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모로코 전쟁
Spain–Morocco War
Guerra España-Marruecos
الحرب الاسبانية المغربية
西班牙-摩洛哥战争
날짜
2002년 7월 18일 ~ 2002년 8월 29일
장소
스페인령 세우타와 페레질 섬, 멜리야 지역, 모로코 탕헤르테투안을 포함한 북부 스페인 국경지역 및 카사블랑카 근교, 가르브슈라르다베니흐센 등 북부 지역과 우에드에드다하브라구이라를 포함한 모로코 남부 서사하라
원인
2002년 7월 11일 모로코군의 스페인 페레질 섬의 무단 점령과 RMN(모로코 왕립해군)의 스페인 공군기 및 순시선 선제 공격
결과
스페인의 승리와 모로코의 항복, 스페인의 탕헤르, 테투안 지역 점령, 팅기타나 지역에 비무장지대 설치,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 독립, 서사하라에서 MINURSO의 철수, 아랍연맹 對 스페인 석유 수출 금수조치
영향
스페인 내 급진적 애국주의, 민족주의 세력의 전국적 확산, 마그레브 지역의 스페인 영향력 강화, 알 카에다의 모로코 내 영향력 증가와 포함한 이슬람 근본주의 및 알 카에다 세력의 확산, 모로코 왕실의 反 세속화, 전유럽적인 아랍 및 무슬림 이민자에 의한 소요사태 급증, 유럽연합-아랍연맹 무역분쟁
참전국
스페인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
모로코
지원국
북대서양 조약기구
-
프랑스 공화국
포르투갈 공화국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모리타니 이슬람 공화국
-
아랍 연맹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자마히리야국
영국


지휘관
후안 카를로스 1세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
모하메드 압델라지즈
모하메드 6세
압데라만 유수피
병력
40,720명
10,240명
11,124명
피해 규모
스페인군 448명 사망 및 1,311명 부상, 폴리사리오 전선 839명 사망 및 1,045명 부상, 스페인 해군 갈리시아급 카스티야함 1척 손실, 산타 마리아급 호위함 나바라와 누만시아함 전손, 상륙정 및 CH-47 치누크 헬기 다수 손실
스페인 민간인 367명 사망 및 110명 부상(스페인 국내 이슬람 소요사태 포함), 멜리야와 세우타 내 대규모 재산피해 발생
모로코군 1,013명 사망 및 2,280명 부상, 모로코 왕립해군 및 왕립공군 괴멸
모로코 민간인 400명 사망 및 2,400명 부상(모로코 측 집계), 사라위족 분쟁지역 내 모로코인 강제이주

개요

스페인-모로코 전쟁(또는 제3차 모로코 전쟁, 또는 제2차 아프리카 전쟁)은 2002년 7월 18일 모로코 측이 불법 점거한 퍼레질페레질 섬으로 향하는 스페인 군을 공격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2002년 8월 29일, 스위스와 프랑스, 터키 정부의 중재해 휴전까지 1개월하고 이틀간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스페인군은 448명이 죽었으며, 폴리사리오 전선은 839명, 모로코군은 1,013명이 사망했으며 전쟁 초기 모로코군이 세우타와 멜리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민간인 약 200명 가량이 죽거나 다쳤고, 모로코 또한 전쟁 동안 수도 라바트와 카사블랑카에 대한 공습과 포격으로 인해 민간인 수천 명이 죽고 다쳤다. 또한 전후 서사하라 내 사라위족 거주 지역에서 모로코인에 대한 강제이주가 이어졌다.

스페인과 모로코의 전쟁은 포클랜드 전쟁 이후 20년 만에 이루어진 유럽 국가와 비유럽국가 간의 해외 영토에 대한 분쟁으로 인한 전쟁으로 패전국인 모로코 왕국에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피해를 남겼으며, 모로코의 反 세속화, 反 서방화를 가속하고 알카에다의 마그레브 지역에 대한 영향력 증가로 이어졌다.

한편 사라위족은 수십 년간 이어진 투쟁 끝에 이 전쟁으로 독립 국가 건국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를 두고 지원한 스페인과 모리타니의 뜻과는 달리, 미국의 경우 서사하라에서 확보한 독점적인 자원 개발 사업에 대한 지위가 스페인에 의해 빼앗기면서 자연히 미국과 스페인 간의 관계는 1세기 전과 같이 경직되었다.


배경

세우타와 페레질섬

페레질 섬(스페인어:Isla de Perejil, 아랍어:تورة, 로마자:Tūra)은 스페인 본토에서 13.5km, 세우타에서 8km 떨어져 있는 0.15㎢ 면적의 작은 바위섬으로, 프레질 섬 자체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 모두 평소에는 잘 접근하지 않는 섬이다.

페레질 섬은 모로코 측의 주장에 따르면, 모로코인이 염소 목축을 하는 장소라고 주장하지만, 섬은 오랜 기간 거주 인구가 없는 무인도였으며, 모로코인들 또한 대부분 페레질 섬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세우타 해안의 바위섬을 확보하기 위한 모로코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간주되며, 오히려 모로코와 스페인 양 국가에서 페레질 섬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다름 아닌 2002년 모로코군이 불법적으로 섬에 군사기지를 세우면서였다.

1415년, 현 모로코의 전신인 마리니드 술탄국으로부터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면서 이때 함께 인근 바위섬들을 점령했다. 164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제국에서 다시 분리되었을 때 세우타는 스페인령으로 잔류했다.

2002년 7월 11일, 모로코군은 불법 이민과 밀수 등의 감시를 명목으로 페레질 섬에 기지를 점령하면서 사태는 시작되었다. 모로코 왕립헌병 소속 군인 12명이 무장한 상태로 섬에 상륙했다.

모로코측 군인들은 모로코 국기를 게양하고 그곳에서 기지를 세웠다. 스페인 해안 경비대의 순시선은 정기적인 순찰을 위해 세우타에서 페레질 섬에 접근했고, 선원들은 모로코 국기가 게양된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처음 모로코 국기를 발견한 과르디아 시빌(스페인 민방위) 측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섬에 하선했지만 섬을 점거 중인 모로코 군인들과 대치했고 모로코 왕립헌병이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스페인 군인들이 물러나 배로 돌아가면서 대치 상황은 끝이 났다.

스페인의 지속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모로코는 불법 이민과 마약상 및 밀수업자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지를 세운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스페인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그곳에 있던 헌병대는 일시적으로 섬에서 철수했지만 6명 규모의 모로코 해병대로 대체되었다.

모로코 순시선이 이 지역에 배치되어 차파리나스 제도 근처에서 기동 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스페인 또한 세우타와 멜리야에 호위함 1척, 초계함 3척, 잠수함 1척을 배치해 대응했다.

페레질 섬 주변으로 순찰선 3척이 섬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주둔하면서, 지원군을 섬 내의 고립된 스페인 전초기지로 보내졌고, 상황이 악화되자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José María Aznar) 스페인 총리가 모로코의 점거 시도를 스페인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즈나르 총리가 이끄는 스페인 정부의 경고 후, 모로코는 왕립해군 생도들로 주둔 병력을 대신한 다음 섬에 영구적으로 군사기지를 설치했고 이것은 스페인 정부가 다음 단계의 대응을 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이러한 페레질 섬 위기에 대해 유감 성명을 발표한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제외한 유럽 연합 전체는 스페인 정부를 전적으로 지지 했다. 모로코의 페레질 섬에 대한 주장은 아랍 연맹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 한편 알제리는 세우타와 멜리야, 그리고 그 영해에 대한 스페인의 주권을 재차 인정했다. 2002년 7월 18일 아침, 스페인은 페레질 섬을 탈환하고, 모로코군을 축출하기 위한 군사적 행동으로 로미오-시에라 작전을 시작했다.


로미오-시에라 작전

2002년 7월 18일 아침, 스페인은 페레질 섬을 점령한 모로코군을 축출할 목적으로 로미오-시에라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은 스페인 특수부대인 GOE(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특수작전그룹)에 의해 수행되었다.

4대의 쿠거 헬기가 28명의 스페인 특수작전군을 섬에 상륙시켰고 전체 작전은 지브롤터 해협에 정박한 상륙함 카스티야 함의 스페인 해군에 의해 지휘가 이루어졌다. 스페인 공군은 F-18과 Mirage F-1 전투기를 배치해 모로코 왕립 공군의 개입을 대비했다.

페레질 섬에 착륙해 스페인 국기를 계양한 스페인 GOE

스페인은 초계함 1척과 순시선 2척을 포함해 섬에 정박 중인 모로코의 엘 라히크 함을 압박했다. 승무원은 무기를 준비하고 스포트라이트로 착륙을 방해하는 데서 그쳤다. 무혈 작전으로 예상됐던 로미오-시에라 작전은 큰 이변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페레질 섬에 있던 모로코 해병대는 섬으로 접근을 시도하는 스페인군 헬기에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모로코군 진지가 사격을 개시하자, 스페인 헬기가 이에 대응하여 모로코 진지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처음 이루어진 교전에서 양측이 이미 사상자를 낸 뒤에도 스페인 특수작전군은 전진하여 모로코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스페인 특수작전군의 선두 분대가 섬의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전투 헬기 편대가 모로코 진지에 사격을 개시했다.

기습적인 사격으로 인한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특수작전군이 모로코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우위를 점하자 모로코 측은 라바트로 섬을 포기하고 항복, 또는 철수할 것을 요구하지만 모로코 군 수뇌부는 섬을 포기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해안에서 모로코 포병이 페레질 스페인 진지를 향한 공격을 목적으로 페레질을 마주한 해안을 따라 포병이 집결되고 준비했고, 섬 반대편에 있던 마지막 모로코군 해병대가 기관총과 박격포를 포함한 중화기로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로미오-시에라 작전을 위해 출격한 스페인 공군의 EF-18기가 해안의 모로코 포병을 공습하자, 해안에 있던 현장의 모로코군 지휘부는 자신들이 스페인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보고했고, 3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페레질 섬의 모로코군은 모두 스페인 GOE에 투항했다.

