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합전쟁(일명 제1차 한일전쟁)
三國聯合戰爭 War of the Triple Union

삼국연합전쟁에서 전사한 강호국 병장(왼쪽), 최하늘 소령(가운데), 이나비 중사(오른쪽)
날짜2030.7.23 ~ 2030.12.24
장소한반도 전역
결과 북중일 삼국연합 승리.
대한민국: 울릉군,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창원시 진해구 상실 및 인명피해로 인한 극심한 인구 부족 현상 초래. 휴전선 10 km 이상 후퇴
교전국
🇰🇷 대한민국 🇯🇵 일본
🇨🇳 중국
🇰🇵 북한
지휘관
🇰🇷 이재영   🇯🇵 오다 요시히토
병력
🇰🇷 750,000명, 함정 17척
(정규군 600,000명, 민병대 150,000명)
🇯🇵 1,000,000명, 함정 30척(정규군 800,000명, 민병대 150,000명, 한국 군단[1] 50,000명)
🇨🇳 330,000명, 함정 7척
🇰🇵 550,000명
피해 규모
🇰🇷 군인, 민간인 총합 22,000,000명 이상 사망

🇯🇵 군인 50,000명 전사, 민간인 50,000명 사망
🇨🇳 군인 18,000명 전사, 민간인 13,000명 사망
🇰🇵 군인, 민간인 총합 1,000,000명 사망

총합: 1,040,000명 사망

개요

동백 유니버스에서 일어난 전쟁 중 하나. 모티브는 파라과이의 삼국동맹전쟁.

발단

2027년, 한국에서는 다함께민주당의 이재영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부동산 개혁을 시행하여 폭락한 부동산을 매입, 국민들에게 재분배했는데, 이는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부동산 개혁이었다. 또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상품의 국제 유통을 감시하는 등, 여타 아시아 국가와 달리 엄격한 계획경제, 보호무역 정책을 수립해 2년 쯤 뒤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서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한국은 부의 재분배 덕분에 극빈층이 없고 기근도 분쟁도 없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야심만만한 이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한국은 자기를 아니꼽게 보던 일본과 중국, 그리고 북한 이상 이웃 3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거기에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이 대통령은 사실상 섬나라인 대한민국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당시 내전 중이던 북한 '자유조선' 반군을 지원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2029년 6월 23일 일본에서는 오다 요시히토[織田義人]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아베 신이치[阿部眞一] 전 총리가 암살당한 후, 서서히 힘을 얻은 극우파의 거물이자 일본회의 소속으로, 자위대의 상당수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소년들은 노숙자를 덮치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회사가 도산해도 정치가는 “개혁을 위한 통증”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오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늘어갔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오다를 바라보던 일본인들은 차츰 자기도 모르게 그의 편을 들게 되었고, 고속도로를 놓는다 무기공장을 짓는다 하여 국민을 일터로 밀어붙이니 차츰 실업자가 줄게 되었고 일본은 온 나라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군대가 되고 말았다.

재군비를 선언한 오다는 순식간에 군대를 수백만으로 늘리고 전쟁물자를 무제한으로 생산해내는가 하면 전쟁 물자를 나르기 위한 고속도로를 놓는 등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자 지금까지 설마설마하던 한국에서는 비로소 전쟁이 터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의 정세와는 상관없이, 그 해 12월 5일에는 대한민국의 GDP가 일본을 추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의 의존에서 벗어난 덕분이었다. 오다가 정권을 잡은지 1년도 안되어 일본은 다시금 세계최강의 군대를 갖게 되었고 한국은 이에 맞서 경쟁적으로 군대를 키우게 되니 이제 두 나라가 부딪혀 전쟁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오다가 이 대통령의 반군 지원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 정규군을 지원했고, 결국 오다의 도움을 받은 정규군이 승리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이에 자유조선은 이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도움을 요청받은 이 대통령은 일본에 북한 개입을 멈추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 자신의 요청이 무시당하자 이 대통령은 일본 군대를 북한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북한 내전에서 조선노동당을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이 대통령은 중국에게도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이에 자연스럽게 북한, 일본, 중국이 한국에 대항하는 연합을 결성하면서 후에 1차 한일전쟁으로 불릴 삼국연합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원래 한국이 일본과 사이가 안 좋음.

2) 북한은 일본의 지원으로 친일 성향의 정부가 들어설 분위기가 되었다.

