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대하는 신의 태도/ 백지의 신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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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대하는 신의 태도: 백지의 신
1-1. 데큠 엘

투박한 돌들로 바닥에 깔려있는 길 위로 서서히 붉은 빛을 떨쳐낸 아침 햇살이 비춰졌다. 따스한 빛들은 기분 좋게 살랑이며 불어가는 바람을 타고 천천히 밤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낸 낡은 나무 지붕들을 지나며 인사를 나누었다. 바람이 몸을 낮추어 건물들 사이로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카페 간판이 보였다. 그들은 건물에서 툭 튀어나온 나무판자를 피해 더 낮게 날아가며 이내 아침을 열며 거리를 지나는 마부들의 얼굴에 올라탔다. 마부는 간지러운지 볼을 긁적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차 지붕을 가까스로 지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람은 코앞의 유리를 보지 못한 탓에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들을 갈라놓은 작은 창문은 거리에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곳에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뒤꿈치를 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한껏 내밀어 거리의 풍경을 깊은 두 눈동자에 담아온 그런 호기심 많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저녁이 되면 항상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예쁜지 이야기 해주었다. 마을을 비추는 태양과 넓은 들판을 비추는 태양이 얼마나 다른지. 창문으로 보이는 마을의 마차들이 길을 따라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밤이 깊어지고 별빛이 창문을 두드렸다. 그 즈음이면 소녀는 할머니가 누워있던 침대에 기대 꿈을 꾸곤 했다. 세상을 누비는 새가 되어 북쪽 숲의 눈 덮인 풍경을 꿈꿀 때면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동경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소녀는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설산 위에 눈을 쌓고 있었다. 그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는 아침햇살에 흔들린 창문 소리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했다. 침대에 기대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비비고는 의자에서 일어난 소녀는 침대를 향해 한 번 웃어주었다. 그녀는 부스스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곤 늘 그래왔듯 밝게 빛나는 창문으로 발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옛날과 같은 낡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금빛 눈동자에 마을 풍경이 영화 필름의 한 장면처럼 비추었다. 투박한 돌들이 아름답게 늘어져 만들어낸 돌길. 환하게 미소 지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늘도 여전히 마차를 이끄는 말들을 그녀의 눈동자에 담고서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추억을 머금고 있는 나무 침대가 보였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옮기자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또래의 소녀가 보였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고 주위로 흩뿌려진 금빛 머리칼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비단처럼 은은한 빛을 내었다. 그 사이에 귀엽게 튀어나온 고양이 귀도 접히고 펴지는 모습에 지켜보던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녀는 그녀를 지켜보다 문뜩 떠오른 것이 있어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혹시나 자고 있는 네르피 소녀의 잠을 깨울까싶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 소리를 내던 나무 바닥도 지금만큼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지 조용했다.


주방으로 다가갈수록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냄새가 진하게 풍겨져왔다. 그녀는 곧 깨어날지도 모르는 또래 친구를 위해 만들어둔 수프를 데우기 위해 불을 준비했다. 주방 한 구석에 놓인 모래 상자를 요리대에 올리고는 그 위로 조그마한 큐브 모양의 장작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 옆으로 받침대를 두고 불을 지피자 화르륵하고 열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열기가 어느 정도 올라 적당해지자 조그마한 항아리를 받침대 위로 옮겼다. 그제야 차갑게 식었던 수프가 서서히 풀려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먹음직스러워지는 수프를 국자로 서서히 저으면서 향기를 만끽했다. 항아리 안에서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 수프는 노란빛과 주황색이 서로 섞여갔고 고기와 감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녀의 침샘을 자극했다. 고운 빛깔에 흡족했을 즈음 그녀는 국자로 수프를 한번 떠서 조그마한 접시에 담아 맛보았다.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조화를 이루면서 마치 그녀의 할머니가 만들어 준 듯한, 이로 표현할 수 없는 정겨운 맛이 났다. 간을 본 그녀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서 옆에 나란히 놓인 접시들 중에서 가장 아끼던 그릇을 꺼냈다. 그릇에 담겨가는 따뜻한 수프를 보며 그녀는 내심 희대의 역작이라면서 활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채 그릇을 들고 주방을 나와서 소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 탁. 그릇이 침대 옆 탁자에 놓이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와 함께 기분 좋아지는 향기가 주변을 채우기 시작하자 침대의 소녀는 접시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프에 이끌리듯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고는 그녀의 아름답고 깊은 비취색 눈동자가 보였다. 고양이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간 소녀는 잠시 당황한 듯 입은 열었지만 거기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잠시 동안의 정적이 있은 후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이 놓아둔 그릇을 들어 그녀의 손님에게 내밀었다.