페레질 섬 전투의 결과로 양측 모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직후 세우타와 멜리야 인근에 집결한 모로코 포병이 세우타와 멜리야, 페농 드 벨레즈 드 라 고메라에 포격을 가하면서 페레질에서의 전투 이후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페레질 섬의 함락 이후 모로코 포병은 스페인군의 공습이 재개되기 전 섬을 향해 공격했다. 모로코군의 포격은 섬 전체를 향해 막대한 피해를 남겼고, 섬을 떠나는 스페인군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레질 섬 전투가 라바트로 전해졌을 무렵, 모로코의 모하메드 6세는 긴급회의에서 각 부처 장관급을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어떤 내용의 논의가 오갔는지는 불명이나, 모하메드 6세 국왕은 세우타와 멜리야를 공격해 점령할 기회라는 입장과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스페인은 틀림없이 모로코와의 분쟁 지역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함으로써, 이는 엄연한 모로코 주권과 모로코 영토에 대한 침략이었으며, 무엇보다 세우타와 멜리야 등, 아프리카의 스페인 영토들은 NATO 조약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이로써 NATO가 개입할 실질적인 명분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모로코 군대가 스페인의 도시를 공격해 점령하더라도 운이 좋다면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물론 세우타와 멜리야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스페인 영토이며, 이에 대한 모로코의 공격과 이에 따라 스페인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피해는 어쩌면 NATO의 개입을 부른다는 지적은 전쟁 직전 상황의 낙관론과 격양된 감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세우타와 멜리야를 포함한 스페인 영토에 대한 모로코군의 포격이 끝나자, 현장에서는 해군 군함의 순항 미사일을 포함한 지원이 요청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 후세마스 제도와 차파리나스 제도를 포함한 스페인 섬을 지나는 스페인 이지스 호위함이 목격됐다.

페레질의 상황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교전 없이 양측의 분쟁이 해결되는 대신, 이제 섬에 대한 스페인과 모로코의 공방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상황은 단순한 국경분쟁에서 전쟁으로까지 비화하여 갔다.

하루 뒤인 7월 19일, 아즈나르 총리는 페레질 섬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스페인군은 사상자 없는 무혈 작전을 목표로 삼았고, 교전 규칙에 따라 모로코군이 발포할 경우에만 대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고, 모로코군의 선제적인 공격에 대응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전쟁으로 확전될 경우 사라예보에서 SFOR 사령부는 미연의 사태를 대비하여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의 파병 병력 모두를 무장 해제하고 주둔하기로 결정되었다.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스페인 파병 또한, 잠정적으로 철수를 하는 방향으로 논의되었다.

마드리드의 증권 거래소는 증권 붕괴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오후 20일 12시 15분에 완전히 중단된다. 이러한 조치는 스페인이 단순히 제한전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나타내는 주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양측이 교전을 중지하고 전쟁을 멈출 것을 호도했지만, 그간 수많은 가톨릭 국가와 이슬람 국가 간의 분쟁이 그러하듯 정중히 무시되었으며, 교황청의 이러한 입장은 오히려 몇몇 이들에겐 종교 전쟁에서 어떻게 교황이 전쟁 중지를 내세울 수 있느냐는 불평으로도 이어졌다.

전개

모로코의 두 도시 침공

스페인 해군 소속 산타 마리아급 호위함이 세우타를 포위한 모로코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이 명확해지자, 스페인과 모로코 양쪽은 대사와 외교관을 추방하고 대사관을 폐쇄했다. 이러한 조치 이후에도 모로코 내에서는 유럽 국가들의 대사관으로 몰려든 항의성 시위와 폭동 등의 소요사태가 수차례 발생했다.

카나리아 제도를 포함한 스페인 남부 지역은 페레질 전투 이후 경계 경보가 발령되었다. 이에 대해 카탈루냐의 분리주의자들은 반발하였으나, 모로코와의 무력 충돌이 시작된 시점에서 그러한 불만은 스페인 정부에게 재고될 가치가 없는 불만이었다.

스페인 최고사령부는 페레질 섬 전투 이후 세우타 주변의 모로코군이 헬기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여단급 병력을 배치했고 이와 더불어 모로코 공군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에 대한 정보를 이날 오전 파악했다.

세우타 지역으로의 모로코 군사 병력의 추가적인 증원 배치와 이전의 페레질 섬 전투에서 얻은 스페인의 판단은 모로코가 이미 세우타와 멜리야 등, 스페인 영토를 공격할 준비가 완전히 되었고, 그럴 의지가 있다면 숫적 우세를 갖춘 모로코군을 선제 타격하는 것이었다.

처음 프랑스는 유럽연합과 NATO에서, 그리고 마그레브 지역에서의 자국의 외교적 입장을 고려해 비공식적으로 위성을 통한 정찰 자산을 제공했고, 이를 통해 대규모의 모로코 군대가 세우타와 멜리야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사실들은 스페인 군 수뇌부와 정부가 모로코를 향한 선제 타격을 개시할 명확한 원인이 되었고, 아즈나르 총리는 세우타를 향한 명백한 전쟁 위험이 닥친 시점에서 모로코를 향한 공격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산타 마리아급 호위함 2척이 세우타를 향하는 모로코 군대를 향해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 라바트의 모로코 사령부는 스페인이 순항미사일발사를 포착했고, 모로코 영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여 공군을 통한 반격을 지시했다.

모로코 왕립 공군은 스페인군과의 교전을 위해 이륙 명령이 내려졌고, 모로코 공군 기지는 스페인 함대와 세우타와 멜리야, 현지 스페인군 병력과 기지에 대한 공습을 위해 출격했고 머지않아 모로코 공군 편대가 스페인의 세우타, 멜리야 지역으로 향했다.

모로코 공군의 F-16 편대가 세우타와 멜리야, 그리고 두 도시에 있는 스페인군 기지를 공격했다. 스페인 해군 공모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는 모로코군이 스페인의 방공망을 피해 기지로 돌아가고나서 함재기를 출격시켜 맞대응했다.

모로코 공군의 공습 이후 스페인 호위함은 공격이 시작된 가장 가까운 모로코 공군 기지를 향해 세 개의 순항 미사일을 발사했고, 모로코 공군의 공습 이후 스페인 남부의 해협에 국한되어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고, 이후 스페인 전역으로 경보는 확대되었다.

카디즈 만에서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와 해협 공군 사령부에 예하의 모든 스페인 공군기지는 모로코 북부 지역인 팅기타나 방면으로 공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지브롤터 해협으로 향해있던 2척의 호위함은 추가적인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세우타와 멜리야에서는 모로코군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전면전으로 사태가 악화될 수 있으므로 도시 전체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도시 내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군대는 모로코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 모로코군은 야간에 세우타 시내 중심을 향한 추가적인 포격을 가했고, 세우타와 멜리야는 모로코군의 포격으로 발생한 폭발과, 뒤이은 스페인 해군 호위함의 대응사격으로 인한 폭발이 뒤섞여 세우타 내에서의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20일 낮 동안 잠시 양측의 공격은 소강된 모습을 보였으나 해가 지면서 모로코 왕립공군의 미라지 전투기 편대가 세우타를 공습하기 위해 접근했다 1기가 격추당하며 물러나고, 다수의 포격이 가해지고, 다시 새벽 동안 스페인 해군의 미사일 공격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오전 동안 서로에 대한 공습과 포격이 잠정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동안, 워싱턴에서 스페인 대사는 미국 국무부에게 페레질과 세우타를 향한 모로코군의 공격이 이루어진 사실과, 스페인의 무력 투사가 정당방위의 영역임을 전했다.

그 직후 워싱턴에서 모로코 대사는 미국 국무장관과 접촉하여 스페인 공군과 해군이 모로코 땅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스페인과의 무력 충돌을 중재해달라는 요구를 전하나 미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이에 답변하지 않았다.

21일 새벽, 다시 시작된 양측의 서로를 향한 공습에 지브롤터 해협 너머 카디즈 시에서도 폭음이 선명하게 들렸고, 해안에서 모로코 군함이나 전투기가 나타났다는 불확실한 소문까지 돌았다. 스페인의 주요 방송국에선 본토가 공격받을 위험과 그 가능성에 대한 방송이 연이었다.

스페인 사회는 레콩키스타가 막을 내린지 5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세력에 의한 본토 침공을 앞두고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전국민적인 동요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모로코와의 분쟁 관련 보도를 21일 아침부터 전면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해협의 스페인 해군에 접근하는 모로코 군함과 대치 끝에 벌어진 교전으로 모로코 측의 미사일정 3척이 스페인 해군에게 격침당했지만, 호위함 누만시아의 측면이 대함미사일에 공격받았지만 누만시아는 선체 측면이 파괴되었어도 모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은 오전 아침부터 스페인과 모로코 해군이 해협에서 교전중이며 세우타나 또는 탕헤르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서로의 위협을 다소 과장하여 발표하였다. 모로코 왕립해군은 1척의 초계정과 3척의 미사일정을 상실하고 해협에서 물러나야 했다.

스페인 군 사령부는 모로코군의 공습 범위가 지브롤터 해협 넘어의 스페인 본토로까지 확장될 수 있으므로 스페인 내에서 전시를 선포할 것을 정부에 주문하였다. 한편, 아즈나르 총리는 사태가 전쟁으로 불거지자 사임하려 했지만 비상상황에서 최종적으로 반려되었다.

세우타와 멜리야, 페농 드 벨레즈 드 라 고메라 내의 스페인 군경은 방어를 위한 준비를 거의 끝마쳤고, 모로코군은 도시 외곽에서 몇번의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교전과 도발을 해왔지만 도시 진입까지는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행동했다.

모로코군이 직접적으로 스페인 영토를 침공하는 것은 스페인으로 하여금 국민적인 감정, 즉 과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과 미국의 충돌이 흡사 황인과 백인의 문명간 전쟁으로 비화됬듯, 크리스천과 무슬림의 종교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정치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에서 스페인의 두 도시는 완강히 저항할 것이며 모로코군의 승리는 스페인 본토의 별다른 지원 없이는 큰 출혈을 감내하면 성공적일 것으로는 점쳐졌지만, 그러한 완강한 저항에 부딪힐 시가전은 여전히 모로코군 내에서 우려되는 점이었다.

세우타의 전투 지역에서 호위함대는 지난 밤 동안의 전투 이후 공격을 멈추고 모항으로 돌아가고, 그 사이 또 다른 호위함이 오는 동안 벌어진 공백은 모로코군으로 하여금 세우타를 포위하고 있는 군대로 도시를 기습하기엔 좋은 기회였다.

그간 스페인과 모로코는 서로를 향해 집중적인 포격과 공습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그간 이루어진 서로의 공격은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제한적인 공습과 포격만이 허락되었고, 상대의 전쟁 능력을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다.

카디즈만에서 알바로 데 바잔 함은 18일부터 들려오던 참전에 대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22일이 되서야 공모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를 포함한 대규모 스페인 해군 함대 기함으로 카디즈만에서 나타났다.

