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장강 이남의 중국 대륙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는데 이들이 중원을 지배한 것은 약 600년 전 금나라시절 화북 지역에 한해서였으며, 장강 이남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강 이남은 화북 지역과 달리 강과 산악 지형이 많아서 청군의 최대 전력인 기마병을 활용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누르하치, 홍타이지와 같은 청나라 지도층도 화북을 지배했던 금나라 재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중국 전체를 제패하는 것까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순식간에 장강 이북을 차지했음에도 명의 잔존 세력을 추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당시 청나라의 실세인 도르곤 역시 이러한 이유들로 남진을 주저했다.
한편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망했지만 남은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경과 광동에서 각각 칭제한 후 명나라의 계승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본래 명나라는 남방에서 시작한 왕조이기에 정강의 변으로 급히 쫓겨온 남송보다 비교적 나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화북에만 머무른다면 다시금 남북조시대 또는 남송 시절처럼 장강을 경계로 장기간 양국이 대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조의 신하였다가 청조에 귀순한 홍승주는 남명을 놔두면 커다란 후환이 될 것이라고 도르곤과 순치제에게 계속 상주했고, 결국 청나라는 남명을 정벌하기로 한다.
전술했듯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몽골족들은 남방의 지리에 무지했기에 오삼계를 비롯한 한족 항장들과 그 휘하의 한족 병사들이 남방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다. 청나라 측은 이들을 아예 자치권을 가진 번국의 임금인 번왕(평서왕 오삼계,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으로 봉했는데 중국사에서 한고조이래 공신이라도 황족이 아닌 신하를 "왕"으로 봉한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후대에 못지 않게 이들은 만주족의 중국 대륙 장악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청에 망명하면서 데려온 수군과 홍이포 전력 덕분에 청나라는 명군의 강력한 화력에 같은 화력으로 맞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 심지어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천혜의 산해관 문을 열어준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다.
만주족은 지리에도 어둡고,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풍토병이 많은 장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병력인 만주병과 몽골병이 아닌 한족 출신 번왕들과 그 휘하 세력을 활용하기로 한다.
항장 출신 번왕들은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남명을 철저히 공략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이 멸망하면서 그나마 남은 주씨 황족들과 명나라 잔당들은 모조리 소멸한다. 청나라는 해당 번왕들이 정벌한 지역들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에 운남성과 귀주성는 오삼계에게, 광동성과 광서성은 상가희에게, 복건성은 경중명에게 귀속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이이제이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이렇게 만주족은 한족 출신 항장들과 그 세력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남명을 포함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제압했고, 차후 재발할 수 있는 한족들의 저항과 외부 세력의 침공에 대비하면서도 청나라 편에서 공을 세운 한족 인사들을 후대할 겸 그들에게 번왕의 직위를 내려 남방 지역의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케 했다.
그러나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 중심인 청나라에게 제국 내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강대한 한족 세력들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 예로 삼번은 청 조정의 허가 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직할 병력을 증강하거나 세수 지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적극적 상행위로 부를 축적했고, 번 내부의 인사 뿐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각 성들의 인사권에도 줄곧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삼계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운남 일대의 소수민족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평시에도 경정충이나 상가희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고,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운남과 귀주에서는 청 조정의 인사권보다 오삼계의 인사권이 중시되었다.
여기에 남송 시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장강 이남의 경제력이 장강 이북의 그것을 능가함에 따라 삼번의 경제력도 청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미 삼번의 한 곳인 광동성의 마카오는 개항되어 있어서 서양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더욱이 장강 이남은 명나라 시절 농민 반란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에 명청교체기 당시 피폐해진 화북에 비해서 경제가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청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함부로 번을 폐지할 수도 없었다. 전술했듯이 해당 번왕과 그 세력들은 명청교체기에 청나라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명분 상 하루아침에 박대할 수 없었고, 만주족 중심의 청나라 중앙군은 장강 이남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으며, 당시 삼번의 군대는 대다수가 한족으로 소수인 만주족의 병력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 아니라 남명과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얻은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게다가 당시 장강 이남은 반청감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방 지역의 통제력을 구축한 번을 폐지하려다가 되려 반청복명세력들이 겉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로 청나라 조정은 남명이 완전 진압된 지 한참 지난 1664년에도 남명 토벌을 위해 설치한 삼번을 폐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반란 직후, 강희제가 내려보낸 운귀(운남, 귀주)총독 감문혼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운남, 귀주 양 지역에서 황제가 임명해보낸 총독의 명을 받드는 관료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오삼계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총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는 상황에 빠져버리자 절망하고 가족들과 함께 자결했다. 그만큼 운귀 지역은 수십여 년 동안 오삼계의 통치를 받으면서 철저한 오삼계의 세력이 되어버렸다. 강희는 팔기군을 형주(荊州),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호북성 강릉에 보냈다. 순승군왕(順承郡王) 늑이금이 영남(寧南)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패륵 찰니(察尼), 도통 각라주만, 호군 통령 이이도재 등 만주 팔기를 진격시키며 늑이금은 출발하면서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라 큰소리를 쳤다.