“수프라도 먹으면서 말하자.”


이제 막 깨어난 고양이 소녀는 자신의 코앞에 있는 수프에서 익숙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마음에 일었던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수프를 바라보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걸 깨달은 듯 위장에서 배꼽시계가 울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네르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며 급히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게 배를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인간소녀는 배꼽시계를 알아차린 듯 그녀에게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랫동안 먹지도 못했으니까.”


인간 소녀가 그녀의 손으로 접시와 수저를 가져가 꼭 쥐어주었다. 그제야 금발 사이로 귀를 쫑긋이 세우고 붉은 얼굴을 푹 숙여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엇이 두려운지 떨고 있었다. 그래도 수프를 얼굴에 묻히면서 맛있게 먹는 고양이 소녀의 모습에 조금은 안도했다.


“맛있어?”


소녀가 한껏 달아올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네르피는 아직도 코를 그릇에 문지르며 급하게 대답했다.


“엄청!”


마치 대답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먹는데 열중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치 그녀가 맛있게 먹는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소녀는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일어나 주방으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나무 바닥도 평소처럼 삐걱거리는 소리 내었다. 나무판자 소리가 끝나갈 쯤 소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앗. 나도 참. 수프 다 태울 뻔 했네. 어떡하지.”


그녀가 들어간 주방에서 계속해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자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수인 아이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주방을 가리던 천 조각들을 들어 올려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엄청난 열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비록 모래상자 안이었지만 그 위로 불이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그 위에 놓인 항아리를 잡아먹을 듯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향긋한 냄새가 항아리에서 흘러나온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 앞에서 집주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물을 뿌려봤지만 불은 여전히 보라색 빛을 내며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네르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왠지 모르게 그 금발 소녀가 다가갈수록 불이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서서히 약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항아리를 한입에 삼키려던 불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항아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사막여우만이 남아있었다. 네르피는 그 사막여우에게로 다가가서 익숙하게 그 보라색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보라색 여우는 그녀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한번 만져볼래?”


옆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인간 소녀는 그녀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네르피는 옆에 놓인 국자와 접시를 보고는 항아리에서 수프를 깊게 퍼서 접시에 담았다. 마치 흘러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수프를 담은 그릇을 한 손에 들고 나머지 팔로는 여우를 품에 안은 채로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나무판자가 내는 소리에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프를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 여우와 놀 수 있었다. 여우의 보라색 털은 마치 난로처럼 따뜻한 온기를 내 손에, 내 뺨에, 내 마음에 전해줬다. 그렇게 작고 온화한 동물의 손을 잡고 얼굴을 털 속에 파묻을 때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동물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소녀의 행복한 시간은 네르피 소녀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끝났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야?”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우며 뭇는 그녀의 얼굴은 수프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만약 평상시 같았다면 인간 소녀는 그 얼굴을 보고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들은 질문은 그녀의 웃음을 막은 듯 시원찮은 웃음만이 이어졌다. 그녀는 혹시 소녀가 여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걸까.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이 정적을 더 길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 네르피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니까.


“여기는 내 집이야. 우리 마을이 처음이야?”


이런 말을 하는 인간 소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네르피는 신경을 쓰지도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보다 그녀는 그 대답에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듯 다음 질문을 위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이 어디…….”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고양이 아가씨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든 지금은 이 소녀를 만났으니까. 그녀가 아는 그 친구랑 비슷해 보이는 조그마한 인간 소녀를 만났으니까. 그 친구가 생각나니까.