이제 유럽의 주요 관심사는 지브롤터 해협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 이후 두 도시의 운명에 대한 것으로, 포클랜드 전쟁 이후 유럽과 비유럽 국가의 전면전으로서 머지않아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까지 전투에 대한 뉴스와 소문, 관심들이 집중되었다.

지난 해전 이후의 상황을 군에게서 통보받은 모로코 정부는 도착하는 스페인 함대와 함께 스페인 영토에 대한 공군을 통한 공격을 승인하게 되고 가용 가능한 모든 모로코 공군의 주요 공군전력은 모로코 북부 지역으로 집결해 재배치되기 시작한다.

2002년 7월 22일, 모로코 왕립공군은 대규모 편대를 세우타와 멜리야를 공습하기 위해 이륙하기 시작했고, 세우타와 멜리야를 향하는 F-5 편대에 대한 흐릿한 항공사진과 함께 모로코군의 두 도시에 대한 침공은 더욱 명확해졌다.

F-5와 잔여 미라지 편대가 세우타, 멜리야를 공습하고, 남은 모로코 공군의 주요 전력인 F-16을 포함한 모로코 공군 전력은 모로코를 향해 접근하는 스페인 함대를 막는데에 투입했다. 스페인 함대가 스페인 도시의 스페인 군대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로코군의 대규모 육상 병력이 멜리야를 우선적으로 향하는 모습을 프랑스의 위성을 통해 포착한 스페인 공군은 스페인 남부 해협의 공군기지와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용 가능한 모든 공군 자산을 동원해 모로코군의 진격을 막도록 명령한다.

22일 공습을 끝내고 스페인 공군이 도착하기 전 작전지역을 탈출하는 모로코군을 끝으로 세우타와 멜리야로 모로코군은 더 이상 공군을 통해 공습하지는 않았으나, 탈출한 미라지 편대는 재급유와 대함미사일을 싣고 스페인 함대를 향해 다시 출격해야 했다.

모로코군은 대함미사일로 접근하는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지만 모든 미사일이 요격되며 공격은 실패했다. 거의 대부분이 동원된 모로코군대는 세우타와 멜리야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스페인은 두 도시가 모로코군의 공격으로 방어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로코군의 F-16과 미라지 편대가 접근하는 스페인 함대에게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7월 23일 2차 해협 해전이 개시되었다. 모로코 공군은 함대를 호위하고 있는 스페인 공군기의 숫적 열세로 초기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철수했던 스페인 공군이 되돌아오면서 처음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의 함재기와 교전중이던 모로코 공군에게 반격했고, 모로코 공군은 이 전투에 투입한 전투기 약 30여대 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해당 전투에서 격추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유일한 모로코 공군의 이득은 스페인 해군의 주요 전력인 알바로 데 바잔급 이지스 호위함에 경미한 피해조차 입히지 못했지만, 나바라함의 레이더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 철수시킨 것이었다. 2차 해협 해전으로 모로코군은 스페인 함대의 움직임을 최대한 묶어두었다.

나바라함은 첫번째 미사일 공격에 피격당하며 8명의 승무원이 사망하고 레이더 장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에서 이탈하는 동안 두번째 대함미사일 공격에 직격당하며 19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입고나서 전투 지역을 빠져나갔다.

멜리야 전투 직후 탈출하는 수송기를 통해 전사자들의 유해가 스페인 본국으로 다

모로코 육군은 자국 공군과 해군이 질적,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함대를 막는 동안 세우타로 도착하기 전 속히 점령하는 것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스페인 사령부는 예정대로의 지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력으로 도시를 지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스페인과 모로코 공군의 교전에서는 모로코의 초기 우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의 해리어는 대응과 알바로 데 바잔급의 지원으로 머지않아 멜리야 시 외곽부터 모로코군이 진입하기 시작했을때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남부 해안 도시에서는 해협에서의 전투 이후 큰 피해를 입고 돌아오는 누만시아함이 수평선에서 포착되며 전쟁의 영향이 스페인 본토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하여 도시를 탈출하는 행렬이 길게 형성되기 시작하고, 멜리야에서는 몇몇 민간 여객선으로 탈출이 이어진다.

살아남은 10대 남짓한 모로코 전투기가 전투 지역으로부터 모두 퇴각한 후 2차 해협 해전의 공중전이 마무리되고, 생존한 나머지 모로코 군함들 또한 스페인 함대를 피해 남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스페인 공군은 지상의 모로코 방공망에 대한 짧은 공습을 끝으로 철수했다.

지브롤터 해협 전투

멜리야를 향해 포격하는 모로코군 자주포

2002년 7월 24일, 모로코는 해협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침공을 개시했다. 모로코 포병은 세우타와 멜리야로 포격을 시작하고 자주포와 방사포를 이용한 포격으로 세우타, 멜리야의 군사 진지 뿐 아니라 민간 건물까지 포격의 대상이 되며 수십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스페인 공군 전투기는 북부 모로코 전역의 방공 시스템 전반에 대한 공습을 준비하고, 그 사이 멜리야 시 외곽에서 모로코 지상군과 스페인군, 경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스페인 군단을 세우타와 멜리야로 배치해 두 도시에서 탈출하는 이들을 원호하기로 한다.

모로코 육군은 멜리야 외곽에서부터 진격하기 시작했다. 6시간 전 모로코 육군의 총공격을 앞두고 멜리야 공항에 앞다투어 민간인과 관광객들이 탈출한 뒤 폐쇄된 공항은 이제 멜리야 공항은 모로코군과 스페인군의 주요 격전지로 변하였다.

멜리야에서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랍 연맹은 긴급 회의를 개최하는 한편, 벨기에 브뤼셀에서 NATO 또한 마찬가지로 NATO 각국이 소집되어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전쟁에 대한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다.

미국, 영국과 이탈리아는 전쟁과 관련된 경제적 문제를 고려, 빠른 휴전을 처음에는 외교적인 목표로 하였으나, 회의 중 모로코군이 멜리야를 향한 "결정적인 공격"에 나섰음이 보고되며 나토는 스페인을 공격한 모로코에 대한 공동 대응을 결의하게 된다.

해협에서의 공중전에서의 전과를 보다 과하게 부풀린 모로코의 최초 선전물이 국제적으로 발표되었으며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의 모로코계 이주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집단적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이에 대항하는 스페인 내 급진적 우익주의자들이 나타나 대치한다.

알제리 남부의 사라위족 난민촌에서는 스페인 해군이 모로코의 해군과 공군력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모로코를 향해 진격중이라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알제리와 모리타니의 경우 전쟁 상황이 서부와 남부로까지 확대될 시 이를 통해 모로코를 압박할 판단을 세운다.

현장의 모로코군은 멜리야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완강한 저항과 좁은 거리에서의 시가전은 숫적인 약간의 우세를 제외하면 모로코군을 압도하는 스페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것이었다.

처음 몇번은 여전히 제공권을 갖고 있는 모로코 공군의 공습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륙의 탕헤르에 본격화된 공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스페인 공군을 견제하느라 멜리야로의 공군 지원은 겨우 하루가 지나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격 이튿날인 24일, 스페인군은 외곽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저항했지만 모로코군의 추가적인 증원과 포격에 점차 초기 방어선을 포기하고 뒤로 빠져나갔다. 한편 도시 북쪽의 해안 절벽까지 모로코군은 우회하여 점령하는데에 성공했고 스페인군은 더욱 전선에서 밀려났다.

스페인군이 연이어 퇴각하기 시작하자, 현장의 모로코 장교단은 낙관적인 미래 예측을 포함하여 멜리야를 향한 공격이 거의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라바트로 전했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 달랐다. 대규모의 스페인 외인부대인 라 레히온 병력이 멜리야와 세우타로 증원되었다.

버진 드 라 빅토리아 거리까지 스페인군은 철수해 방어선을 세우는 동안, 새로 증원된 라 레히온 병력이 멜리야에 새롭게 배치되면서 모로코군은 도시 다운타운까지 진주하였지만, 다시 강한 반격에 부딪히면서 삽시간만에 모로코군의 공세가 돈좌되어갔다.

한편 멜리야에 남은 민간인은 25일을 끝으로 모두 배를 통해 도시를 탈출했다. 같은 날 스페인 잠수함대는 남쪽 카사블랑카 방면에서 움직이고 있던 모로코 해군 함대를 공격해 침몰시켰고, 모로코 해군은 이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정박한 군함들은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

모로코 해군 사령부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뒤, 남아있는 군함마저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군함이 정박중인 항구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26일과 27일 동안 탕헤르로 스페인군은 갈리시아급을 포함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위한 병력들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아랍 연맹은 스페인의 모로코 침공을 비난하고 모로코에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몇 분 후 NATO는 스페인 영토를 침공한 모로코를 비난하는 유사한 성명을 발표하지만, 둘 모두 직접적인 군사 지원 및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단, NATO는 조약에 따라 조약서명국이 유사시 NATO 군사 자산을 활용할 권한을 명시하였기에, 이에 따른 최소한의 군사 지원을 통해 스페인을 지원하였으나, 이 이상의 지원은 그 어느 나라도 하지 않았고 28일 폴리사리오 전선은 모로코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29일, 세우타와 멜리야에서 탈출한 다수의 난민들이 스페인 본토로 피난을 왔고, 그곳에서 모로코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이 입은 피해 사실의 고발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모로코 측의 전쟁범죄를 비난하는 성명을 다수 발표했다.

그런 와중 모로코 해군을 완전히 봉쇄한다는 명목으로 스페인은 지브롤터 해협의 폐쇄를 선언했고, 그간 이루어지던 자유로운 항해는 향후 비상 상황이 종식되기 전까지 금지되는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저지로 최대한 연기되어온 조치였다.

7월 30일, 해협을 빠져나가는 것은 중국 광저우로 향하는 네덜란드 화물선을 끝으로 그 어떤 배도 해협을 통해 항해할 수 없었고,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런 스페인의 결정이 세계 산업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으나 스페인은 그간 영국에 의해 연기된 조치를 밀어붙였다.

지브롤터 해협이 폐쇄되자 무역 산업 전체에 이 영향이 미쳐왔고, 지중해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이었다. 유엔안보리가 소집되어 스페인과 모로코간 전쟁을 멈출 것을 권했지만 이전에도 그래왔고 이후에도 그렇듯 양 정부는 그러한 유엔의 입장을 무시했다.