한편, 철번을 위해 내려왔다 간신히 반란군의 손길을 피한 관료들이 반란 11일 만에 중국 남쪽 곤명에서 수도 북경까지 밤낮없이 내달리는 처절한 레이스 끝에 반란 사실을 보고하자 청 조정은 멘붕에 빠져 철번을 주장한 관료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철번을 물리고 오삼계에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했다. 강희제 본인도 설마 오삼계가 진짜 실력 행사로 나올줄은 예상 못해 당황했으나 이내 곧 침착을 되찾고 조정 내 화의파를 닥치게 한 다음 반란 토벌을 선언하고 반란 토벌의 격문을 띄웠는데 그 내용은 "오삼계 네놈은 명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애초에 명을 멸망시키는 데 앞장선 놈이 네놈 아니었냐? 네놈은 명에게도 반란군, 우리 청에게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다."로 오삼계의 대명의 복수라는 논리를 완전히 논파했다.
그러나 전쟁은 말 싸움으로 되는 게 아닌 법이다. 1674년 초, 오삼계는 직접 군을 이끌고 호남과 호북으로 진격하여 총병관 체세록을 생포하고 정부군을 격파하며 순식간에 장사를 점령하고 호남을 휩쓸며 강서성으로 가는 길목을 열고 북으로는 무창에 이르렀다. 뒤이어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마저 오삼계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강희제는 내응을 우려하여 북경에 있던 오응웅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을 재정비하고, 경정충과 상가희에게도 급히 사신을 보내 "내가 어리고 우둔하여 조금 경솔했다. 철번은 취소하니 너희들이 계속 다스려라."라며 철번을 취소하며 두 번의 반란 가담을 막고자 했다. 동시에 명에서 투항한 항장들 다수가 각 지방의 총독, 순무를 맡고 있어 반란에 줄줄이 합류할 가능성이 보이자 역시 칙령을 내려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충성하여 반란군 토벌에만 전념하라고 격려하며, 오삼계의 반란이 삼번의 반란이나 반청 복명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674년 3월, 결국 정남왕 경정충이 근거지 복건에서 반란에 가담, 절강, 강소 두 성까지 휩쓸고 대만 동녕 왕국의 지원까지 받기로 하면서 상황은 강희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서남과 촉에 국한되는 게 아닌, 화남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란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사천 지방이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삼계는 사천에서 한중을 거쳐 중원으로 나아가는 북벌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섬서 총독 왕보신이 반란을 막기 위해 온 조정 중신과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섬서성 대부분이 오삼계군에 떨어지고 서안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한편 광동의 상가희의 경우 상황이 복잡했다. 전략적, 지리적 측면에서 상가희의 광동은 서쪽으로는 오삼계의 운귀 지역, 동쪽으로는 경정충의 복건, 북쪽으로는 오삼계가 점령한 호남에 둘러싸여 청 중앙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또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가희는 철번 명령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강희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철번을 진행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던 호부 상서 양청표 등 조정 인사들은 상가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오삼계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상가희가 조정 인사들과 만나자, 양청표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서 위의 철번 취소령을 말해주고, 강희제가 상가희를 깊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반란 자체에도 회의를 가졌던 상가희는 이를 계기로 조정 편을 들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상가희는 결국 강희제와 청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는 상주를 올려 강희제를 기쁘게 하였다. 상가희가 청에 충성한다는 것은 삼번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평남왕과 광동군의 군사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백전노장 오삼계에 맞서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어 연전 연패 중인 무능한 지휘관들과 달리 군력에서 오삼계와 맞먹는 상가희를 맞수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주변 지역 인사권, 군사권, 단독 작전권을 모조리 보장해주고, 상가희가 원하는대로 차남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광동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상가희는 본래 장남 상지신을 후계로 하려고 상주를 올렸다가 전란의 와중에 상지신에게 실망하여 차남 상지효를 새 후계로 삼고 강희제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상지신은 마침 상가희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동의 전권을 장악하고 오삼계와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상가희는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자체는 가족들이 발견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의 유언도 '황제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죽으니 큰 허물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엔 혼백이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 라며 강희제에게 충성한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로서 강희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삼번의 동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1673년 조선의 선종은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북벌을 준비했다. 조선은 근대에 이르러 청이 대륙 방면에서 고전하는 사이 요동을 공략하여 막대한 영토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는데, 이번에도 청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동안 요동 깊숙이 진격하여 장악하고자 하였다. 1675년이 되자 선종은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강희제는 오삼계군의 중원 진출을 막기 위해 서북 전역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무위 대장군 도해(圖海)를 임명했다. 도해는 한중을 넘어 진격해온 오삼계군을 격퇴하는 것과 동시에 감숙성의 반란군 거점 평량을 함락했다. 또한 반란에 가담한 섬서 총독 왕보신을 온갖 지극정성으로 회유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상황을 참작한다며 설득한 끝에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이 화북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며 중원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복건의 경정충을 이탈시키기 위해 절강성을 향한 집중 공세을 계획했다.