“그래. 여기는 처음이지. 소개해줄래?”


글썽이는 눈물에 뒤죽박죽 섞여버린 빛들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태연한 척 어설프게 살며시 웃는 네르피의 표정. 그런 그녀의 표정 다음에는 점점 빛이 사라져가더니 이내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흐르는 걸 참기위해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의 손길. 따듯한 품속. 다정한 마음. 그녀는 이리저리 섞여 어지러운 빛보다 따듯한 어둠이 좋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 여린 소녀는 사람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제야 붙잡고 있던 눈물을 놓아주었다. 눈 사이로 쌓여있던 두려움이 서서히 흘러 저 아래로 떨어져갔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두려움에 대한 미련도 없이 한껏 울었다. 그제야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무게들 하나하나가 허공으로 없어졌고 다정한 소녀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일어선 용기로 눈물을 닦아낸 인간 소녀는 네르피의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을 하기위해 아직도 떨려오는 목소리를 내었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기 싫어서. 그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난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 너의 질문에 답할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지만 그 전에 내 친구가 되어줄래?”


여전히 눈물자국이 선명한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고양이 수인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곧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 같다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도 고양이 수인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대화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린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야 비로소 소녀는 여우와 놀던 때와 같이 밝은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또 훔쳐버렸네, 너의 행복을.”


네르피는 깜짝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그녀의 뇌리를 스친 말이 입 밖으로 새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어린 인간 소녀는 눈치 채지 못한 듯 평범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런 건 행복을 훔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고 하는 거야.”


그녀의 대답에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휴지를 들어 고양이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네르피는 인간 소녀가 내민 휴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양이 소녀는 휴지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폭소하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가 짜증날 정도로 웃고 있다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뜩 알아챈 것이 있었으니. 고민하며 아래턱을 받치던 손으로 수프가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이내 손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고양이 소녀는 급히 휴지를 받아 들어 입 주위는 물론 머리카락도 확인해가며 여기저기 묻은 수프를 닦아내었다. 그럼에도 아직 닦이지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웃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인간 소녀는 휴지를 가지고 그녀의 코에 묻은 마지막 수프를 닦아냈다. 그 순간 바로 뒤에 있던 문이 힘겹게 열리는 소리를 내었다. 끼익.


“뭐하는 거야? 혹시 도둑?”


활짝 열린 문에서 튀어나온 소년은 잔뜩 놀란 표정으로 침대 위의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여우가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집안 여기저기가 어질러져 있었고 조금의 탄 냄새가 주방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침대 위에서 뒹구는 집주인과 낯선 사람. 주변 상황에 의해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고양이 소녀였지만. 명백한 오해였지만 꼭 그렇진 않아서 양심이 조금 찔렸다.


“그런 게 아니라. 새로 사귄 친구야.”


네르피도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그녀의 새 친구 또한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급하게 몸을 돌려 허둥지둥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자면 때를 쓰는 어린 아이 같았다. 맞은편의 남자아이도 만만치 않았다. 나이가 더 어려서 당연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보다 그 꼬맹이가 어른들을 불러오겠다고 난리를 쳐서 그걸 막느라고 고양이와 인간 소녀는 진땀을 뺏다. 30분이나 지났을까. 겨우 진정된 세 명은 번번한 탁자도 없이 거실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계속 신고하려고 했어?”


집주인은 꼬맹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아마 ‘다시는 그러지마.’같은 의미가 담긴 말투였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에 네르피는 의도치 않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누나는 도둑도 친구라면서 잡고 있을 것 같아서.”


순식간에 분홍머리 소녀는 그녀의 머리카락만큼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아무 말 없이 소년을 위협적으로 째려보기 시작했다. 네르피는 처음에는 살짝 웃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맞는 말이라서 웃을 수 없었다. 그래도 순수한 아인은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의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그리고 안도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왠지 친구로 계속 남아줄 것 같아서 말이다.