3)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게 "그만 간섭해라." 라며 경고했지만 묵살당하자 일본에게 선전포고.

4) 게다가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나아가 영토 확장 및 대륙 진출을 위하여 한국은 북한에게도 선전포고.

5) 한국이 북한을 쳐들어가기 위해서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연히 중국은 거절함.

6) 이에 한국은 "감히 내 부탁을 안 들어줘?" 라며 중국에게까지 선전포고.

7) 결국 선전포고를 당한 3국가는 연합하여 한국을 침공했다.

경과

전쟁은 예상 외로 끔찍하게 흘러갔다. 국군의 방어가 동쪽과 북쪽에 집중된 틈을 타 일본이 옛날 인천상륙작전처럼 인천을 기습공격했는데, 인천이 함락되어 국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부천에서 국군은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고 연합군 진지까지 들이닥치는 데 성공했지만 중국 기갑사단의 기습 공격이 성공해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포위당하게 되며 전멸에 이르렀다.

부천 전투에서 참패한 후 이 대통령은 패배를 직감하며 종전협정을 맺고자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어찌 3국의 분노는 잘 가라앉혀놔서 협상장에 이끌어냈고 이 대통령은 9월에 종전협상을 하고 한국의 패전을 인정하면서 종전후 자신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는 형식의 종전평화협정에 사인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협상직전 3국 연합간의 비밀협상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1)3국 연합의 구성원 중 혼자 한국과 단독 강화로 배신 금지.

2)이재영 대통령, 대한민국 정부, 군부 핵심인사는 무조건 사형.

3)대한민국 독립은 보증.

일본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이 비밀협상 내용을 안 이 대통령은 격분하여 바로 협상을 깨버리고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며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대통령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사형에 처하는 식이었다.

삼국연합 역시 한국을 재기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화생방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우선 서울의 25구에 핵무기 1발씩이 투하되었고, 주요 도시에도 핵무기와 생화학무기가 투하된 바 있다.

그리고 11월, 북서울 꿈의숲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탈출한 후 같이 포위망을 탈출한 병사들이 지원병을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 측 총사령관 다카하시[高橋]가 병사 몇 명만 데리고 이 대통령 앞에 나타나 "신변을 보장해 줄 테니 항복해라." 하고 마지막 제안을 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전에 했던 대통령령과 똑같이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라 외치면서 다카하시에게 덤벼들었고 결국 바로 사살당했다. 이렇게 이 대통령이 전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남성 인구의 95%가 사망하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했는데,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108만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다못한 미국과 유엔의 중재로 한국과 일본은 1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결과

이재영 이후의 한국 정권은 주로 베이징에 망명을 가있던 망명자 집단이 세웠다. 그들은 이재영을 연합군과 전쟁을 한 미친 독재자로 여겼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세웠다.한편, 한국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일본 군대는 전쟁이 끝난 2030년부터 2036년까지인 6년동안 한국에 더 머물러 있다가 물러났다.

전쟁중에 파괴된 한국의 마을들은 버려졌고,살아남은 농부들은 서울의 변두리로 이주해서 중부지방을 자급농업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지역들은 외국인(주로 중국인)에게 매각되었고, 사유지가 되었다. 한국의 산업 시설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이재영 대통령의 후임으로 이나연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달이 지나 북한의 선공으로 시작된 제2차 한국전쟁에서 승전하여 통일을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독도와 울릉군은 물론 부산, 울산, 창원시 진해구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고 인구는 5300만 명에서 2200만 명으로 엄청나게 감소하였으며, 이 여파로 경제도 붕괴되었다.

특히 인구피해가 극심했다. 전후 한국의 성인 남성 인구는 108만 명이었고 거의 모두 전쟁으로 앙상한 뼈와 총상, 자상만 남은 해골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남녀 성비 1:18이라는 극악의 비율이 완성되어 그나마도 남은 남자는 생식력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나 아주 늙은 노인뿐이고 성인이나 청소년 남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설상의 아마존 여인국이나 마찬가지인 삼국동맹전쟁 이후 전세계사 최악의 여초 성비 불균형으로 기록되었다. 한국으로서는 남자가 너무 없어서 다급해져 차별받던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도 국민으로 우대하고 끌어들여 혼혈이라도 이루게 했고, 이들에게 행하던 차별 탄압 정책도 폐지했다. 심지어 한일전쟁 전후 복구작업에 돈벌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주로 동남아, 인도, 중동 출신)에게까지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국적을 받고 남아서 제발 한국 국민으로 살아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 회복이 다급했다. 이때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은 약 4,400만명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이주민들에게 꽤 관대하게 대하고 혼혈도 잘 이뤄졌다.

