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쉬덴-오덴베르의 역사

블라쉬덴-오덴베르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중세 시대에 발현되었으며, 이 당시 베일란 반도(Bailland)에 통일 국가를 수립한 에르 올르덴게르(Erng Orldengerg, 통일왕 에르) 이후로 현재까지 그의 후손들인 올르덴게르 가(Hus af Orldengerg)가 블라쉬덴의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현재의 블라쉬덴의 군주이자 올르덴게르 가의 수장은 베르진스 3세(Bērziņs III)[1]이며 오덴베르 공화국의 국가수반은 알베르스 비르베요 울마니스(Alberts Vir-Veyo Ulmanis).

중세

베일란 반도의 첫 왕조의 설립은 약 800년대 현재의 블라쉬덴 왕국의 북부 지역인 파르다쉬렌(Pargdashreng)을 기반으로 한 블라베르 왕국(Kongerigeteng Blaberg)으로서 현재 블라쉬르어로 블라쉬덴을 부르는 'Blaswiden'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초기의 블라베르 왕국은 소규모 귀족의 연합체이자 원시왕국이었으며, 처음으로 베일란 반도 전 지역을 통일하여 본격적인 왕국을 형성한 것은 '최초의 통일 국왕'이라고 불리는 에르 올르덴게르이다. 물론 그의 재위기만 하더라도 당시에 '통일 국가'라는 것은 각각 독립된 지방들의 연합체였던 베일란 반도 지역에 대해 어느정도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후계자들은 블라베르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인정되었으며, 그들 중에서 왕위를 이은 에르 세코르센 올르덴게르(Erng Sekörgsenn Orldengerg 에르 2세, 959년 ~ 981년)는 베일란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트 교를 신봉하는 국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북해 제국을 건설하던 스베인 튜구스케그(Sveinn Tjúguskegg)에 의해 일시적으로 블라베르 왕국의 왕위는 외부로 넘어갔으며, 그의 뒤를 이은 크누트 대왕(Knútr inn ríki)의 사망인 1041년까지 블라베르 왕국은 외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가 제국의 분열 이후 왕위는 다시 올르덴게르 가에르 3세(Erng III)에게로 넘어가면서 올르덴게르 가의 통치가 이어지게 되었다.

근세

블라베르 왕국은 1059년부터 1081년까지 에르 3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 동안에 한때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있던 블라쉬덴 교회는 다시 1090년경의 헤르데릭스보르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적인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1110년 이후부터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었으나, 1123년 에스트리츠 1세 (Estrits I, 1119 ∼ 1138)가 즉위하면서 국내의 분쟁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확립하려 노력했다. 또한, 에스트리츠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면서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 해의 슬라브 인들과 싸웠는데, 그 때 슬라브 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목적으로서 구축한 쉬르펜 성채가 오늘날의 블라쉬르펜(Blaswirben)의 기원이 되었다.

에스트리츠 2세 때 블라베르 왕국은 정치 및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사망하면서 다시 국왕과 귀족, 성직자 간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남에 따라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 해의 지배 및 오덴베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덴마크한자동맹오덴베르 검의 형제기사단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그 뒤 구스타우스 1세(Gustavus I)가 사망하면서 마르그레테 1세(Margrete I)가 블라베르 귀족들의 지지를 통해 블라베르의 섭정직을 차지한 뒤 동군연합 형태의 4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Kalmarunionen)에 따른 체제에 편입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에 지속적인 칼마르 동맹에 대한 왕위를 두고 내분이 발생하였으며, 결국 블라베르의 귀족들은 1523년, 스웨덴 해방 전쟁이 발발하자 올르덴게르 가호그레우스 1세(Hougrevus I)를 블라베르의 국왕으로 추대하고 독립 전쟁을 벌여, 1524년의 칼마르 동맹에서 떠나 독립하게 되었다.(블라베르 독립 전쟁, 1523-1524) 이후에 블라베르의 귀족들과 호그레우스 2세의 종교 개혁 정책으로 왕국은 개신교의 일파인 루터교를 받아들였으며, 한편으로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던 샐링르(Sælingrg)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작업을 벌였다.

