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
大辰

1443년1505년
국기 국장

1495년, 세종 사망 직후의 최대 강역.
수도 칭양
정치
공용어 한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주요군주 태조
세종
경종
역사
 • 전호자의 난 1443년 8월 15일
 • 중국 통일 1490년 8월 19일
 • 시안 사건 1503년 12월 5일
 • 멸망 1505년 8월 17일
기타
국교 불교, 도교, 유학(교민학)
통화 진화, 진전
현재 국가 중화민국

개요

중국 역사상 통일 왕조중 하나로 농민에 의해 건국되고 농민에 망한 국가이자 한족 최후의 통일 왕조. 반란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차지하였으며, 곧이어 강남을 점령하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지나친 친몽배조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개혁으로 멸망했했다.

상세

1443년 칭양에서 태조 전호자가 난을 일으켜 화북을 점령하고, 몽골과 화친을 맺어 북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한편, 강남 지방의 오나라와 자주 마찰한 끝에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또다른 동아시아 국가인 조선에게 중화제국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내치를 위해 정복활동을 상당 기간 할수 없었던 진나라는 결국 한동안 친몽배조 정책을 이어간다. 이후 서역과 만주를 점령하며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으나, 지나친 친몽배조 정책은 몽골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현상을 초래했고 결국 몽골인이 진나라 정치에 개입하려 시도한 시안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졌고, 이를 틈탄 왕족 전익천의 개혁으로 북진이 멸망하고 남진이 탄생했다.

진나라는 농민이 개창한 왕조로써 민생을 중요시 여겼으며, 심지어 암군 통치기에도 민생은 그다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암군이 통치할 때는 전쟁 패배, 분열, 시안 사건등 정치적, 외교적으로 거대한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의 외교적 입지는 줄어들게 된다. 한편 그나마 통일 시기 유럽을 상대로 국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일부러 항구도시를 대폭 성장시키고 상인들을 항구도시에서만 활동할 수 있게 해 진나라가 엄청 부유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나친 과시와 과도한 민생 부흥으로 인해 국고는 비었고, 서민경제는 발전했지만 국가경제와 군사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때문에 재정 위기 전 정복한 서역과 만주에서의 입지를 위협받기도 하였으며 이런 경제기반의 흔들림은 곧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정적으로 시안 사건이 엄청 쉽게 발생하도록 한 주범이 되었다. 한편, 발전한 서민경제&문화로 인해 대부호가 나타나 새로운 지배계층이 되었고, 진나라 후기에 일시적으로 신분제가 효력을 잃기도 하였다.

한편 명나라 시기 정화의 대원정으로 얻은 강대국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동남아시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바닷길을 더 많이 개척하여 오스만의 이슬람 문화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유럽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유럽에는 전술했듯이 쇼윈도 국력으로 강대국 이미지를 많이 쌓았다. 명나라 시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은은 진나라 때부터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청나라때 극에 달하게 된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많이 약하였지만, 존속 초기엔 율령을 정비하고 개혁하는 등의 많은 정치적 시도를 하였다.

역사



명나라 말기, 정통제의 남진 천도로 베이징에 기반을 둔 왕혁이 친한 환관 두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삼관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정통제는 처형당했고 화북과 강남의 지역감정은 극도로 심해진 상태였다. 이때 토목의 변(1442)으로 베이징이 점령당할뻔 하면서 화북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이때, 베이징과 같이 초토화된 칭양에서 전호자가 동지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전운은 명 전체로 퍼져 강남에서도 여러 반란이 시작되었다.

전호자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화북 동쪽으로 정복을 추진하였으며, 곧이어 화북을 통일하고 서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4대 황제인 숙종이 남명 대신 세워진 오나라를 공격했다가 패하면서 진나라가 동서로 나뉘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숙종 사후, 뛰어난 명군이었던 세종은 동진을 합병하고 제 3~4차 진오전쟁으로 오나라를 점령했으며 하이커우 조약으로 하이난 섬에 존속해있던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며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세종은 서역을 안정시키고 만주를 정복했으며, 여러 항구도시를 발전시키고 인도네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다. 또한 이때 세워진 외교 개념이 바로 친몽배조인데, 중국 통일 전에 몽골과 화친을 맺으면서 몽골과 친하게 지내지만 진나라를 중화제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조선과는 대립하는 정책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외교정책이었으나 세종은 뛰어난 외교 조율로 친몽배조 정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세종 사후 즉위한 경종은 세종이 추진한 외교정책을 말아먹고 친몽배조 정책을 극단적으로 추진했으며, 민생에만 신경쓰고 항구도시를 사치스럽게 꾸몄으며 내치를 신경쓰지 않는 등 암군으로 통했다. 이후 과도한 친몽배조 정책과 정치적 입지의 축소로 인해 많은 몽골인들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결국 몽골인들이 진나라 정치에 개입하려고 시도한 시안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경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나라 안팎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틈을 타 단종의 숙부 전익천이 우한으로 천도하고, 북진을 멸망시킨 뒤 남진을 세웠으며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북진은 허망하게 멸망했다.

제도와 경제, 문화, 그리고 외교

진나라는 농민 봉기로 세워진 나라였기에, 당연히 민생에 치우쳤다. 예를 들어 명종은 민중을 위해 당나라의 율령 체제를 뜯어고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바로 국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세금을 가끔 내는 양세법과 모병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특히 세종 시기에는 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모여들면서 화폐, 세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직업군인에게는 최고급 은을 월급으로 주었기에 세종 재위기에 한해 군사력이 증가했다.