그 때 누군가의 째려보는 눈빛에 두려움에 떨던 어린양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마을 소개라고 했지? 내가 좋은 곳 많이 아니까 도와줄게.”


소녀는 그의 말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얼마안가 마을 소개에 동참할 것을 수락해주었다. 그러자 꼬마 소년은 그녀의 수락에 흥이 오른 것인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의 갑작스럽고 빠른 움직임에 소녀는 잠시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바로?”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있는 것인지 소년은 빠르게 뛰어나가 문을 열어 제치고는 집 밖에서 우리를 재촉했다. 바람도 그와 같은 마음인지 우리에게 손짓하듯 창문을 흔들었다. 아직 집 안에서 멍하니 바깥의 저 소년을 바라보던 두 소녀는 잠시간 아무생각도 없다 문뜩 떠오른 것에 분주해졌다. 그녀들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것도 모자라서 이리저리 뒹굴고 사고를 치느라 집안은 물론 옷이고 얼굴이고 엉망이었다. 한명은 급하게 어질러진 옷더미를 뒤져서 입을만한 외출복을 찾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으로 어떻게든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깥에서 보고 있던 소년은 얼마 안가 옷가지를 든 인간 소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곤 이내 쾅하며 시끄럽게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급격히 어두워진 시야를 느낄 수 있었다.


“보지마! 그리고 문은 왜 계속 열고 있어!”


소년이 바깥에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해가 머리 위로 올라왔을 즈음 그녀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엄청 시간을 들였는지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옷도 후줄근한 잠옷 대신 반듯한 외출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까?”


인간 소녀는 화창한 날씨를 올려다보며 마을에서 유명한 장소를 떠올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어릴 적 지나가며 보았던 장소들을 그리고 있자 / 뜬금없이 소년이 수인 소녀의 팔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은 생각 없이 뛰어다니는 게 제일이야!”


인간 소녀는 그녀의 친구를 데리고 멀어져가는 당돌한 소년을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네르피 소녀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소년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열심히 발을 내딛으며 달려 나갔다. 세 사람의 주위로 모든 것이 뒤로 흘러간다. 높이가 제각각인 건물들 사이로 저 멀리 펼쳐진 언덕과 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마차들 안에서 여러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카페와 그윽한 커피향이 스쳐지나갔고, 각종 과일과 채소들이 쌓여있는 식료품점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사라져갔다, 평화로운 돌길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날뛰는 그들을 향한 시선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 세 사람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달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이고 소녀고 힘든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마을 회관이란 간판 아래로 쌓인 붉은 담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겨우 쉴 수 있었다. 힘없이 축 쳐져 벤치를 향하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은 아직도 팔팔한 네르피가 보기에 귀엽게 느껴졌다. 그 두 사람은 힘겹게 공원 벤치에 다다르자마자 그 위로 쓰러져 거친 숨을 고르기 바빴다.


오랜만에 외출한 소녀는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한 장난꾸러기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 줄 작정이었지만 숨쉬기만으로 벅찬 소녀는 먼저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끝내 충고의 말을 잊어버리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그런 두 명을 남겨두고 고양이 소녀는 아직도 힘이 넘치는지 여전히 광장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광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분수대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푸른 나무들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무지개가 펼쳐져 장관이었다. 네르피의 비취색 눈동자에 담긴 알록달록한 색깔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그럼에도 둔한 고양이 소녀는 깨닫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는 잠시 후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와 소년은 충분히 쉬었는지 벌써 벤치에서 일어나 고양이 소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위로 내려진 알록달록한 무지개의 그림자는 아름다웠다. 그들도 깨달은 건지 시야를 빛으로 가득 채우고 만끽했다.


“무지개 정말 예쁘다. 빛으로 된 커튼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인간 소녀는 남자 아이의 말에 동의하며 빛의 일렁임을 한껏 느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렁이는 빛에서 도망쳐 따뜻한 어둠에 몸을 기댄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 벌써 일렁이는 빛과 친해진 것이다. 소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 문뜩 떠올라 네르피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몇 번 눌러 그녀의 시선을 끌어 얼굴을 맞대고 입을 열었다.


