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리키아 공국 16대 공작
Vlad III 블라드 3세
본명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
Vlad III Drăculea
출생 1431년 11월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시기쇼아라
국적 왈리키아 공국
사망 1477년
부쿠레슈티 어딘가
재위 왈리키아 공작 (1차)
1448년
왈리키아 공작 (2차)
1456년~1462년
왈리키아 공작 (3차)
1476년~1447년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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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블라드 2세 드라쿨(Vlad II Dracul)
바실리사 무샤트(Vasilisa Mușat)
배우자 불명

(일설에 의하면 평민계 출신이라고 함)
주스즈티나 스질라지
일로나 넬리피크

종교 정교회
별명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블라드 디 임페일러(Vlad the Impaler)

개요

15세기, 중세 동유럽의 용공(龍公)이라 불린 블라드 2세의 뒤를 이어 왈리키아 공국의 공작으로 즉위했다. 바사라브 가문의 드라큘레스티 혈족이다.

그의 일생을 요약하면 "평생을 싸웠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서 아버지 블라드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귀족 계급과 싸웠고, 공작이 된 이후로는 아버지의 원수인 헝가리 귀족과 힘을 합해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후에는 오스만의 편이 된 동생 라두 3세와 싸웠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이복형 블라드 수도공이 정권을 잡고 귀족 친화적 정치를 펼쳤다.

동생은 오스만과 협력했고, 형은 귀족들과 손을 잡았지만, 본인은 밖으로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스만에게 맞서고, 안으로는 왈라키아의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던 귀족과 독일인, 즉 색슨족들을 탄압하며 사방에 적을 만들고 끝없이 싸우는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 덕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칭송받게 된다.

생애

유년기

시기쇼아라에서

블라드 3세의 아버지가 헝가리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이었기에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 Vlad the Dragon)이라고 불렸는데, 드라쿨은 용(드래곤)을 의미하므로 번역하면 블라드 용공(龍公)이 된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라고 하지만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형제 관계는 장남인 블라드와 차남 미르체아, 3남인 블라드 자신, 그리고 남동생 라두 이렇게 넷이었다. 1436년까지는 왈라키아가 아닌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한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색슨족들이 모여살던 '시기쇼아라'에서 자랐다.

트란실바니아는 900년 가까이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12세기부터 헝가리는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트란실바니아 남동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켰다. 이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어로 '색슨족'이라는 뜻에서 사시(Sași)라고 불렸다. 위에서 설명하는 색슨족, 즉 사시가 바로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으로 이후 수백년 동안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지배 계급으로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다른 동유럽 독일인과 다르게 추방당하지는 않았으나 공산권 붕괴 이후 대부분이 독일로 이주해서 현재 극소수 만이 트란실바니아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2017년 현재 루마니아 대통령 클라우스 이오한니스(Klaus Iohannis)가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이다.

블라드 2세가 이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가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실재로 시기쇼아라의 성벽은 당시 옛 루마니아의 성채 중 가장 견고했다. 훗날 권좌에 오른 블라드 3세는 색슨족들과 같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또다른 색슨족의 도시인 브라쇼브를 공략하는데 써먹었다.

왈리키아 공국 공작의 아들로

그가 6살이 되는 해, 그의 아버지가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블라드는 자신이 아버지를 이은 왈라키아 공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드라쿨(Dracul)+아들이라는 뜻의 단어(a)를 붙여 스스로를 드러쿨레아(Drăculea)라고 불렀는데, 이 별명이 바로 블라드 가시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결국 드라큘라(드러쿨레아)란 "용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왈리키아 공국 공작의 동생으로

그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 공의 직위를 그의 둘째 아들 미르체아 2세에게 넘기고 퇴위했다. 그러나 그의 형의 치세는 1년밖에 가지 못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후원으로 바사라브 2세가 즉위하게 된 것이었다.

볼모 생활

결국, 블라드 가시공의 청소년기인 1443년(13살), 아버지가 헝가리의 후원을 받는 정적인 바사라브 2세를 물리치고 왈라키아 공에 복위하기 위해 숙적인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게 되었고, 셋째 아들이었던 '블라드 가시공'과 넷째 아들인 '라두'가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 인질로 보내지게 되었다.