스페인 전국의 무슬림 이민자들은 전쟁 초 몇번씩 폭동을 벌일 만큼 호전적이고 공격적으로 왕성한 소요 사태를 벌여왔지만, 모로코의 상황이 더욱 악화될수룩 평소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로 가득했다. 무슬림 인구로 가득찼던 거리는 비어 있고 거의 모든 상점은 방치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몇 시간 동안 스페인에서 증가하는 무슬림 인구는 비교적 세속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자 국가인 모로코를 향한 애국심과 함께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처음 몇일에서 길게는 전쟁 이후 까지도, 몇달 동안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뒤이어 스페인 급진적 우익주의자들이 맞대응에 나서면서 거리는 폭도로 가득찼다.

그러나 먼저 길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스페인의 우익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장기화되며 멜리야가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되자 거의 대부분이 전쟁에서 종군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스페인군은 이때부터 비정상적일 정도로 증가한 모병 자원을 수용하느라 이전보다 인력이 크게 늘어났다.

대부분은 화난 폭도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구타당하는 무슬림 이민자나 이맘에 관한 것이었다. 반대로 유럽인을 공격한 무슬림도 있었고, 모로코 내에서 유럽인이나 백인은 공격과 린치,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분노한 무슬림들에 의해 포위되고 고립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벌어진 무절제한 폭동은 전쟁으로 발생한 인종 갈등의 대표적 사례였다.

전쟁 초기 스페인이 모로코에 있는 외교 인사들을 초치해가며 보복 대상은 모로코의 포르투갈 대사관으로 자연스레 변했고, 모로코에서는 많은 유럽인들이 주요 도시의 대사관과 영사관으로 대피하는 동안 포르투갈 대사관은 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8월로 접어들며 끝이 났다. 대부분의 스페인 내 애국주의, 국수주의,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급진주의자들은 모두 정치적인 목적을 띄긴 해도, 무의미한 스페인 내에서의 충돌을 벌이는 대신, 군에 입대해 모로코와 싸우길 희망했다.

그렇게 그들 대다수가 군으로 몰려간 뒤, 남아있는 우익주의자들은 숫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하지만 모로코 상황이 악화되며 남아있던 모로코 이민자들은 모두 패배감을 삭히며 잔류하거나, 아니면 모로코로 귀국하면서 양쪽의 급진주의자들은 충돌하는 대신 서서히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군에 입대하면서 길거리에서 차츰 사라졌다.

모로코군은 더욱 진격했고, 알바로 데 바잔 거리까지 모로코군이 쇄도했다. 많은 군 병력을 동원한 3차 증원으로 멜리야는 세우타를 공격해야하고, 뒤이어 탕헤르로의 상륙이 임박한 상황에서 멜리야에 지나친 병력의 투입을 모로코군 수뇌부는 원하지 않았다.

멜리야에 도착한 3번째 증원 이후, 멜리야에서는 스페인군은 탈출을 시작했고, 에르난데즈 공원이 점령당하는 등, 멜리야 중심지까지 모로코군이 진출하자 탈출하지 못한 잔류 병력들은 멜리야의 항구를 지키기 위해 8월 1일까지 버텼고, 스페인군은 이후 8월 2일 항복했다.

한편, 멜리야 전투가 상황을 크게 역전하지 못한 채 스페인의 패배로 굳어져가는 7월 30일, 모로코군은 세우타를 향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2일 이후에도 세우타 주변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모로코군의 숫적 우세는 스페인군을 도시로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세우타 시 외곽에 있는 방어진지를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이전 사라위족 관련 분쟁으로 남부 방면에 배치되었던 모로코군 부대가 스페인과의 본격적인 군사적 충돌로 인해 북부 모로코로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고, 멜리야 전투가 끝나면서 멜리야로 배치된 병력들도 동원했다.

모로코군 내부에서 전쟁 초기 지나친 낙관론이 서서히 꺠지기 시작했다. 모로코군은 스페인과 마지막으로 치룬 전쟁인 리프 전쟁으로부터 81년이 지나는 동안 현재의 전쟁에서조차 81년 전 리프 전쟁을 떠올리며 스페인을 향한 공격에 대부분 낙관적으로 동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모로코군은 열세에 놓여있는 스페인군을 공격하고 그들을 무너뜨리는데에만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외려 숫적 우세는 현대 전쟁에선 큰 의미를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고, 머지않아 모로코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자성과 회의가 나타났다.

머지않아 예비군을 동원해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모로코군 장교들은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점차 멜리야 한 곳에 투입된 병력들이 세번의 증원에도 불구하고 처음 멜리야로 투입된 병력 대다수가 생환하지 못한 것에서 모로코군은 큰 충격을 받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예비군을 동원할 것이 계획되었다.

당초 전쟁에 투입되기로 예상된 인력, 장비, 자금을 지금은 7배나 웃도는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은 모로코 수뇌부가 충격에 빠질 충분한 이유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럽의 동맹국으로부터 탄약 공급을 받았고, 북부 모로코의 전면 침공을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었다.

전쟁 직전 페레질 섬에서 평화적으로 철수할 것을 제안하는 스페인의 외교적 접근을 거부한 모로코의 국가 수뇌부는 이제 되려 스페인의 전쟁을 멈출 방도를 찾아야 했다. 한편, 알제리에서는 8월 4일 알제에서 스페인 외교차관급 인사가 초청되었다.

한편, 비공개된 스페인 수송선단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공해상에서 추적을 피한 수송선은 모리타니 정부 요원들과 접촉했다. 사라위족을 이용해 모로코에게 이중전선을 형성하게끔 할 계획이었다. 모리타니로 향한 비공개된 수송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스페인이 비밀스럽게 보낸 군수물자는 모리타니 내에서 재차 가공되어 알제리 남부에서 훈련받고 공급될 폴리사리오 전선에게 제공될 것이었으며 알제리는 서부 국경에 아주 작고 미약한 추가적인 군사 배치를 통해 모로코에게 약간의 압력을 가했다.

8월 5일, 탕헤르에 대한 공습이 드디어 끝이 났다. 이틀 뒤인 7일에는 테투안을 향한 공습도 서서히 중단되기 시작했다. 스페인 남부에서는 갈리시아 강습함에 다수의 병력과 군사 장비가 적재되기 시작하면서 스페인군은 모로코 본토를 향한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하려한다.

모로코가 점령한 서사하라 지역에서 폴리사리오를 진압하던 모로코군 내 정예 부대가 북부 방면에서 스페인군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재배치되었는데 문제는 이때문에 모로코는 서사하라의 폴리사리오 전선의 이변을 포착하지 못했고, 이는 머지않아 이중전선의 위험으로 이어졌다.

8월 6일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세우타를 향한 침공 작전은 으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우타 시 외곽의 고지대에 있던 스페인 방어선을 돌파한 뒤, 세우타에서는 완고한 스페인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다운타운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다운타운을 지나면서 몇번의 시가전 동안 모로코군은 큰 피를 흘려야 했다. 초기 배치 병력이 1차 증원 병력과 합쳐졌고, 서사하라의 정예부대까지 도착한 8월 7일부터 전세는 더욱 스페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머지않아 모로코군이 세우타의 주요 지역들을 장악했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이제 도시의 서쪽 끝에 있는 항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항구는 이제 모로코군의 전체 화력투사 범위 내에 있게 되면서 모로코군의 포격에 의해 스페인군의 철수는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8월 8일부터 세우타에 재차 공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8월 9일까지 이루어지던 세우타에 대한 해군과 공군의 화력 지원은 이후 있을 탕헤르와 테우안 방면의 공세를 위해 점차 중단될 것을 의미하듯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공습은 모로코군의 중앙을 타격해 잠시나마 공습을 늦추는데 성공했다. 10일, 세우타에서 철수가 이루어졌다.

상륙에 앞서 있을 대규모 포격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미사일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스페인은 점차 모로코를 향한 공습과 포격을 줄여나갔다. 반대로 세우타에는 새로이 라 레히온 병력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페인군이 모두 퇴각할때까지 잠시나마 항구를 지켰다.

8월 11일, 마지막으로 행해지는 모로코 북부 전역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모로코 공군기지 중 북부 사령부는 갖고 있던 모든 공군 기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핸 모로코군의 공군력 또한 출동 직후 대부분이 스페인 공군에게 격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모로코 공군 전력은 남부와 중부 전체에 있었고 모로코는 모로코 지역 전체에 대한 제공권 상실을 우려하여 그들까지 전투에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군 수뇌부는 남아있는 모로코 공군을 전멸시키기 위한 마지막 타격에 결정적 준비를 마친다.

세우타에서 모로코군은 항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간 모로코군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혹한 시가전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특히 모로코군이 자랑하던 서사하라에서 활약한 정예부대는 처음 투입 병력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거나 또는 중상을 입었다.

세우타에서 모든 스페인군이 철수하면서 잠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편 모로코군은 세우타를 완전히 점령하지만, 남부 서사하라 지역에서 사라위족 학생들과 활동가들이 대규모 시위를 시작한다. 모로코 북부의 도시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연계 시위는 크게 확산된다.

시위는 곧 폭동으로 번지게 되는 한편, 2차 해협 전투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개방된 해협은 재차 폐쇄가 선언되었다. 모두가 스페인의 이러한 선언에 대해 앞으로의 전쟁에 향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스페인군은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모았다.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를 기함으로 하는 스페인 해군이 카사블랑카로 떠나는 항해에 나선다

마지막 재보급을 마친 공모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와 그 호위함대가 스페인을 떠나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8월 11일 마드리드에서는 첫 번째 여론조사에서 전쟁에 대한 막대한 지지가 드러났지만, 급진 좌파 그룹과 야권 지지층은 전쟁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형성했다.

런던에서 더 가디언지는 세우타와 지브롤터에 관한 스페인의 행보를 "제국주의"로 호도하며, 스페인이 단순 국경 분쟁을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전시킨 것에 대하여 스페인의 입장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고 BBC 또한 이를 뒤따랐다.

최후의 작전이 임박했을때, 양국은 서로에 대한 사이버 공격에 나섰다. 모로코인들과 기타 아랍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무질서한 사이버 공격은 몇몇 스페인에 소재를 둔 사이트에 접속 에러가 났을 뿐, 별달리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전황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조직적이고 전문화된 사이버 공격은 모로코의 주요 대도시에 의료 시스템과 통신망에 큰 피해를 줬고, 정부 전산 시스템을 붕괴시키기 까지 했다. 이러한 성공을 뒤로하고 스페인 해군의 상륙작전은 여전히 준비중이었고, 상륙작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스페인 군 수뇌부의 공통된 판단이었다.

