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성흥 16년[1] 수도권 행정구역 개편은 경기남도,경기북도를 해체하고 수도권일대를 2도 1부의 형태에서 7부의 형태로 개편하고,외곽지역들을 주변도로 편입시킨 일련의 행정개편이다.
배경
대한제국이 성장하고 그 수도이자 아시아 최대의 도시인 한성이 비대해지며 이를 경기지역에 분산할 목적으로 제도 신도시 계획에 따라 다수의 신도시들이 건설되며 경기남도,경기북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1970년 기준 경기남도의 인구는 800만,경기북도의 인구는 700만을 넘어섰고,수원,성남,용인,개성등 일부도시들의 인구는 여타 부들에[2] 육박하며 부로의 승격요구가 나오고있었고,당시 박정희 내각은 이 두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대책으로 경기남도,경기북도의 해체안을 내놓았다.
내용
개성부 신설
개성은 과거부터 대도시였던고로 수도권의 인구가 증가하며 이미 단독으로 150만 이상의 인구를 가졌고,이를 통해 여타 도시들의 편입없이 단독으로 부로 승격되게되었다.
양주부 신설
양주시와 파주시는 둘다 각각 인구가 60,80만 정도였고,이 두도시와 동두천시까지 통합하여 양주부를 신설하였다.
명칭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 양주시는 양주가 세도시의 중앙에 있는점과 전통성을 고려하여 양주부를 주장했고,파주시는 인구에서 동두천과 양주를 합쳐도 파주의 인구에 이르지 않는데 파주부가 되어야한다 주장했으나 최종적으로 양주부가 명칭으로 정해졌다.
안양부 신설
당시 한성부 남쪽에는 시흥시,안양시,군포시,의왕시등 중소규모의 시들이 난립해있었고,이때에 이들을 모두 통합해 안양부를 신설하였다.
성남부 신설
분당신도시가 건설되며 이미 80만이상의 대도시로 성장한 성남이었고,이를 중심으로 동쪽의 광주시와 통합해 성남부를 신설하였다.
이곳또한 명칭에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광주시는 과거 성남은 광주에서 떨어져나간 도시이므로 통합되면 광주부가 되야한다 주장했고,성남시는 인구가 성남시가 월등히 많은점,광주라는 지명이 이미 전남,외지등에 존재하는점을들어 성남부가 되어야한다 주장했다.최종적으론 성남부로 결정되었다.
수원부 신설
수원은 과거부터 경기남부의 대도시였고,구 경기남도청또한 수원에 위치했었기에 이미 인구가 100만을 넘은 대도시였다.
과거 떨어져나갔던 화성시,오산시를 재통합하여 수원부가 신설되었다.
용인부 신설
용인시는 본래 큰도시는 아니었지만,대규모 신도시 조성에따라 인구가 9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용인시와 동쪽에 이천시까지 통합해 용인부가 신설되었다.
한성부 부역 확장
의정부시,남양주시는 합하여 부를 형성하기에 인구가 부족했고,동쪽의 군들은 인구밀도가 너무 적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타 지자체에 편입이 결정되었는데 최종적으로 한성부로의 편입이 결정되는데 양주부나 성남부로의 편입은 행정효율상 좋지 못할것이 예상되었고,강원도로의 편입은 지역내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북부의 황해북도 편입
당시 개풍시와 연천군은 당초 개성으로의 편입이 검토되었으나 개성의 관할구역이 지나치게 비대해진다며 관료들의 반대가 컸고,이들을 강원도로 편입하자니 지역내 반발이 우려되었고,결과적으로 황해북도로의 편입이 결정되었으나 이마저도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부의 강원도 편입
동부의 포천군,가평군,양평군,여주군은 생활권또한 춘천,원주와 연계되기도 했어서 강원도로의 편입에 반발이 적었고,결과적으로 강원도로의 편입이 실행된다.
남부의 충청남도 편입
당시 남부의 평택군과 안성군은 인구밀도가 적던 소도시에 불과했고,이들을 수원이나 용인에 편입하는건 무리라 판단,인근의 충청남도로 편입되게된다.
여담
당초 강경히 정부정책을 밀어붙이던 박정희내각의 성향과달리 지역내 반발을 의식하며 실행한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당시 군부정권에대한 반대여론이 확산하던 상태였고 이것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가 전개될것을 우려한것이란 견해이다.[3]
- ↑ 1970년
- ↑ 부들의 인구가 대부분 200만을 넘기는 지금과 달리 당시의 부들은 인구가 150만이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 ↑ 실제로 이계획이후 4년만에 대규모 시위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