당시 왈라키아는 블라드 3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공작 라두 1세(재위: 1377~1383)의 장남 단 1세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다니스티)와 차남 미르체아 1세(이 사람이 가시공의 조부였다.)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드라큘레스티)로 갈려, 수시로 공위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발칸 반도의 두 강국인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는 왈라키아를 서로에 대한 완충지대로 인식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공작을 즉위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자다가 일어나면 공작이 교체되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또한 1436년(그가 6살)에 즉위하여 7년의 통치기간 후인 1442년(그가 12살)에 퇴위, 둘째 아들 미르체아 2세에게 자리를 넘겼으나, 1443년(그가 13살)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보이보드로 임명된 후녀디 야노시의 공격을 받고 축출되었다가, 같은 해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고 지원을 받는 대가로 블라드 3세(13살)와 라두 3세(7살)를 오스만 제국에게 보내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복위(1443 ~ 1447)에 성공했지만, 이 아버지의 2차 재임기간인 5년 동안 블라드 3세는 한 살 어린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 메흐메트(훗날 '정복자'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많은 희롱을 당했고 감옥에서 감금 생활을 당하는 등, 어린 나이에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기에 그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염세주의자가 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한다.

바르나 전투(1444)

이시기 블라드 3세(14세)는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 온 지 1년이 지난 때였고, 이곳에서 바르나 전투의 소식(오스만 승, 바르나 십자군 패)을 들었다. 이 때 블라드 3세의 형인 미르체아 2세가 이 바르나 전투에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대신 참전했지만, 큰 손실 없이 퇴각할 수 있었고, 되려 패배한 후, 도망가는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38세)를 아버지 블라드 2세와 함께 모의하여 잡아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가시공 1차 재임기, 1448(18세)

더구나 그가 청년이 된 후 동생 라두는 철저히 '골수 오스만 신봉자'가 되어 관직까지 얻게 되었고, 인질 생활을 하던 중인 1447년에 헝가리와 반대파 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아버지 블라드 2세 '용공'과 형 미르체아 2세가 참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를 얻어 왈라키아로 진군, 1448년에 공작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아버지와 형의 원수인 헝가리의 반격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도피 생활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공격으로 폐위된 뒤 블라드 가시공은 외숙 보그단이 있던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난했다. 블라드는 이 곳에서 외숙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 때 르네상스식 교육을 3년간 받으며 지냈는데 가혹한 불모생활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대부분인 그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후 거의 영구적으로 동맹 관계가 될 사촌 슈테판 3세와 친교를 쌓은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몇년 뒤 외숙부 보그단이 암살되고 몰다비아 공국이 혼란에 빠지자 블라드 가시공은 몰다비아를 떠났다.

트란실바니아에서

몰다비아에서 사라진 블라드 가시공이 다시 나타난 곳은, 헝가리의 영역인 트란실바니아였다. 헝가리에 온 그는 헝가리의 섭정이자 "기독교 세계의 방패", "백색 기사"로 불린 명장 후녀디 야노시를 찾아갔다. 후녀디 야노시는 대패로 끝난 바르나 십자군의 뒤처리 과정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인 블라드 2세와 다투었고, 결국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즉, 후녀디 야노시는 아버지의 원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블라드 3세는 그를 찾아간 것이다. 이는 가시공이 오스만 제국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보여준다. 찾아온 블라드 3세에 대한 후녀디의 반응도 놀라운데, 그는 블라드를 환대하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이 시기 동안 블라드 3세는 후녀디 야노시로부터 전략,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젊고 야심만만한 메흐메트 2세(21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성공한다.

베오그라드 공방전

1456년, 블라드 가시공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3년전의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의 성공으로 기세등등한 메흐메트 2세와 싸우려고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하는 후녀디 야노시(50세)가, 헝가리의 지원으로 공작으로 세워졌지만 오스만 측으로 가담한 배신자 블라디슬라프 2세를 토벌하고 왈라키아 공위에 오를 것을 명령한 것이다. 블라드 가시공은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 공국으로 돌아가 블라디슬라프 2세를 죽이고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녀디 야노시(50세)는 베오그라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된다.