모로코 본토 상륙전

함락되는 세우타 항구에 마지막 스페인 군함이 떠나면서 세우타 시는 완전히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되는데 성공한다. 한편, 8월 12일 오후, 마드리드의 아파트에서 수제 폭탄이 폭발해 2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알 카에다의 소행임이 선전되며 스페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간 스페인 사회에서 베풀어진 무슬림에 대한 관용에 대한 비판은 그간 스페인 내 우익과,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인구 사이에서 형성되어 빠르게 확산되던 여론이었으나, 전쟁과 테러리즘 이후 무슬림 사회에 대한 관용에 대한 회의감은 스페인 사회 전체에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스페인 내부적으로 더 이상 무슬림은 이웃, 또 다른 가족, 등이 아닌 적대해야 할 적이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과 이슬람 사이의 모호한 관계와 역사관이 모로코군의 세우타에 대한 약탈과 파괴, 학살 등, 다소 과장된 모로코 군대의 야만성 덕분에 무슬림 세력에 대한 적대감은 전쟁 이후 주류 여론으로 자리잡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이것은 스페인 땅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 공격이었지만, 상륙이 시작되고나서 이는 한번 더 갱신될 것이다. 8월 13일, 모로코 해안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스페인 군함이 모로코 해안에 위치한 대규모 모로코군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며 발생한 전투였다.

서사하라 지역에서는 1991년 이후 불안한 휴전 상태에 있었던 폴리사리오 전선은 모로코 군대와 MINURSO를 향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보다 잘 훈련되고 무장한 폴리사리오 전선은 점차 크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접경 지역 도시들이 점령당했다.

초동 대응에 나선 모로코 경찰은 머지않아 폴리사리오 전선과 사라위족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압도당하기 시작하며 경찰력은 머지않아 붕괴하면서 대부분의 모로코 도시들은 피난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폴리사리오의 전면적인 활동 재개에 모로코는 남부로 병력을 증원한다.

8월 15일, 병사들과 장비들이 상륙함에 탑승하기 시작하고, 스페인 상륙함대는 출항하는 동안, 서사하라에서는 소총, 탄약, 각종 중화기를 실은 보급 행렬이 이어지고 폴리사리오 전선은 그 의문의 후원자로부터 받아낸 군수물자를 받고나서 점차 서쪽 접경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전례가 없던 가장 큰 공습이 카사블랑카에서 벌어졌다.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의 모든 함재기가 해리어가 카사블랑카에 있는 모로코의 주요 해군 기지를 공격했고, 2차 해협 해전에서 도망친 모로코 군함 전부가 이곳에 정박했지만 이젠 남은 군함마저 모두 격침당했다.

카사블랑카 공습에서 모로코 해군의 기함이자 최대함인 데스쿠비에르타 초계함은 처음은 경미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공습 이후 전복되었다. 1차 해협 전투 이후 살아남은 마지막 미사일정인 엘 카다비는 공습으로 인해 대파되었고, 착저했다.

비르 안자란, 알 무나스티리, 엘 타우피크, 엘 하미스 등 4척의 초계정이 공습 이후 격침되거나 착저, 전복 당했으며, 엘 아키드 함은 공습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강습상륙함인 바트랄급 3척은 모두 공습 당시 침몰당했다.

모로코에는 더 이상 군함이라 부를 수 있는 함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로코 공군은 세우타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마지막 공습을 벌이지만 스페인 공군의 빠른 대응에 몇기가 격추되고 철수한다. 이것은 해협을 둘러싼 마지막 공중전이 될 것이다.

8월 16일, 남은 모로코 공군 전력은 이후 수도 방어를 위해 재배치되었다. 서사하라 지역 대부분이 빠르게 폴리사리오 전선에 의해 점거되어가며 상황이 악화되자 모로코 치안당국은 일반적인 폭동이 아닌 반란임을 깨닫고 군대가 진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17일 새벽부터 카사블랑카와 탕헤르테투안으로 향한 두개의 상륙함대가 상륙을 위한 공습을 개시하면서, 서사하라 지역으로의 군 병력 투입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17일 자정, 스페인 무적함대가 작전지역에 도착해 상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카사블랑카 전투 이후 도시 남부 외곽지역까지 진출한 스페인 라 레히온 병사들

하산 2세 모스크가 공습 이후 발생한 화재에 휩쌓이고 나서, 모로코군은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전, 해군과 공군의 대규모 공습이 재차 시작되고 스페인 지상군 병력이 카사블랑카와 탕헤르에 상륙하여 모로코군을 도시 남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라바트에서는 모로코 지도부가 스페인의 침공 사실을 보고받는다.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스페인군이 이전처럼 제한적인 전쟁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소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이었고, 남아있는 모로코군은 지연전을 위해 희생될 각오가 되있다.

그러나 모로코 수뇌부의 예측과 달리 스페인은 이전처럼 제한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스페인군은 이미 끊임없는 포격으로 인해 모로코군이 이미 한번 큰 피해를 입고 대열이 무너진 팅기타나 방면으로 단 4시간 만에 스페인이 확보한 사흘치 분량의 미사일을 쏟아부었다.

모로코군은 탕헤르-테투안 지역으로 쏟아지는 공습 직후, 무방비 상태에 노출된 모로코군이 상륙하는 스페인군에게 도살당하듯 죽고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 징집병과 덜 훈련된 병사, 그리고 급하게 동원된 예비군으로 구성된 병력으로 폴리사리오의 기습 공격을 방어중이었다.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21세기 최초의 상륙 작전은 세계인의 관심사이자 흥미거리가 되었고, 전세계 사람들은 TV 앞에 앉아 스페인군이 벌일 21세기 최초의 상륙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탕헤르에서 모로코군은 거의 완파된 시가지를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공습을 받았다.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모로코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탕헤르로 도착한 스페인군을 저지하기에는 모로코군은 많지 않았다. 이전에 세우타에서의 전투가 막을 내리며 모로코 참모진들은 남은 정예병력들을 모두 카사블랑카로 옮겼기 때문에 그들은 적은 수로 싸워야했다.

해가 진 뒤에도 시가전은 멈추지 않았다. 야간 전투에 조금 더 전문적이던 스페인군은 탕헤르에서 거의 대부분의 모로코군을 축출해내는데 성공했다. 모로코군은 도시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공습을 당했고, 이제 탕헤르로 향한 스페인군은 다음 하루 동안 세우타로 향했다.

모로코 북부 전선의 모로코군은 스페인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테투안까지 밀려나야 했다.

스페인과 모로코에서는 오늘밤 그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상륙 작전에 대해 TV 앞에 앉아 전쟁의 승패를 점치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카사블랑카에 추가적인 공습을 벌였다. 스페인이 확보한 더 많은 폭탄은 이 전투에서 거의 소모되었다.

이틀치 폭탄이 카사블랑카에 투하되면서 도시의 중심부로 나아가는 스페인군은 더욱 빠르게 진격했다. 8월 18일이 되면 상황은 스페인에게 더할나위 없이 이롭게 변해갔다. 스페인 GOE가 18일 새벽 모로코 후방에 침투되었다. 불분명한 이웃국가의 약간의 협조에 의한 일이었다.

피사로급 상륙함을 필두로 한 상륙함대가 세우타 위치에 도달했다. 탕헤르는 거의 점령되었지만 서쪽과 남쪽으로 퇴각한 모로코군이 재차 반격하며 18일 자정이 지나기가 무섭게 모로코군은 도시로 재진입을 시도했지만 여러번 이루어진 공습에 의해 모로코군의 반격은 돈좌됬다.

더 많은 스페인군 전투기는 전투 범위 한계까지 밀어붙여 출격하기 시작하고, 모로코군은 연이어 벌어지는 스페인군의 공습에 모든 방어선이 돌파당하기 시작한다. 전체 스페인 함대가 모로코 해안 상공에서 화력 지원을 위한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한다.

미사일 공격의 주요 목표는 상륙 지역 주변의 해안 거점, 후방 지역의 수송로, 그리고 지휘부였다. 스페인측은 숫적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가능한한 모로코군을 와해시키고 조직을 붕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로코군은 전날부터 공습에 큰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세우타와 멜리야 공격에 집중하는 동안 모로코 해안의 방공망은 스페인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고, 스페인 공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공습을 이어나갔다. 카사블랑카 내륙 방면으로 이동된 탄약고를 미사일이 타격하고 걷잡을 수 없이 큰 화재와 폭발이 일어났다.

한편, 스페인군은 추가적인 공습 이후 세우타와 멜리야에서 본격적으로 군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세우타의 상륙전은 성공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멜리야 또한 조기에 이루어진 공습으로 모로코군은 큰 저항 없이 철수하면서 스페인군에게 재탈환되었다.

탕헤르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모로코 지상군 전력이 이전에 세우타를 빠져나간 시점에서 전쟁이 벌어진 뒤 처음으로 스페인군은 모로코와의 전쟁에서 숫적 우세를 잠시나마 점했다. 스페인 공군은 모로코 후방의 테투안을 집중 공습하였다. 18일 저녁 테투안은 정전된다.

19일 새벽, 북부 모로코의 후방 깊숙한 사령부는 스페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고 모로코 사령관과 주요 참모진들은 지휘 벙커를 향한 미사일 공격으로 폭파되어 현장에서 사망한다. 스페인군은 엄청난 양의 고폭탄을 모로코군 진지에 쏟아붓고 있었다.

19일 낮부터는 스페인군의 주요 공습 장소가 카사블랑카와 모로코 내륙 지역으로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탕헤르와 세우타, 테투안을 향한 공습은 점차 축소되었지만, 이미 그곳에 있던 모로코군은 크게 열세에 놓였기 때문에 스페인군은 큰 문제 없이 세우타를 탈환했다.

세우타에 남아있던 모든 모로코군은 19일, 이미 세우타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라바트로 항복을 요구했지만 이는 모두 거부되었다. 그러나 참모부의 뜻과는 별개로 현장에서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20일이 되자 대부분이 즉각적으로 현장의 스페인군에게 투항했다.

라바트에서는 스페인의 공습으로 다수의 지휘부가 공격받으면서 벌어진 지휘공백을 회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이 와중에 서사하라에 서 벌어지는 사라위족의 반란에 대한 보고 대부분을 무시하고 북부 전선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서사하라에서는 폴리사리오 부대가 서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폴리사리오 전선 병사들은 이미 모로코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해안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사라위족은 이를 제3차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시되었다.

8월 20일, 폴리사리오 전이여러 모로코 도시와 마을들을 점령하고 스마라를 점령하고나서 을 향한 단 한 번의 공세로 알 아스운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모로코군의 우위는 지난 전쟁과 달리 스페인군의 지원에 의해 파괴되면서 폴리사리오는 큰 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테투안을 점령한 스페인군은 이후 남부의 도로들을 봉쇄했다

20일 마지막 공습을 끝으로 5일 동안 지속된 미사일 공습은 하루 정도 중단된다. 5일 동안 스페인 해병대가 탕헤르와 세우타를 재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탕헤르를 점령한 스페인군 병력은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며 모로코군을 모두 해안 지역에서 축출시켰다.