이처럼 강희제는 중국 대륙의 서부와 남부에 몰려있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조선의 요동방면 진출에는 초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요동에서 조선군은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몽골의 구원병력마저 격퇴하며 산해관 일대까지 이르렀다. 또한, 조선의 수군은 산동성과 산해관 남방에서 상륙과 교란을 일삼으며 엄청난 양의 수급을 취하였는데, 초기 1년 동안 조선군은 수급 5만의 성과를 올렸다.
결국 1676년이 되어 강희제는 상지신과 경정충을 압박하던 청군의 상당과 무위 대장군 도해를 다시 불러들여 조선으로부터 북경을 지키도록 해야했다. 이로 말미암아 상지신과 경정충은 세력을 다시 키울 수 있었고, 오삼계의 군은 다시 한중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했으며, 왕보신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러던 중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으나 청군은 이를 미리 알고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강희제는 수세에 몰리게 되어 군을 멀리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1677년이 되면 산해관이 조선군에게 함낙되며 북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으며 더욱이 삼번의 진압은 지체되었다.
1678년에 이르러서 오삼계는 장강 이남과 관중을 장악하여 국호를 주(周, 오주), 연호를 소무(昭武)로 하고 1678년 3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8월, 달랑 5개월동안 제위에 있다가 노환으로 죽었다.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오삼계를 이어 주의 2번째 황제에 올랐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오삼계가 죽으면서 막강한 오삼계군의 유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형주 일대에서는 오삼계 휘하의 장수였던 진서가 무리를 이끌고 나와 명나라 부흥군을 일으켰다. 이에 남경 일대에서도 서연형이 봉기하여 청군을 몰아내고 명나라 부흥을 주창하였으며 흥업제의 황손인 주도제가 합류하여 황위에 올랐으며, 서연형은 월왕에 봉해져 실권을 행사했다. 진서 또한, 주도제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서연형을 마땅치 않게 여겨 스스로 송국공을 자칭하여 세력을 불렸다.
1679년부터 월왕 서연형은 조선의 지원을 받고 삼번에서 몰려온 한족들과 옛 명나라 장수들을 영입하여 세를 빠르게 불려갔으며, 이내 절강성 일대에서 경정충의 군대를 대파하고 화친을 맺어 남계를 안정시키고 북벌에 나섰다. 북벌에 나선 동안 숙주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1681년까지 산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초석 산지를 장악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과 거래하여 막대한 물자를 비축하고 총병을 양성했다.
송국공 진서는 청군과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형주를 장악하고 오주를 다시 촉땅으로 밀어내기 위해서 분투했다. 실로 오삼계 사후에 주나라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장수들이 진서에 투항하여 막대한 병력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아래로는 경정충, 상지신의 군대와 싸워 승리하여 강서와 광동으로 진출하였다. 나아가 진서는 상국인 월나라도 공격하였는데, 서연형을 상대로 파양호 일대에서 수군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대신 건흥제(주도제)에게 직접 송국공의 작위를 하사받았으며, 서연형도 이 시기부터 몸을 사리고 월국공으로 자신을 낮추어 진서의 눈치를 보았다.1675년부터 조선 선종은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사하여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요하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도록 했으며,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치닫고 산동을 점거하는 등 조선의 체급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전쟁과 토목공사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조정 내부에서는 왕의 폭정을 멈추어야 한다고 거듭 신하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이에 1678년, 선종의 동생이었던 경성대군을 위시한 조정 관리들이 들고 일어나 선종을 끌어내렸다. 즉위한 조선 고종은 즉시 조선 수군에 이르러 전쟁을 멈추도록 하였고 육군에 이르러 산해관 밖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679년에는 천리장성의 길이를 축소하여 급히 마무리 짓도록 하였으며, 청나라와 강화에 나섰다.
1679년 조선으로부터 강화 요청을 받은 강희제는 즉시 이에 응해 요양에서 화약을 맺어 요하 동쪽의 모든 땅을 조선에 할양토록 하였다. 이 땅들은 모두 청나라와 여진족의 신성한 고토였으나, 강희제는 일단 화북을 안정시키고 이후에 조선을 공략하여 되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화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조선군은 산해관 인근에서 모두 철군하였으며 청나라는 동북면의 위협을 종식시키고 오로지 강남의 반군 토벌에 신경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대륙의 일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월공국을 뒤에서 지원하며 명 왕조의 복권을 기도하고 있었다.
