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조베폴레 대훈장 수훈자 (Vp RZP in 1671)
에세르 왕국 섭정
체르베니도모프 백작
에세르 왕국 제6ㆍ7대 국가재상
"에세르 왕국" 이민족 왕립 자치령 총독
에세르 사회당 제5대 당수 제1서기
마가드 대학교 정경대학 법학부 명예교수

Viktor Dočkal
빅토르 도치칼
출생 1634년 4월 13일 (38세)
에세르 가르카
거주지 에세르 슬루네치니체 궁전
국적 에세르 에세르
현직 에세르 제7대 국가재상
에세르 왕국의회 제7대 의원
마가드 대학 명예교수
임기 임시 국가재상
1671년 1월 16일 ~ 1671년 9월 24일
제7대 국가재상
1671년 9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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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다그마르 도치칼, 어머니 즈덴카 코호우트코바
형제자매 없음
배우자 샤르카 가이도쇼바(Šárka Gajdošová)
자녀 1녀
학력 에세르 에세르 국립 마가드 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부
아델베르트 카스텔부르크 대학교 법학과(유학)
에세르 에세르 국립 마가드 대학교 정경대학 대학원 경제학 국가관료편입과정(석ㆍ박사 조기졸업)[1]
종교 씨앗교
소속 정당 에세르 사회당
의원 선수 14
의원 대수 2,3,4,5,7
약력 사회당 전국청년위원장
사회당 대변인
사회당 부대표
에세르 민족의회 2ㆍ3ㆍ4대 의원

빅토르 도치칼 (Viktor Dočkal)은 에세르의 정치인이다. (만)17세에 마가드 대학을 수석 조기입학하고 그란치프 국립대학과 키르수스 아델베르트 카스텔부르크 대학에서 유학한 지식인이며, 1660년에 에세르 사회당에 입당하여 당 소속 전국 청년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온건적인 노동 운동을 진행하였으며, 이후 부대표와 사회당 대표직, 왕국의회 의원직과 민족의회 의원직을 골고루 역임하다 1670년 혁명 이후로 정치활동을 중단하였으나 1671년 헌정이 재개된 이후 관선 총리직에 올라 임시안정내각을 이끌었으며, 8개월간 재임끝에 1671년 8월 전국선거에서 사회당 대표로써 압승을 거두어 정식 제7대 총리직에 올랐다.

초년

1634년 4월 13일 에세르 동부 가르카(Garca)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으며, 자치령 시절 민족의회 부의장과 그란치프 자치령 에세르 상공장관을 역임한 귀족 다그마르 도치칼(Dagmar Dočkal, 1600~)과, 마가드 대학교수 어머니 즈덴카 코호우트코바(Zdeňka Kohoutková, 1605~) 슬하에서 외동으로 자랐다.

17세이던 1651년에 에세르 최고의 명문국학인 마가드 대학에 수석 조기 입학하였으며, 2년만에 뛰어난 성적과 연구실적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았다. 1655년 2월 마가드 대학에서 빅토르는 1년간 연구활동에 매진하다 문득, 그란치프 제국을 패배시킨 강대국 키르수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키르수스 제국의 수도인 카스텔부르크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마가드 대학교 정경대학 학장으로 근무하던 어머니 즈덴카 코호우트코바 교수는 아들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

그가 태어난 가르카는 그렇게 잘사는 도시가 아니었다. 수도에서 굉장히 먼 거리에 있었으며, 정부 지원을 제때 받기가 힘들었다. 에세르의 경제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상대적으로 시골이었던 가르카의 사람들은 더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그런 가운데 그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발생했다. 그와 어릴 적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했던 사촌 안토닌 도치칼(1632~?)이 1662년 민족의회의 사회당 급진파 청년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반정부 활동 내지 급진적 노동 활동을 이어가자 1663년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상대적 지식인이었던 빅토르는 사촌 안토닌이 노동활동을 하다 실종된 뒤, 유학까지 다녀온 자신이 사촌의 정의로운 활동에 동참하진 못할 망정 그의 실종에서도 무기력하게 있어야 했던 점, 그런 자신이 에세르 사회의 지식인이라는 사실에 극심한 회의를 느끼고 정치로 뛰어들게 되었다.

사회당 시기

그란치프 전쟁 후 급진적인 태도로 일관한 의원들은 인민전선으로,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한 자치령 민족의회 의원들은 사회당을 창당하여 훗날 왕정 건국후 왕국의회와 민족의회 양원에서 의석을 얻었다. 빅토르는 인민전선보다는 사회당에서, 안정적인 체제를 지향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기로 결심했고, 1660년 2월 경 에세르 사회당에 입당했다. 얼마 안가 그는 8월 경 사회당의 초대 대표였던 다니엘 체이카(Daniel Čejka)를 만나 그의 지지를 받으며 전격 스카우트되었다. 먼저 그에게 주어진 첫 역할은 전국청년위원회 위원장직이었고, 빅토르는 이 직책으로 활동한 3년 간 사회당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당세를 끌어올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1663년 10월 5일부로 빅토르 도치칼은 사회당 대변인이 되었다. 절제되고 신사적인 용어, 그러나 매서운 맹점으로 사회당의 인식을 보다 젊고 강한 당으로 만들었다. 그는 게파르토가 에세르를 지배하는 등 사회당에 입당했던 시절보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게파르토를 피해 다니며 게파르토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게파르토의 지배정책을 "인간이 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라고 비난한 빅토르는 1666년 1월 경 대변인에서 한 계단 올라 사회당 제1부대표로 영전했다.

빅토르는 사회당 수뇌부, 그리고 새 왕국정부와 합의하여 왕국의회에도 사회당을 진출하기로 했다. 1669년 치뤄진 선거에서 왕국의회 기준 사회당은 건국 전부터 쌓아온 영향력과 지지에 힘입어, 에세르당에 이어 원내 2당 그리고 민족의회로는 원내 1당을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했다. 1660년대 후반을 지나고 에세르 왕실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사회당의 급진파 의원들은 빅토르 도치칼의 체제 긍정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빅토르에게 왕정 반대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라고 요구했는데, 빅토르는 공식적으로는 "당의 존속에 위협이 된다"며 얼버무렸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사회당 내에서도 급진 분파들이 다수를 차지할 염려때문에, 궁극적으로 당이 지향하는 활동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거부했다.

결국 사회당 급진주의 과격파 의원들은 1670년 1월에 인민전선으로 떠나가 당의 의석 수가 줄어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정활동을 진행하였으며 그의 괄목할 만한 의지와 함께 당은 되려 독립 이전보다 5배 성장했다. 그 와중에 7월 사건이 일어났고, 빅토르는 급진파 의원들을 무시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1년뒤인 1671년 8월에 치뤄진 전당대회에서 빅토르 도치칼은 마침내 사회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 정경대학과 자연과학대학 등 4개 단과대학의 대학원의 석ㆍ박사 과정인 국가관료편입과정을 수료한 대학원생은 행정고시를 치르지 않고 즉시 6급 고위 공무원으로 영전 편입하여 근무할 수 있다. 대신 그만큼 과정 입학은 각 단과대학의 수석과 차석급만 허용되며 이 역시마저도 졸업이 대단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