“혹시 저기 가보지 않을래?”


그녀의 고양이 친구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하게 튀어나온 언덕, 바람에 일렁이는 잔디의 물결, 정상에 자리 잡고 적당한 그늘을 만드는 거목. 딱 봐도 그곳에 오르면 좋은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을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처럼 보였다. 그런 이유로 네르피는 고개를 끄덕여 쉬이 수락하려했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을 때, 인간 소녀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쓰러져있던 곳”


그녀의 말을 들은 수인 아이는 고개를 들기를 머뭇거렸다. 그 순간 빛의 커튼이 고양이 소녀 위로 내려왔다. 금빛이었던 머리카락이 여러 가지 색으로 번졌고 이내 네르피의 시야까지 빛의 일렁임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득해지는 시야 저편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왔다.


“일어나”


희미한 의식 속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고동. 그 너머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색들이 보였다. 푸르른 하늘. 그 밑으로 쏟아지는 햇빛. 네르피 소녀가 다시 눈을 뜨자 일렁이는 빛의 물결이 여전히 그녀를 덮고 있었다. 무지개가 곧 그녀에게서 멀어지자 그녀는 곧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녀는 똑바로 서있는 상태로 무지개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시야는 온통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 누워있는 거지”


고양이 소녀의 여린 목소리를 들은 인간 소녀와 소년은 그녀의 얼굴 위로 고개를 내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르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도 온통 뒤죽박죽 섞인 듯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겨우 몸을 일으킨 고양이 소녀는 그녀의 눈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방금 전만해도 올려다보던 광장 분수대가 저 아래에서 조그마하게 있었다. 달려가며 지나치던 식료품점도, 카페도, 한 눈에 보였다. 그녀는 인간 소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던 잔디 언덕 위에 서있었다. 그 순간 의식을 잃기 전에 소녀가 했던 말이 네르피의 뇌리를 스쳤다.


‘내가 스러져 있던 곳’


그녀는 한동안 멀뚱멀뚱 발밑에 펼쳐진 마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양이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래도 소녀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용기를 얻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그래? 이상한 거라도 찾았어?”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수인 아이의 고양이 귀로 흘러들어갔다. 다행히 네르피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양이 소녀 또한 아침의 일이 기억났는지 여자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피해버렸다. 또 이상한 질문으로 마음 여린 소녀를 또 울려버리는 건 아닐까. 네르피의 마음속에서 언젠가부터 알 수 없이 생겨난 죄책감이 폭풍처럼 일었다.


인간 소녀는 그녀의 친구가 자신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최소한의 대답을 듣고자 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왜 이야기 할 수 없는지, 그 이유라도.


“혹시 그거 때문이야?”


소녀가 마음에 걸리는 ‘그것’에 대해 물어보자 수인 아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질문을 던진 소녀는 그녀의 반응에 크게 동요했다. 당황한 기색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작게 혼잣말을 흘렸다.


“설마.”


아직까지도 여린 소녀는 자신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미래에 과연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의 인생에는 좋지 않은 일이 즐비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거?”


그녀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간은 그녀를 빠르게 쫒아오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이야기 안으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누나가 지금 걸고 있는 목걸이 말이야. 기억 안 나?”


인간 소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소녀 스스로 너무 우스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너무 신경을 곤두세운 탓일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멍하니 하늘 아래로 나무가 산들산들 흔들리자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네르피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 위에 작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여기에 쓰러져 있던 것도 기억상실 때문일 수도…….”


소년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그도 소녀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소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소년의 웃는 얼굴은 가면일까. 그럼에도 우리의 둔한 고양이 수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말에 진짜로 소녀 치매인지 걱정할 수인이었다. 지금은 그저 목걸이를 손에 들고 유심히 살펴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해줄 수 있어?”


소년은 청록색으로 투명하게 물든 목걸이의 보석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은 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 그가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광장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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