세운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본토에서 털린 적은 있어도 보오전쟁에서 7주 만에 전쟁을 끝내는 등 다시 한 번 유럽 최강급의 육군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의심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입힌 치욕은 털지트에서의 조약만큼이었고, 이후 프로이센은 영국과 손을 잡고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