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운 제도의 분리독립 문제

아이운 제도의 분리독립 문제(愛運諸島の分離独立問題)세이카의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아이운 제도에서 러시아계의 주도로 발생하고 있는 분리 독립 논의이다.


아이운 제도 공화국 주장자들이 제안하는 깃발
아이운 제도 자치주의 깃발

러시아계의 태동

아이운 제도는 세이카의 끄트머리 부분에 있어 현재도 개발이 진행중인 제도로, 인구는 약 547,000명 (2012년)이다. 아이운 제도는 개척기에 발견되어 세이카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멀고 추운 지방이여서 다른 지역에 비해 덜 개척되고 관심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아이운 제도는 사실상 방치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1917년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 성립되었고 적백내전 등이 일어나는 등 국가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생활이 힘들어진 러시아의 일부 농민이나 서민들은 생활에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겐소지마 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떠나 새출발을 하고자 하였고, 러시아인들이 1910년대 후반부터 아이운 제도로 상륙하게 된다. 특히 극동이 러시아인들이 아이운 제도로 많이 상륙하여 일종의 러시아계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척박했지만 러시아보다는 나았던 세이카의 생활에 잘 적응해가며 부락을 여러개 형성하며 작은 국가와 비슷한 규모로 발전해 나아갔으며 러시아계는 세이카 본토의 정권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1930년대 중반까지 서로에 대한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운 내전

1930년대 중반에는 탐험가들이 아이운 제도의 러시아계 세력을 발견하며 본토에도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다. 러시아계 부락은 탐험가들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며 공격을 가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고, 본토의 정부는 이들의 정체를 보고받고는 이들이 국가에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토벌에 나섰다.

러시아계들도 세력을 갖추고 있던 만큼 이는 내전급으로 커지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은 우리가 힘들게 얻어 낸 새로운 터전이다"라고 선언하며 세이카군에 대항하며 의용대를 꾸렸으며, 세이카군은 이를 토벌하게 되며 아이운 내전이 발생하여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약 4년간 아이운 제도에서 세이카 본토와 러시아계의 내전이 발생하였다. 러시아계는 수적 열세를 돌파하기 위해 게릴라전과 지형 변화를 이용한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초기에 세이카 본토에서 온 토벌군은 이에 고전하였으나 점차 수적으로 우세한 토벌군이 러시아계를 제압해 나기기 시작하며 1938년 경에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운 제도가 세이카군의 점령 하에 떨어지고 소수의 러시아계가 게릴라전으로 저항을 계속할 뿐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1939년 3월에 마지막 게릴라 부대였던 "하라스크"가 토벌되며 아이운 내전의 종결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세이카의 지역감정 및 인종갈등의 뿌리가 태동하였으며 러시아인이 일본계와 함께 세이카의 주류 민족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종전 후 분리독립 운동 논의

이후 러시아계는 일본군의 아이운 제도 침략과 세이카군으로의 강제 징용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그로 인해 종전 이후 "러시아계의 자주"를 넘어 "러시아계만의 국가" 주장이 점차 나오기 시작하여 이는 아이운 제도에서의 러시아계 분리 독립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던 러시아계들의 호응을 얻어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이카 당국은 이를 탄압하였으며 주동자들을 납치, 체포하는 등의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세이카 정부는 2003년 이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러시아계는 뭉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53년 이시로 섬에서 러시아계 청년 한 명이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 불씨가 되어 러시아계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던 것이 점차 분리 독립성 시위로 변질되어 마침내는 이시로 섬에서 군중 20,000여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행한 '러시아계 투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러시아계 투쟁은 아이운 제도의 다른 섬들에도 번져 러시아계만 약 85,000명이 참여한 대형 시위로 커졌으며 본토에서도 러시아계들이 시위를 진행하게 될 정도로 대형 시위로 커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계 각지에 세이카의 러시아계 분리 독립 문제가 알려졌으며 세이카의 사회 문제로 커져갔다.

이후 발레리 락티오노프가 '아이운 시민당'을 창당하여 아이운 러시아계 민족주의와 아이운 분리독립을 노선으로 내세우며 아이운 제도에서 큰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이후 아이운 특별주의회의 의석을 대부분 석권하는데 이어 원내에서도 2석을 얻으며 원내정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러시아계는 아이운 시민당의 주도 아래에서 시위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를 좋게 보지 않던 정보국에 의해 1964년 아이운 시민당의 내란 음모를 조작하여 그를 증거로 헌법재판소에 정당심판해산청구를 낸 "아이운 시민당 내란음모 조작사건"이 발생하였고, 아이운 시민당은 1964년 12월 19일 정당 해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계는 오히려 더 투쟁하였고 아이운 시민당이 해산되자 평화적으로는 분리 독립을 이룰수 없다고 판단한 과격파 무리도 등장하여 아이운 제도의 테러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아이운 제도의 테러 집단