요양에서 맺은 화약의 결과로 청군은 다시 남정에 나설 수 있었으나, 팔기군을 포함한 만주족의 사기는 고토를 잃고 심히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지원을 받은 남명군의 공격과 한족의 반란에 산동에서도 패퇴하면서 사실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만주를 잃으면서 몽골 민족도 서서히 청의 복속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청나라의 내분은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희제는 장수들과 팔기를 독려하여 고토를 되찾을 것이라 약속하고, 몽골 민족을 열심히 회유하여 제국의 틀이 유지될 수 있도록 불철주야로 노력했는데, 그 결과 1684년에는 다시 남정에 나설 수 있게 준비하였다.
그 사이 오주의 군세는 더욱 악화되고 내분이 지속되어 관중에서는 차지승이 실권을 잡고 독립하면서 주나라는 다시 한중 아래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차지승의 군세는 관중을 평정하고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이에 불가피하게 1685년 허창 일대에서 강희제의 청군과 차지승-진서의 군세가 조우하게 되었는데, 팔기의 정예병력과 조정군의 화력에 차지승이 사로잡히고 진서는 무한까지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청나라는 이 시기부터 서쪽으로 진군해 차지승 휘하의 땅을 모조리 흡수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한중을 장악해 주나라의 군세가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막았으며, 양양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장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다만 월공의 군세는 맹렬하고 화기도 넉넉히 갖추어 청의 팔기로도 공략이 쉽지 않아 후방을 약탈하고 수세적인 위치에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1687년까지 산동 일대를 제외한 모든 화북지역이 청나라에게 다시 수복되면서 어느정도 안정기에 이르게 되었다. 강희제는 더욱 매섭게 군세를 몰아서 송공국을 먼저 멸망시키고자 하여 대규모 남정을 계획하였다.중원에서 청나라와 남명이 서로 싸우기를 계속하는 동안 중앙아시아와 서몽골 일대에서는 오이라트부가 다시금 강성해지고 있었으며, 1623년 몽골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하게 되었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 중 칭기스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예를 자칭하던 호쇼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가고 잔존 오이라트는 1640년 청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준가르 칸국을 세웠다.
갈단은 준가르의 첫 홍 타이지인 바투르(Bātur)의 둘째아들이며, 원래 승려였으나 아버지의 후계자 및 형인 셍게가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피살당하자 환속해 준가르를 평정했다. 그 전까지 홍 타이지의 칭호를 쓰던 갈단은 이전까지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을 정복하며 준가르를 통합하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홍 타이지를 거쳐 '보쇽투 한'(Bošoqtu Xān)의 칭호를 받았다. 갈단은 한때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던 경력 및 고승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로 공인받은 인연으로 티베트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혔다.
1688년에 외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이 일어나자 갈단은 이를 틈타 청나라령 외몽골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청군은 중원에서 남명을 상대로 총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일에 전혀 신경쓰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몽골 고원의 서부는 준가르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고 타타르부에 속한 많은 민족들도 준가르 아래로 흡수되면서 청의 군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몽골 방면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강희제는 대규모 남정 계획을 폐기하고 준가르를 토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강희제는 몽골 고원에서 몽골 기병들의 배반과 보급 문제로 대패하기에 이른다. 갈단 한은 몽골 기병들에게 잡혀 온 강희제를 타림 분지까지 끌고 가서 처형했다.
몽골 원정이 실패하고 황제가 죽자 청은 크게 흔들렸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몽골 부족들도 준가르 아래로 들어갔으며, 팔기도 와해되어 오직 만주족만이 청군에 남아 있게 되었다.
1690년이 되어서 준가르는 서량 측면에서 중원으로 진입하였는데, 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관중을 다시 잃었다. 준가르는 관중을 기점으로 옛 차지승이 가졌던 지역을 모조리 장악하며 세력을 공고히하였다. 일부 타타르부는 준가르에 복종하긴 했지만, 독자적으로 청에 반기를 들고 산서성을 점령했으며 원나라를 자칭하였다. 몽골고원 동부에 자리잡은 세첸부와 일부 여진족들은 우량이라 자신들을 이르며 조선의 비호아래 세력을 키워 러시아와 원나라를 견제하였다.
차지승 휘하의 장수였던 부민평과 송효정은 청의 번국으로 관중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준가르가 부상하여 동진하자 싸우지도 않고 동쪽으로 달아났는데, 하남에 이르러 초왕을 참칭하고는 송, 월과 화친을 맺어 남명 정권에 의탁하면서도 청의 번국으로 버젓이 행세하며 하남의 이권을 장악했다. 청나라 휘하에서 장수로 있던 민극재, 하첨, 동재계 같은 이들이 초나라에 합세하면서 청 조정은 이들은 달래면서도 위협적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