가시공 2차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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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당시의 상황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이 즉위했을 당시 왈라키아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절정에 있었다. 15세기 유럽은 지도자 갈아치우기가 연례행사 수준으로 피가 자주 튀었고 왈라키아 공국의 공위는 허약하고 반란을 규율하는 법이 허술하기 그지없어서 툭하면 귀족들(보야르)이 공작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시해하는 하극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던 상황이었고, 경제 상황 역시 상당히 좋지 못했는데 특히 상권을 쥐고 있는 잉글랜드계와 독일계 상인들이 자기 배만을 불리고자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물건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물건을 제대로 살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왈라키아 주민들의 괴로움은 극에 달하여서, 범죄율이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난리법석에다 썩어빠진 상황에 골머리를 썩힌 블라드 3세는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계획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블라드 3세의 할아버지 미르체아 1세 이후 공작의 임기가 7~8년이면 오래 집권한 쪽에 속했고 심하면 1, 2년만에 갈려나가기 일쑤였다. 년도상으로 보면 1~2년이지, 파벌 다툼으로 인해 실제로는 2~3달도 못채우고 쫒겨나거나 죽기 일쑤였던 상황이었다.

아무튼 집권하면서 블라드 3세는 보야르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 뒤 수백년에 걸쳐 블라드 3세의 악명을 드높일 사건(그리고 드라큘라를 위시한 여러 창작매체에서 그를 묘사하는 '가시공'으로서의 사건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 블라드 3세는 잔치에 초대한 보야르들에게 지금껏 왈라키아를 다스린 공작이 몇 명이였냐고 물어보았는데, 가장 연로한 귀족이 50명이라 말했고, 대체로 30명 내지는 수십명의 공작이 왈라키아를 다스렸다고 말했으며 가장 젊은 귀족이 7명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보야르들은 새로 즉위한 블라드 3세를 능멸하고 조롱한 것으로 보이는데 격노한 블라드 3세는 이 언행에 대해 잔치에 참여한 약 500여명의 귀족들을 모조리 말뚝에 박아 죽여버리고, 관련된 다른 귀족들마저 부활절 만찬 도중 모조리 붙잡아 요새를 짓는데 보내 끔찍한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요새 축조

가시공의 치세는 성채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자신의 왕궁부터 요새급으로 증축했고, 수도 타르고비슈테의 방어를 위해 남쪽에 부쿠레슈티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

권력 강화

또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공국의 내정을 농단하면서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용공'과 형 미르체아 2세를 잔인하게 죽인 보야르들에게도 참혹한 방법으로 복수했다. 보야르를 연회에 초청하여 문을 잠군 뒤 산채로 불태워 버리거나 500명의 보야르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 하고 거기에 묻어 죽인 것이다. 관련된 생존 귀족들은 포에나리 성터로 잔치의상을 입은 채 그대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며 포에나리 성을 세웠다고 하는데, 성이 건설되는 마지막 순간엔 옷이 아주 해지다 못해 나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해, 블라드 3세는 슈테판 3세를 도와 그가 몰다비아 공국의 공위에 오르도록 했다.

또한 이 해, 알바니아의 위대한 민족 영웅 스칸데르베그(53세)가 알불레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 8만명 중, 3만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음으로서 최대의 승리을 거두었다.

악마와 계약하다

그는 가시공에 즉위한 후 자신을 배신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은밀히 자신의 성에서 비밀스러운 의식을 열어 악마와 계약을 진행했다. 악마는 가시공에게 영생과 무한한 힘을 약속했으며, 블라드 3세는 그를 대가로 자신의 사후 영혼을 넘긴다는 계약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계약은 블라드 3세가 처형당한 직후, 그 효과를 발휘했다.

사후

블라드 3세는 오스만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 참수형에 쳐해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수급은 꿀에 절여져 몸뚱아리와 함께 다뉴브 강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이 떠나간 직후에, 그가 생전에 악마와 계약한 계약서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해 영생의 몸으로서 밤의 군주, 드라큘라로 부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