그들은 공세의 초기 몇번의 교전 이후 제대로 된 모로코 군대의 저항을 찾지 못하고 세우타와 탕헤르를 연결하는 중요한 416번 국도에 도달하고, 테투안으로 향했다. 스페인군 헬기를 통한 항공지원으로 국도 인근의 모로코군 방어선을 쉽게 돌파하고 도로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세우타를 점령한 스페인군도 남쪽으로 향한다.

멜리야에도 배치되었던 소규모 모로코군은 이제 폭격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뒤이은 스페인 해병대의 상륙으로 도시를 빼앗기고 함락당했다. 상륙이 예상되는 해변에 배치된 모로코군 방어선은 스페인 공군의 공습 이후 대부분 파괴되었고, 모로코군은 내륙으로 철수했다.

스페인군은 모로코군보다 질적으로 우세한 기갑전력과 헬기의 지원을 받고 세우타를 넘어 내륙 지역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고, 모로코로 더 많은 병사들이 상륙정을 통해 투입된다. 숫적 우세는 초기 스페인 공습으로 모두 제거당하면서 전투는 순조로웠다.

서사하라에서는 한편 모로코의 급조된 병력들과 MINURSO 병력들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폴리사리오 기습 공격에 완전히 압도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고, 스페인군의 공습에 의한 피해로 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폴리사리오에게 크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8월 21일, 카사블랑카 남쪽 시가지로 밀려난 모로코군은 이미 너무 많은 지역에서 전선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이미 모로코군 대부분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스페인군의 공격에 직면하며 모두 카사블랑카 밖으로 퇴각해야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22일부터 재차 공습이 개시되었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이제 해안까지 고작 5km를 앞에 두고 있었고, 폴리사리오 전선의 급격하고 왕성한 활동에도 모로코군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폴리사리오 전선 병사들이 사마라를 점령하고 50년만의 승전 기념을 위한 목적으로 도열했다

테투안이 함락되고 나서 북부 지역으로 향하는 모로코 육군의 주요 재반격은 스페인 지상군 뿐 아니라, 스페인 군함과 공군의 지원으로 다시 격퇴되었다. 크사르 엘-케비르로 향하는 짧지만 치열한 전투에서 비교적 적은 수의 스페인군은 모로코군을 분쇄하며 나아갔다.

워싱턴과 뉴욕에서 미 정부와 유엔에게 스페인 대사는 스페인 군대가 세우타와 멜리야를 해방하고 모로코의 스페인에 대한 위험을 영구적으로 완전히 제거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어떠한 휴전이나 종전의 시도에도 합의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모로코군의 북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공세는 수렁에 빠졌다. 417번 국도를 통해 진격중인 스페인 군대를 막는데 실패하지만, 여전히 수적 우위로 인해 아직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의 모로코 군대는 대부분의 전차와 장갑차를 잃었다.

8월 22일과 23일 동안 이루어진 모로코의 반격이 실패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모로코군은 내륙으로 진격중인 스페인 지상군의 공세를 돈좌시켜야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스페인군은 다시 진격하며 모로코군을 몰아붙이고, 동시에 다시 내륙 지역들을 점령해나갔다.

모든 모로코군의 격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카사블랑카의 스페인군이 322번 국도 통해 라바트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폴로사리오 전선이 북진을 시작헀기 때문에 상황은 모로코인들에게 더욱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로코의 패배

스페인군이 더욱 남하하였고, 서사하라 지역을 향한 2차 상륙이 준비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출발한 5대의 EF-18기가 한차례 공습을 하고 지나간 뒤, 스페인군은 이미 전열이 와해된 남부 방면의 모로코군과 차례로 교전하며 그들을 무력화시켰고, 대부분 철수하는 대신 무기를 버리고 스페인에게 투항했다.

8월 23일 밤, 모로코는 종전을, 필요시에는 항복 또한 고려하고 있었다. 모하메드 6세는 국내의 모든 장관급 인사와 군 참모진, 그리고 조언을 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을 소집해 전쟁에서의 열세와 임박한 패전에 대한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이미 24일 아침부터 스페인군이 라바트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고, 엘 아이운이 함락된 뒤 폴리사리오 전선이 해안으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북부 방면의 모로코 군대는 스페인군에게 항복하기 시작했다. 24일 오후 1시, 라바트에서는 충격적인 보고가 들려온다.

스페인 육군이 라바트에서 겨우 13km 떨어져있다는 것이었다. 곧 테마라 까지 스페인군이 진격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이미 테마라 방면에 배치된 모로코군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머지않아 스페인의 군대가 도달한다는 소식에 탈영하거나 도망쳤다. 모로코의 술탄은 절망적인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로코 사령부는 이것이 공수작전이 이루어지는 중이라고 받아들였고, 실제로 스페인군에 의해 24일 공수작전이 개시되어 라바트 남서쪽 방면으로 군 병력이 공수되기 시작했다. 지상군이 테마라로 진입하면서 모로코군은 자연스럽게 수도와 가까운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의 시가전 상황이 벌어지고, 카사블랑카가 전장이 된다면 상당한 사상자를 발생시킬 것이란 판단 하에 라바트의 군 최고 사령부는 현장 지휘관들의 모든 후퇴 및 항복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고, 방어선을 최대한 유지할 것을 명령하며 퇴각을 일체 금하는 수를 두지만, 이미 24일 밤 사이 현장에 공수된 스페인군은 테마라를 점령한다.

카사블랑카가 함락되자 모로코는 충격에 빠졌고 모로코군은 당장의 현상유지조차 버거웠다. 남쪽에서 쇄도하는 폴리사리오 전선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이는 스페인군의 진격에 점차 어려워졌다. 더 많은 병력이 폴리사리오 전선보다는 스페인 군대를 막는데에 투입되며 계속해서 남부 전선에는 공백이 발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로코군 남부 사령부는 수도에서의 명령과 별개로 스페인에게 항복했다.

25일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마드리드에서 서사하라 침공에 대한 결정을 과거 스페인의 무책임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사라위족을 도와야 할 스페인의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업임을 강조하는 "마드리드 연설"로 사라위족에 대한 지원 정책의 정당성을 호도하고 고무시켰다.

26일, 모로코군 최고 사령관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스페인군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요청했다. 이러한 시도는 즉시 발각되었으며 모로코 정부는 최고 사령관을 즉각 경질했으며, 최전선에서 투항하거나, 도주하는 장교들에 대한 극형이 고려됬지만 전황이 지나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기 전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한편, 다수의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사임이 이루어졌다. 모로코 최후의 공군이 라바트로 접근하는 스페인 공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격추되었다. 이들 중 마지막 전투기인 모로코군의 F-5기는 라바트 시의 다운타운에 추락해 큰 피해로 번졌다. 머지않아 라바트는 포위되기 시작했다.

북부 사령부 또한 스페인 측 지휘관에게 항복했다. 모하메드 6세는 모로코 군대의 대부분이 스페인에게 투항하거나 탈영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항복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스페인은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해왔다. 27일 마지막 전투가 라바트 인근 5km 이내에서 벌어지고 모로코는 일시적인 휴전을 요구하지만 스페인은 무조건 항복 외의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결과

모로코의 항복 소식을 보고받는 몽클레아 궁전에서의 아즈나르 내각

모로코는 스위스 주재 모로코 대사관을 통해 스페인과 접촉하여 항복 의사를 전달해왔다. 최전선에서는 여전히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나 머지않아 정부의 연락이 닿는 모든 모로코의 도시에서는 모로코 정부의 즉각적인 항복과 교전 중지를 알리는 방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7일 스페인 정부는 오후 6시가 지난 뒤에야 모로코의 항복 선언을 즉각 받아들였다.

모로코 정부는 모로코군 야전 사령관에게 27일 9시 이후 즉각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가장 마지막까지 벌어진 전투는 케니트라로 향하는 스페인군과 이에 저항하는 현지 모로코 군, 경 사이의 교전이었다. 엘 아이운 지역에서 폴리사리오 전선은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휴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서 이틀 정도 교전은 계속해서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모로코의 항복에서 요구되는 주요한 조건들은 이러했다. 세우타와 멜리야를 포함한 모로코의 기존 영유권에 대한 모두 포기할 것, 탕헤르테투안 지역을 스페인에게 할양하고, 20km 이내의 보안 구역을 지정 후, 이 지역에서 즉각적으로 모로코 군대를 철수할 것과 팅기타나 지역 전체를 비무장지대로 지정하는 것 등의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더 이상 모로코가 군사적으로 스페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라위족을 모로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또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항복에 모로코 정부가 공식적으로 서명한 29일 교전 행위를 중지했다.

사라위족과 관련해서도, 서사하라에서 모로코 군대의 즉각적인 철수와 사라위족의 독립 주권을 인정할 것, MINURSO를 철수시키고 대신 스페인과 폴리사리오 대표자 양자가 사라위족 독립국가가 건국될때까지 점령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항복 조약이 28일 최종적으로 서명되었다.

29일,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애국적이고 영웅적인 자기희생에 대한 칭송이 담긴 마드리드에서의 연설로 스페인은 전쟁 승리에 환호하는 젊은 청년으로 거리가 가득 메워졌다. 고무된 분위기에 몇몇 무슬림들은 구타당하거나 모욕받아야 했다.

많은 모스크에 젊은 스페인 청년들이 쳐들어가는 일이 벌어졌고, 30일과 31일 사이, 이틀간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사회에서 무슬림에 대한 공격을 은근히 방조하였으나, 상황이 지나치게 악화되면서 연쇄적인 인종 폭동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모든 폭동에 대한 즉각적인 진압에 나섰고 전승에 대한 전국적인 열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틀 뒤인 9월 1일, 모로코의 모하메드 6세 또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의 뜻을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다. 모하메드 6세는 9월 5일 최종적으로 퇴위했으며 그의 아들인 몰레이 하산에게 왕위를 선양하였으며 당시 모로코 내각은 총사퇴를 결정했다.