인물들에 끼친 영향

'오늘'

한편 삼국연합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가 뿌리째 흔들렸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려시의 새 시장으로서,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유권자들의 권리와 필요를 위해 싸우는 동안 전쟁 중인 세계를 항해하는 것의 거대한 도전들과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오늘은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녀의 도시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그녀는 지역 사회 지도자들, 활동가들,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도시가 폭풍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 있는 지원의 연합을 구축했다.

오늘은 그녀가 직면한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정의, 평등, 인간 존엄성의 원칙에 대한 그녀의 헌신을 확고히 지켰다. 그녀는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유권자들을 위한 지원과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결국 오늘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한려시는 오늘의 지칠 줄 모르는 옹호와 지도력 덕분에 비교적 상처받지 않고 전쟁에서 벗어났다.

'3무궁화'의 주인공들

오다가 이끄는 함대는 독도를 향해 나아갔다. 주변국인 중국과 러시아에는 각각 센카쿠 열도와 쿠릴 열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침공을 묵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군에서도 용감하게 맞서 싸웠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3명의 용사가 있었다.육군의 강호국 병장, 해군의 이나비 중사, 공군의 최하늘 소령이었다. 강 병장은 훤칠한 키에 수염이 텁수룩하게 온통 얼굴을 뒤덮은 모습이 흡사 장비를 연상케 하는 험상궂은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인품은 좋았던지 사람 좋은 털보 신사로 불리우는 육군 소총부대의 병장이자 배틀수트[2] 조종사였다. 싸움터에서는 '전장의 치우'라 불리며 많은 적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중사는 병약한 이미지에 - 이런 이미지를 고치려고 해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 고운 얼굴에 몸집도 조그마하고 말소리도 가느다란 마치 수줍은 여자같지만 - 이름마저도 여성스러웠다 - 아주 머리가 좋아 - 동서고금의 지식을 전부 암기하고 있을 정도 - 언제나 자기들의 함정에서는 많은 귀염과 사랑을 받아 오던 해군 부사관이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함장 옆에서 작전을 제시하는 참모로서 종군했다. 한편 최 소령은 키는 보통이지만 떡 벌어진 어깨가 마치 씨름 선수가 아니면 유도선수를 보는 느낌이 드는 늠름한 몸집에다 성격도 활달하고 매사를 맺고 끊는 듯 절도 있는 생활이 몸에 밴 공군 장교였다. 이들 세 용사는 저마다 용감하게 싸우다가 영토 수호와 조국의 평화를 위하여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하는 딸만을 남겨둔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갔었다.

한편 제2차 한일전쟁의 주무대가 될 창원에서는 15년전 용사 3명의 뜻을 잇는 3송이의 무궁화가 피어난 것이었다. 강호국 병장의 딸 아미(통칭 예쁜이), 이나비 중사의 딸 보람이, 최하늘 소령의 딸 이슬이가 그들이었다.

이 세 어린이는 비록 만날 수 없는 아버지지만 저마다 자기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이들의 어머니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슬픈 나날을 보내어오다가 어린 딸들을 데리고 창원으로 들어왔는데, 이 세 어머니가 우연히 한 동네인 도계동으로 이사오게 된 것이었다. 원래 도계동 일대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2022년 의창구청이 이전한 이후로는 점점 발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신 시가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이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어 아이나마 착하고 훌륭하게 자라는 걸 지켜보면서 살리라 다짐을 했다. 세 모녀들은 같은 날 한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하여 친 자매들처럼 서로 도우면서 의좋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타

구작에서는 일본만이 상대였기에 한국이 어떻게든 막아내는 형태로 승리하였으며, 통일은 위기를 느낀 남북한의 결의로 이루어졌다.

  1. 이재영 정부의 전복과 신정부 수립을 위해 이재영에게 반대하여 외국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로 일본 소속으로 활동했다. 전쟁 후반에는 생포한 국군 포로들을 강제로 부대에 집어넣기도 했다.
  2. 동백 유니버스의 인간형 전투 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