이후 세종은 명나라 시기 정화의 대항해로 얻은 이미지를 이용해 동남아시아와 동북아프리카에서 영향권을 행사했고, 심지어 그곳에서도 은을 사들이면서 본의 아니게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경종은 민생을 더욱 살피고 또한 유럽과의 교류에 중점을 두었는데, 유럽 사람들에게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항구도시만 엄청나게 꾸미다가 결국 국가경제가 흔들렸다. 한편 민생정책의 여파로, 국가경제랑 별개로 서민경제가 대폭 발전한다.

경종 시기 국가 경제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지배계층인 대부호들은 은을 대규모로 사들였고, 이에 뒤질세라 소상인들도 너도나도 은을 사들이면서 본격 국민의 부가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판국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때 대부호들은 은을 이용해 매관매직을 밥먹듯 했으며, 이로 인해 비어버린 대부호의 자리를 원래의 소상인이 차지하면서 소상인의 자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빈부격차가 엄청 늘어난다. 빈민들 중 한 계층인 수공업자들은 은을 받고 조각하여 다시 의뢰인에게 파는 방법으로 빈민계층을 벗어났으며, 이후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동업조합도 생겨났다. 이 여러 동업조합들은 차츰차츰 성장하여 중국 경제의 절반을 집어삼키고, 북진 말기와 남진 초기의 실질적 기득권자들이 되었다.

한편 세종 시기에 친몽배조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북부 국경의 안정화를 위해 중국 통일 전 몽골과 맺었던 화친, 또한 조선이 진나라를 중화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악화된 조진관계가 원인이 되었다. 세종 시기에는 이것을 가까스로 조율해 외교적 입지를 다졌으나, 경종은 지나치게 친몽을 하여 몽골인이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전술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동업조합들은 몽골인에게 경제적 지위를 뺏기지 않기 위해 동업조합끼리 조합을 만드는 기행을 벌여 결국 진나라의 경제망을 단 하나로 만들고야 만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몽골의 확산을 막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몽골의 한 관리 카타이가 일으킨 시안 사건이 그 예이다. 카타이는 시안으로 휴가를 간 경종의 침소에 불을 태워 경종을 암살하고, 곧이어 단종을 세우고 진나라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한다. 얼마 안가 소식을 들은 단종의 숙부이자 왕족 전익천은 우한에서 반란을 일으켜 칭양을 포위했으며, 긴 공성전 끝에 북진이 항복하고 카타이는 처형당한다. 이것이 북진의 멸망이다.

북진은 정치적으로는 허약했으나 유럽을 상대로 한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경종의 항구계획도시 설립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몽골 제국 때보다도 중국의 발명품이 대규모로 유럽에 전래되면서 대항해시대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것은 남진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타이 집권기에 보수적이었던 그는 해금 정책을 취하는 등 짧은 집권 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주 진나라를 자기 맘대로 말아먹어 버렸다. 이 때문에 해상 무역이 마비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나라와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한편 서민경제가 발달하여 자동으로 문화도 발전하였다. 송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소설과 연극 사업도 끊이지 않았고, 또한 대부호들이 자녀들을 교육계에 보내면서 교육 문화가 발전하기도 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유학은 교민학으로 역시나 민생을 위한 유학이었다.

군대

한창 명의 전성기를 이끈 선덕제의 군사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반란군에서 시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군사력을 자랑했다. 특히 세종이 명종의 군사 시스템을 다시 개정하면서 동시대 어떤 국가들보다도 막강한 군대를 손에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만주를 손쉽게 점령했다. 그러나 경종의 정치적 실책과 국가경제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군사력의 약화를 불러일으켰고 국군들은 지배계층인 대부호의 문지기 신세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은 전익천의 난에 협조하여 대부호에 맞서기도 했고, 이때 전익천에 충성한 무신들은 그대로 남진의 군대를 호령하게 되었다.

역대 황제


진나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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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묘호 연호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1대 태조 건민
(建民, 1443년 8월 15일~1457년 5월 3일)
전호자 1443년 8월 15일 1443년 5월 3일 13년 261일
2대 정종 선치
(鮮治, 1457년 5월 3일~1462년 12월 21일)
전항연 1457년 5월 3일 1462년 12월 21일 5년 232일
3대 명종 권안
(權安, 1462년 12월 21일~1469년 7월 16일)
전직안 1462년 12월 21일 1469년 7월 16일 6년 207일
4대 숙종 선양
(善梁, 1469년 7월 16일~1476년 3월 22일)
우택
(愚澤, 1476년 3월 22일~1481년 9월 15일)
전륜환 1469년 7월 16일 1481년 8월 15일 11년 30일
5대 세종 흥명
(興明, 1481년 8월 15일~1495년 11월 17일)
전성원 1481년 8월 15일 1495년 11월 17일 14년 94일
6대 경종 익원
(益元, 1495년 11월 17일~1503년 12월 5일)
전예기 1495년 11월 17일 1503년 12월 5일 8년 18일
임시 단종 서수
(曙首, 1503년 12월 5일~1505년 8월 17일)
전수탕 1503년 12월 5일 1505년 8월 17일 1년 25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