한편 아즈나르는 국내에서 야권 진영에서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정치적 문제를 덮으려 했다며 지적받았지만, 여전히 그의 평가는 호조였다. 9월 초,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망명하여 거주중이던 많은 사라위족 난민들은 더 이상의 정치적 탄압이 사라진 옛 고향인 서사하라 지역으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10월 13일, 서사하라 지역의 MINURSO는 임무 종료를 선언하고 서사하라에서 스페인의 신탁 통치를 인정한다. 미국은 스페인이 서사하라를 지배하려는 의도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때문에 적대관계에 놓인 아랍세계를 제외하면 사라위족의 독립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찬성과 지리를 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스페인의 정치적 후원으로 사라위족은 독립하는데 성공했으며, 폴리사리오 정부는 2003년, 엘 아이운에 금의환향하였고, 스페인 국왕 및 총리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알제리 정부의 영향을 받은 새 헌법을 제정하며 독립했다.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은 적어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하면 꽤 세속적인 국가로 재탄생했다. 이후 목적을 달성한 폴리사리오 전선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반군 조직에서 정상적인 정당으로 변모했고, 2006년 해체된다. 사라위 국가는 이후로도 스페인에게 큰 영향을 받는 국가로 남았다.

서사하라에 남은 모로코인들 대부분은 강제이주되었고, 아직 남아있는 이들은 사라위족으로 구성된 지방 정부 내에서 약간의 자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동안 모로코인과 사라위인 사이에 국지적인 분쟁과 마찰은 예정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최악의 경우 전쟁으로도 번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당시에는 평가되었다.

전쟁에서 진 모로코 국내에서는 세속화와 이를 통해 얻은 미국과 서방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스페인-모로코간의 제3차 아프리카 전쟁에서 서방이 모로코를 사실상 방치했음에 대한 분노로 끓어올랐다. 그 사이 모로코 내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상당히 성행하였고, 이는 알 카에다가 모로코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새로이 즉위한 술탄은 빈약한 모로코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모로코 내에서의 反서방, 反세속화의 큰 물결에 의해 전쟁 이후 모로코 내에서 알 카에다는 새로운 활동 거점과 함께, 많은 좌절하고 분노한 청년들을 알 카에다의 구성원으로 포섭할 수 있도록 변했다.

특히, 패전 후 쫓겨나다시피 모로코 군대에서 추방당한 장교나 군인들은 그런 알 카에다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고 이는 먼 훗날 2010년대에 성행할 알 카에다의 또 다른 지하드에 사용될 기반을 제공하고 동시에 스페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크게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3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기차역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와, 1년 뒤인 2004년 5월 벌어진 자폭 테러, 이후 2013년 한번 더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를 포함한 세차례의 이슬람 테러리즘은 스페인에서 장기적으로 무슬림에 대한 사회적인 배제와 추방으로 이어졌다.

아랍연맹은 전쟁 이후 스페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다. 스페인은 중동발 석유에 대체제로서 러시아로부터 석유를 사 그것을 만회했다. 점점 더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면서, 자연히 스페인과 러시아간의 정부간 협력도 늘어났고, 독일, 헝가리 뿐 아닌 새로운 러시아 에너지 시장의 참여자가 되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위기가 스페인 내의 경제적 문제인 부동산 거품을 상당 부분 감소시킴으로서 스페인 내 경제 상황에 약간의 활로가 트였지만, 반대로 전쟁 이후 이러한 안보적 리스크 때문에 투자자들은 스페인 정부와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는 한동안 꺼려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고, 이는 큰 폭의 금리 인상을 야기했다.

이러한 스페인 정부의 경기 악화와 함께 지브롤터 해협 폐쇄 이후의 경제 위축은 훗날 유로존과 유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으로 시작된 유럽연합과 아랍연맹간의 분쟁은 점차 커졌고 이는 훗날 2010년대의 유로존의 공통된 경제적 불황과 유럽연합-아랍연맹간 무역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신탁 통치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철군이 이루어지면서 스페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귀국한다

스페인의 신탁 통치는 1년 뒤인 2003년 7월에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이 건국된 뒤에도 몇달간의 스페인군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졌고, 2003년 8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4년 5월, 스페인군은 공식적으로 모두 철군하면서 서사하라 내 스페인군은 완전히 철군했다. 다만 이후로도 2014년까지 서사하라 북부 지역에 스페인군 5,000명 정도가 주둔했다.

이들은 2009년까지 이어진 모로코인들의 폭동을 진압하고, 그 전 몇년간 이어진 엘 카에다 및 모로코와의 국경 지역에서의 마찰을 조정하거나 사라위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고, 초기 사라위 육군은 이때 주둔하던 스페인군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한편, 모로코는 2014년 완전히 스페인군이 서사하라에서 나갈때까지 스페인군의 주둔 자체에 대해 완강히 반대, 거부 의사를 보여왔다.

2014년에 귀환한 마지막 스페인 주둔군의 귀환식에는 그 해에 새로 즉위한 펠리페 6세가 참석하며 이목을 끌기도 했다. 2012년 모로코 정부는 국왕이 참석하는 추모식에 크게 반발했듯, 2년 뒤의 귀환식 또한 크게 반발하였으나 스페인 정부는 모로코의 반발과 항의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전후 여파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의 포로와 유해를 항복으로부터 72시간 이후부터 반환했는데, 페레질 섬에서 전사한 유해는 모로코가 반환받지 않았다. 이는 여전히 모로코가 페레질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의미를 뜻했고, 스페인은 모로코가 거부한 모로코군 유해를 모두 화장해 지브롤터 해상에서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양국은 단교했고, 4년 뒤인 2006년 10월 11일에 재수교 했다. 4년만에 재수교하는 것에 대해 전쟁 당시의 참전용사와, 전사자, 희생자의 유족들은 반발하였으며, 3년 전 열차 폭탄 테러와 또 다른 테러로부터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두고 시기상조라 평가되었으나, 중장기적으로 모로코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스페인에게 의존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전쟁 이후 1년이 지난 2003년에 서사하라는 스페인의 신탁통치에서 독립하여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으로 독립했는데, 이를 보장하는 알제 협정이 2003년 12월 2일 알제리 알제에서 스페인과 모로코를 비롯해 협정을 맺음으로서 모로코는 다시는 서사하라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교, 또는 군사적 행동이 철저히 봉쇄되었다.

2003년 3월 11일 아토차역에서 IED가 터져 198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해인 2003년 3월에는 마드리드의 아토차 역에서 알 카에다에 사주를 받은 모로코인이 벌인 열차 폭탄 테러로 인해 193명이 사망하고 약 2,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역사상 가장 큰 피해 규모의 테러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전유럽에서도 가장 큰 피해 규모의 테러였다. 해당 사건 이후에도 두차례나 모로코계 이민자에 의한 테러 사고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해당 사건의 범인이 1년 뒤 5월 마드리드의 한 건물에서 자살 폭탄 테러 감행하기도 하였으며, 11년 뒤인 2013년에도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자폭 테러로 인해 수년간 모로코와 스페인간의 전쟁 이후로도 양국민간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모로코 정부는 훗날 몰레이 하산 1세 술탄과 알 카에다의 정치적 스캔들이 발생했다. 이로서 모로코인들은 유럽에서 오랜 시간 동안 요주의 대상이었다.

모로코가 알 카에다의 새로운 신병모집처로 변해가며 유럽과 미국에서는 모로코인들에 대한 감시와 규제가 더욱 삼엄해졌고, 이 탓에 친서방 국가였던 모로코는 서방과 외교적인 관계가 크게 어긋나며 2008년 이후 중국이 급부상하자 중국과 다방면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며 노골적인 친중 성향을 나타내면서 주요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마저 상당히 악화되었다.

서사하라 위기와 스페인과의 전쟁 동안 양면전선을 막기 위해 서사하라에 엄청난 양의 지뢰밭을 지나 더 깊숙히 지뢰밭을 깔았고, 모로코 본토 상륙이 본격화되자 스페인군을 막기 위해 탕헤르테투안 지역에 엄청난 양의 지뢰를 설치했다. 이는 전쟁 직후부터 스페인과 유럽연합의 주도로 제거되었고 2014년 9월 탕헤르테투안에 설치된 마지막 지뢰가 해체되었고 서사하라 지역은 2021년이 되서야 완전히 제거되었다.

지뢰 뿐 아니라 스페인군과 모로코군이 전쟁 당시 양쪽의 진지를 향해 쏜 포탄과 미사일 중 불발된 탄이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사고를 일으켜 사회문제가 되곤 했다. 이러한 불발탄 문제는 2005년부터 어느정도 스페인이 점령지역에서 서서히 제거하기 시작해 2007년이면 완전히 종식되나 사라위족 지역에서는 2010년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아즈나르 총리는 자신의 지지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출구 전략으로서 전쟁을 활용했는데, 20년 전 포클랜드 전쟁에서 마가렛 대처가 그러하였듯, 스페인군 전사자 448명의 유족을 향해 일일히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마가렛 대처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고, 나아가 이번 전쟁에서 야권의 지나친 반전에 대한 요구는 향후 10년간 스페인 정치권에서 좌익 진영에 대한 시민 사회의 노골적인 배신감으로 이어졌다.

훗날 모로코가 반미, 반서방, 반유럽화 되어가자, 새로운 반서방 진영의 탄생을 기대하며 리비아는 전쟁 동안 모로코를 지원했다. 한편 미국이 서사하라에서 빠져나가자 스페인의 개발 회사들이 이를 차지하게 되면서 스페인과 모로코의 전쟁은 당시의 중동에서 벌어지던 크리스천과 무슬림간의 전쟁처럼 자원에 대한 문제로 비화된 전쟁이 아닌가 하는 이후의 추측과 평가가 존재했지만,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보다는 세우타와 멜리야에서 입은 스페인의 피해가 워낙 강해 언급이 회피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모로코와 스페인간의 전쟁에서도 두 국가가 처해있는 모호한 국제 관계에 따라, 나토와 아랍연맹 등 양국의 국제진영 중 제대로 전쟁에 개입한 곳은 한곳도 없었다. 애초에 전쟁에서 모로코 편은 리비아가 전부였으며, 남아있는 것 또한 국가가 아닌 반군세력일 알 카에다가 전부였다. 그나마 영국이 스페인에 대한 약간의 우려섞인 입장을 가졌지만 멜리야와 세우타의 무차별 공격 이후 악화된 유럽 내 모로코에 대한 외교적 입장 때문에 제대로 도울 수 없었다.

