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비시카 촌 しらびしか村 锡拉比什卡村 | |
---|---|
시라비시카 촌의 마을회관 | |
이름 | 시라비시카 촌, 시라비시카 홍등가, 시라비시카 유녀촌 |
설립 | 1923년 추정 |
촌장 | 판준석 (伴俊錫) |
북좡허 3구 구청장 | 반서준 (潘敍俊) |
개요
1923년 식민지로서 관동주에 편입된 다롄의 일대 지역에 군대가 생기자 일본의 홍등가 대부들이 시장을 노려 유녀들을 보냈고 그때부터 형성되어 지금에 이르는 도시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방대한 슬럼가의 총칭이다.
역사
미치노미아 위안소
1923년, 일본의 다롄 일대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위해 설치된 위안소가 그 시초이다. 당시 일본군 중좌였던 미치노미야 다이추가 관동군 위안부 임무를 맡아 일본의 홍등가에서 수백의 유녀들을 뽑아 다롄 일대에 유곽을 조성했는데, 당시 이름은 다롄 위안소라고 하였으나, 암묵적으로는 위안소를 설치한 중좌의 이름을 따 미치노미아 위안소라고 불렀다.
미치노미야 다이추 중좌는 관동군의 독점 이용을 대가로 일본의 유곽 대부로부터 여러 투자, 지원을 받아 당시 아시아 사상 최대의 유곽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1927년에 지은 위안부들을 수용하기 위한 전용 건물이 약 8,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1930년대 말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이 건물이 네 번의 증축을 통해 약 67,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1]
1940년대 초, 일본의 패망이 심화되자 종군 위안부를 적극적으로 모은 공으로 미치노미야 다이추 대좌는 버마 방면으로 전출되고 홍등가에서 가장 큰 유곽을 운영하던 대부인 판석보[2]가 위안소의 운영을 맡았다.
시라비시카 유곽
소련군이 만주에 들어오고, 위안소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운영을 맡은 판석보는 다롄에 있던 유곽 사업들을 모두 인수하고 소련군에 지속적인 로비를 통해 소련군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 즈음 명칭을 시라비시카 유곽으로 바꿨는데, 속설에 따르면 히라가나 50음도 표에 다트를 던져 정한 이름이라고 한다.
소련군이 물러가고 만주를 중국 공산당에 넘기자 판석보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총기를 토대로 다롄 주민들을 고용해 자경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다롄에 중공군들이 들어오는걸 막고 다롄을 사실상 판석보 자신만의 국가로 만든다.
이 즈음 판석보는 매독으로 인해 치매에 걸려 정신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는 1948년에 정점에 달해 다롄에서 시라비시카 대제국을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대시라비시카 제국

1948년 치매에 걸린 판석보가 세운 국가로, 1953년 아들 판영서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해 멸망한다.
시라비시카 연방 공화국

1953년 판영서가 세운 국가로, 1986년 홍등가를 이용하러 온 중공군 144명과의 총격전으로 멸망한다.
현대
시라비시카 연방 공화국이 144명의 중공군에 의해 멸망한 이후로 판영서의 아들인 판준석이 시라비시카 홍등가의 운영을 맡고 있다. 판준석은 인터넷을 통한 홍등가 홍보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조선족 알바들을 이용한 문자나 인터넷 채팅으로 홍보를 하고 있는데, 도를 넘은 문자·채팅 홍보로 악명이 높아 중공 당국이 이를 제한하는 실정이다.
최신 자료인 2004년 기준으로는 일 평균 약 700명이 이용하는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