오덴베르 지역은 본래 블라쉬르 왕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으나, 독일인 선교사들이 블라쉬르인을 비롯한 원주민들의 선교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북방 십자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지역 주민들을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이에 헤르만 폰 브라이트하우젠(Hermann Von Breithausen) 오덴베르 주교는 상설 군사기구인 오덴베르 검의 형제기사단(Sværdbroderordenen af Ordenberg)을 설립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오덴베르 검의 형제기사단은 우스발트 전투(Slagete af Usbalt)에서 블라베르 왕국에게 패배함에 따라 블라쉬덴 지역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오덴베르 공화국 남부에 위치한 브라운리페(Braun-Lippe) 지역에서 독립국을 선언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뒤 오덴베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하려 노력했다.(오덴베르 기사단국, 1239-1560) 그러던 중 1560년, 에스트리츠 3세가 이끄는 블라베르 왕국군이 오덴베르 지역에 대한 개신교 신자들과 국민에 대한 보호를 명목으로 침공함에 따라 대패하면서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기사단[2]은 해체되었으며, 마지막 기사단장을 칭하였던 슈트하르트 플렌보르트(Shutthard Planvorgt)는 루터교로 개종한 뒤 이미 퇴색된 기사단의 본래 목적에 대해서 세속화를 선언하여 블라베르 왕국의 속령 위치에 있는 오덴베르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이후에 블라베르는 오덴베르 지역에 대한 공작의 통치권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는 자치령 형태를 띄운 채 지금의 '블라쉬덴-오덴베르'의 기원이 되는 국가연합을 수립하였다.

근대

에스트리츠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 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블라쉬덴-오덴베르의 경제가 발전되며 및 다양한 학자를 배출하는 등 국가 번영을 보였다. 이후로 1657년에 레오폴르 플렌보르트(Leopolg Planvorgt)가 급사하면서 직계가 단절된 플렌보르트가를 두고 오덴베르 귀족들의 과두정과 올르덴게르가의 공작위 계승과의 정쟁이 벌어지면서, 3년 전쟁(1657-1660)이 발발했다. 최종적으로 상당수의 피해를 입은 블라베르 왕국군은 오덴베르의 공화정을 인정하였으며, 귀족들은 형식적으로 블라베르의 국왕을 '종신 상원의장'(Præsident for senatet)이라는 허울뿐인 직책으로서 세습직을 인정하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그 뒤 왕위를 이은 발트뤼디크 1세(Waldrhdig I)는 귀족 세력과 대립하는 도시의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1668년에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는데 몰두했다.

한편으로 발트뤼디크 2세블라베르 서인도 회사(Blaberg Vestindienk Kompagni)를 특허 기업으로서 인정하면서 서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하여 식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에 따라 블라베르령 서인도 제도(Blabersk Vestindien)가 설립된 한편, 이후에는 블라베르 아프리카 회사를 합병하여 거대 식민회사를 수립한 뒤 블라베르령 아크라(Blabersk Accra)[3]를 세우기도 했다.

1760년에는 농노제가 폐지되었으며, 1777년에는 자유 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을 제정하면서 블라쉬덴-오덴베르의 경제는 활력을 띄었다. 특히나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블라쉬덴-오덴베르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형식적으로나마 동맹국의 편을 들면서 교전 당사국들을 오가는 무역을 통해 대호황을 이루었다. 그 뒤 1814년의 킬 조약에 의해 공식적인 샐링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이후에는 기존의 장원제의 모습이 남아있던 농촌 체계를 개혁하여 자영농을 육성시키려 노력하는 한편, 당대의 국제 곡물가격이 하락세를 이루자 곡물보호관세를 채택하는 대신 값싼 농산물 수입을 통한 축산업을 증대시켰다. 이는 소농들을 중심으로 낙동협동조합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농업부흥운동이 추진되면서 각종 민중운동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현대

각주

  1. 참고로 올르덴게르 가의 수장은 오덴베르 공화국의 종신 상원의장을 세습한다.
  2. 우스발트 전투 이후에는 사실상 세속화되어 지역 군주로서의 명맥으로 이어졌으며, 군사 기사단(Militärische Ordnung)이라는 의미가 퇴색되고 본래의 구호 목적이 강해졌다. 이후에는 영주의 지위에 해당된 기사단장은 플렌보르트가(Hus of Planvorgt)가 세습하게 되었다.
  3. 지금의 가나 공화국 중부 해안 지대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