2012년과 2022년, 각각 전쟁 10주년, 2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참석했던 10주년 추모식은 여러가지로 후안 카를로스 1세에 대해 악화되던 여론이 반전되면서 국민적인 지지로 이어지는 기회였다. 스페인의 경기 악화에 대한 고충에 공감하여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고령의 국왕이, 당시 비가 옴에도 추도식에 참석해 전사자들의 영령을 달래는 모습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2022년 추모식에서는 펠리페 6세가 참석했으며, 같은 해 영국 또한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추모식이 있었으며 양국은 서로에 대한 전승을 축하하고, 전사자에 대한 추모의 뜻을 전했다. 한편 2022년에는 당시 야권인 PSOE의 당대표직을 역임했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가 훗날 전쟁 당시를 회고하며 PSOE를 포함한 야권의 지나친 여당 정권에 대한 책임론의 제기가 오히려 당시 모로코군의 두 도시 침공 이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스페인 국민의 반감을 사 야권의 지지율 하락에 이바지 했다며 후회의 뜻을 남기기도 했다.

아즈나르는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반등시켰으며, 서사하라에서의 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새로운 활로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일시적으로 오르는 경제 상황은 생각보다 호황은 아니었어도 꽤나 높은 타율을 보였고, PSOE의 지나친 전쟁 책임론에 의해 다음 해의 2004년 총선 까지 이는 영향을 끼쳤고, 인민당의 마리아노 라조이 총리를 집권시켜 정권 연장에 성공하며 좋은 마무리를 보였다.

전쟁 당시 서사하라를 크게 지원한 국가 중 하나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스페인의 비공식적인 요구와는 별개로, 서사하라를 모로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에 대해 나름의 입장과 판단에 따라 전쟁 초기부터 전술고문단을 비롯해 토우와 사이드와인더 등의 유도무기를 서사하라에게 은밀히 제공하였으며 더불어 이스라엘제 무기들을 아프리카의 밀수상들을 중개하여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전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모로코에서 전쟁에 대해 카사블랑카에서 거주하던 모로코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영화, "2002"를 제작한 바가 있다. 다만 카사블랑카 공습에 대한 비윤리성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는 모로코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답습하는 영화로서, 사실상 전쟁 10주년을 맞이한 모로코 측의 프로파간다에 더 가까운 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카탈루냐의 일부 극장이 이를 상영했지만, 스페인에선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7년이 지난 2009년, 전쟁 당시 아즈나르 총리와 내각 상황을 다룬 TV 다큐멘터리, "페레질 섬의 그날"을 제작해 방영하였고, 2011년 전쟁을 다룬 스페인 드라마 "생과 사의 섬광"을 제작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지 18년 뒤인 2020년에는 스페인과 모로코 양국 감독이 함께 공동제작한 전쟁 당시 해협 해전을 다루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전쟁 영화, "아르마다(무적함대)"가 개봉한 바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서사하라는 내부적인 정파적 분쟁에 시달렸지만 2004년 처음 치뤄진 총선 이후 이러한 정파적 갈등은 해소되었다. 한편, 한순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모로코인들의 조직적인 폭동은 2009년까지 지속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체포되거나 도주하여 알 카에다에 합류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모로코는 2010년대 최고조에 이르른 알 카에다의 주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서사하라의 전후 재건과 사라위 공화국의 초기 인프라 구축에 토건사업과 엔지니어링 사업 분야, 에너지 자원 개발 분야에도 한국 기업들이 사라위 공화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나름의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가기도 했다. 전쟁 직후 갓 독립한 신생 국가인 사라위 공화국은 기업들이 안전 문제와 안보의 불확실성으로 투자를 꺼려했던 탓에 공백이 벌어지고 이 사이를 한국 기업들로 대체되어 채워졌다.

각 국의 반응

국제기구

북대서양 조약기구는 모로코의 모든 군사 행동이 스페인의 안보와 주권에 대한 위협이라며 비난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의 스페인 영토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방어 대상이 아니라서 불개입을 밝혔다. 하지만 스페인 본토가 공격당할 경우 자동적으로 개입할 것을 밝혔으며, 스페인과의 조약에 따라 군사 자산을 제공할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어 양측에게 즉각 전쟁 행위를 종료할 것을 권고하였다. 한편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에게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한편 유엔 국제형사재판소는 스페인이 멜리야와 세우타에서 벌어진 모로코군의 무차별적 포격으로 발생한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 촉구를 받아들였고 책임이 있는 모로코 장군들을 기소할 것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브뤼셀에서 소집되어 모로코 정부의 무력의 행사로 인해 스페인의 안보와 주권이 위협받았으며, 멜리야와 세우타에 가해진 모로코군의 군사 작전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관해 강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군사 동맹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전쟁 이후 스페인과 사라위에 의료 지원을 보냈다.

아랍연맹은 스페인이 모로코와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에서 선제적으로 군사 행동을 벌였다는 비판 성명과 함께 스페인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아랍연맹은 군사 동맹의 성격을 띈 국제기구가 아니라서 개입할 수 없음을 밝혔다. 전쟁 이후 아랍연맹은 스페인에게 석유 수출에 대한 금수 조치를 실행하였으며 전쟁을 직접적으로 도운 유럽에도 수출에 대한 제한적인 규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며 경고했다.

아프리카 연합은 모로코의 스페인 공격에 대한 형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멜리야와 세우타에 대한 모로코군의 무차별 포격에 관하여 비인도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인 전쟁범죄에 해당한다며 공식적으로 비판 성명을 전했다. 한편 아프리카 연합은 전쟁이 끝난 뒤 사라위 아랍민주공화국을 회원국으로 승인하고 모로코를 향후 5년간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다.

중립

터키는 페레질 섬 불법점거는 모로코의 명백한 스페인에 대한 위협임을 재차 확인했다. 한편 터키는 전쟁 동안 스페인과 모로코 양측을 중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항복 협상 당시 모로코의 중재 협상 대상국이었다.

스위스는 기존 외교 정책에 임각해 이번 전쟁에서도 중립국의 지위에 있었다. 항복 협상 당시 스페인의 요청에 따라 중재 협상 대상국으로 참여하였으며, 전쟁 중 양측은 스위스 주재 대사관을 통해 입장을 교환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은 전쟁 중단을 촉구했으며, 중국이 양국의 협상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중재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표멍했다.

교황청에서는 양국간의 외교적 협의를 통해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같은 교황청의 반응은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이교도에 대한 온건주의로 비춰지며 약간의 거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모로코를 향한 해상에서의 군사 행동이 자기방어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해협에서의 안보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유럽 전반에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며 이를 지적하였다. 후일 영국은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과 모로코 양쪽 모두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의료 지원을 보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훗날 이 당시 상황을 두고 스페인의 전쟁이 영국의 경제 상황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영국의 유럽 내 외교 플랜에 큰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해 경고했음을 밝혔다.

미 정부는 모로코에게 적대 행위 중단을 촉구했다. 형식적인 담화와 더불어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스페인에게 무기 공급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이 모로코를 선제 공격하였다는 정황 또한 존재한다며, 분쟁 지역에서 섣불리 무력을 사용한 스페인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을 함께하고 있는 만큼 스페인은 미국의 안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모로코 또한 강성 친미 국가이며, 특히 스페인의 서사하라 사태에 개입이 확정되자, 서사하라에서의 안보 상황 악화를 반기지 않는다며 스페인을 압박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스페인과 모로코에 각각 연락을 취해 휴전을 요구하고 워싱턴에 양국의 외교 대사를 초청하여 휴전을 주선했다.

스페인 지지

러시아는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무력 행동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고 미하일 카시야노프 러시아 총리는 스페인의 주권은 모로코가 군사적으로 위협, 또는 침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또한 모로코에게 군사력를 사용해 스페인 본토를 공격하면 곤란할 것임을 밝혔다. 이후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고 아랍연맹이 스페인을 향해 석유수출금수조치를 단행하자 이를 대신하여 러시아발 석유를 수출했다.

프랑스는 페레질 섬 점거 당시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전쟁으로 확대되자 공동 성명을 통해 스페인과 모로코 양국의 무력 사용을 즉시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며, 모로코가 스페인 본토를 공격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성명을 전했다. 전쟁 중 프랑스는 기존에 협의된 사안에 따라 스페인에게 위성을 통한 정찰 자산을 제공했다.

포르투갈은 페레질 섬 점거 당시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전쟁으로 확대되자 프랑스, 이탈리아와의 공동 성명을 통해 스페인과 모로코 양국의 무력 사용을 즉시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며, 모로코가 스페인 본토를 공격하는 것을 반기지 않으며 스페인과는 안보적인 공동체라는 입장을 재차 표명하였다.

이탈리아는 페레질을 포함한 세우타와 멜리야를 비롯하여 현재 벌어지는 지중해권의 분쟁에 대하여 모로코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악화되는 안보 상황에 대해 모로코의 책임을 지적했다.

그리스는 모로코의 적대행위 중단을 촉구했으며 양측이 피를 흘리지 않고 외교적인 대화를 통해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스는 또한 세우타와 밀리야 침공 이후 의료지원을 보냈다.

독일은 공식적으로 스페인을 지지하며, 모로코의 페레질 섬 무단 점령과 세우타와 멜리야를 향한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하며 모로코를 비판하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모로코의 세우타, 멜리야에 대한 공격은 유럽의 안보 상황을 악화시킨다며 모로코의 군사 행동 중단을 촉구하였다. 이후 독일은 전쟁 이후 스페인에 지원단을 보냈다.

알제리는 페레질 섬 점거에 관해 모로코가 스페인의 주권을 침해했으며 분쟁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벌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초기 입장은 아랍연맹의 권고에 따라 정정되었으나, 재차 번복하여 세우타와 멜리야에 대한 무차별 공격 이후 모로코에 대한 비판적 성명을 유지했다. 이후 2003년 사라위족 독립을 보장하는 알제 협정을 선언했다.

모리타니는 스페인의 자기방어적 무력 행사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세우타와 멜리야에 대한 무차별 공격 이후 모로코에 대한 비판적 성명을 유지했다. 모리타니는 스페인의 모로코 침공을 돕기 위한 몇가지 지형 데이터를 넘기기도 했으며, 서사하라를 향하는 스페인의 비공식 사라위족 지원 작전을 도왓다. 이후 2003년 사라위족 독립을 보장하는 알제 협정에 동참했다.

모로코 지지

리비아 카다피 정권은 그간 우호적이지 않았던 모로코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공격 을 개시한 모로코 측 주장에 따라 먼저 분쟁 상황을 전쟁으로 확전시킨 스페인에 대한 비난성명과 함께 모로코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후 스페인이 모로코 본토에서 군사 작전에 돌입하자 스페인의 아프리카 공격을 중단을 촉구했다.

알 카에다는 스페인의 모로코 침공은 아랍 무슬림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주장하는 한편, 8.12 마드리드 폭탄 테러를 자신들이 했음을 선언하며 모로코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는 모로코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알 카에다는 이후에도 모로코에 대한 지지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알 카에다는 모로코까지 활동 영역을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