1989년 촬영된 SRU 병사

이후 1967년 아이운대 교수였던 발레리 비콥스키(日名 - 季堂鋭太)가 무장 테러단체인 "러시아인의 영광"을 창설한 뒤 아이운 제도에서의 러시아계의 진정한 해방을 천명하며 아이운 제도의 테러 집단이 태동하게 된다. 그 뒤 과격파들이 "SRU", "대러시아 동맹", "아이운 해방 전선" 등의 테러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으로 아이운 제도에서는 이들의 테러로 인한 사건 사고가 다발하여 아이운 제도의 1970년대를 총과 폭탄의 시대라 하여 총탄 아이운 시대(銃彈愛運時代)라고 지칭한다. 1969년 이시로 섬에서 SRU가 경찰서를 습격하여 테러를 자행한 "이시로 경찰서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1972년 미카 섬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마을 점거를 시도한 "미카 후시로 마을 습격 사건", 1974년 러시아인의 영광이 우나미 섬을 무단 점거하여 약 4년간 내전을 벌인 "우나미 섬 점거", 1976년 아이운 해방 전선이 이시로 섬에서 일본인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사건인 "이시로 대학살", 1978년 미카 섬에서 대러시아 동맹이 마을지서와 경찰서 등을 습격한 "미카 섬 대습격"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그 뒤 세이카 국민들은 불안감으로 인하여 정부에 안전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고, 정부도 1979년 4.21 선언을 통하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무관용 정책을 발표하여 강경진압을 천명한다.

그 뒤 특수부대나 군경을 동원하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진압을 천명한 이후 아이운 제도 일대에 진압 작전이 전개되어 1980년대는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잠시 중단된 것이지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였으며 숨어 있던 테러리스트들은 잠시 진압 작전이 느슨해 진 틈을 타 다시 1980년대 후반부터 준동하기 시작한다. 1988년 이시로 섬에서 일본인 3명이 납치된 사건을 시작으로 이들의 활동이 다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1990년대 "소러시아 공화국"으로 등장하며 세이카 현대사 최악의 괴뢰 국가를 탄생시켰다.

소러시아 공화국

소러시아 공화국이 점거한 당시의 신노스케 마을

1992년 11월 아이운 제도에서 활동해오던 러시아계 무장 테러단체인 "러시아인의 영광", "SRU", "대러시아 동맹" 등의 단체(미 국무부에도 등재된 테러단체이다.)가 '러시아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며 동맹 및 결속 선언을 하고 1993년 1월 아이운 제도의 끄트머리 부분에 있는 스키모토 섬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 이토모리 마을(오브라코스크로 개칭당해 수도가 됨), 미츠시카 마을, 신노스케 마을 등을 점령하였으며 스키모토 섬의 경찰서와 군부대, 공공기관을 급습하여 행정권과 치안을 장악한 뒤 소러시아 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후 세이카는 이를 "잔악무도하고 잔인한 테러집단들의 만행을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며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을 선언하였고, 이로써 아이운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타키 섬, 혼모스비 섬, 나이카 섬 등에도 상륙하여 다수의 섬들을 점령하였고 초기에는 게릴라 전술과 지형 등을 이용한 기습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일도 있었으나 잠시였고 곧 밀리기 시작하며 서서히 마을들을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자살 폭탄테러나 민간인을 인질로 잡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발악하였고 1995년이 되자 확실히 밀리게 되어 수도로 삼은 스키모토 섬과 몇개의 작은 섬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이카군이 탈환하게 된다. 그 뒤 1995년 10월 미츠시카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큰 타격을 입고 1996년 4월 모든 병력(군경과 자경단 등을 총동원)을 총동원하여 벌인 신노스케 전투에서도 패하며 사실상 멸망이 확정되었다. 이후 7월까지 끈질기게 버티다 이토모리 공성전에서 밀리며 7월 28일 수도가 점령당하여 멸망하였고 저항하던 잔존세력들도 8월 8일 도피하여 소멸하였다. 이 소러시아 공화국은 아이운 제도의 테러 집단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러시아계들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었던 것으로, 초기에는 러시아계의 지지를 받았으나 폭정과 잔인함으로 인하여 지지를 잃어가 결국 테러 집단들이 일망타진되게 만든 테러 집단들 최악의 자충수로 평가받고 있다.

화합 정책의 개시와 융합 노력

1998년 키시오 다이스케(岸尾大輔) 총리는 "세이카의 민족은 여러 개다. 하지만 세이카의 국민은 하나다."라고 선언하며 러시아계뿐만 아니라 기타 민족과 일본계가 사이좋게 지내며 화합하고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융합 정책을 주장했다. 소러시아 공화국 이후 일본계 내부에서도 쇄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기에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였으며, 교과서에서도 일본계 뿐만 아니라 러시아계도 세이카의 주류 민족으로 실렸으며 러시아어도 공용어 중 하나로 인정받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러시아계 정당도 나와 러시아계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과격파도 사실상 퇴출당해 러시아계들도 온건한 융합 정책 속에서 성공적으로 다시 일본계와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걷게 되었다. 2005년에는 세이카 최초로 러시아계 총리인 발레리 치칼로프도 나오며(2007년까지 집권), 러시아계도 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맡으며 세이카는 일본계와 러시아계가 화합하며 지내는 국가로 재탄생하였다. 그 결과 분리독립 여론은 많이 사그라들었고, 2003년 아이운 제도가 아이운 특별자치주로 재편성되며 러시아계의 자치가 보장되고 러시아계의 문화 보호와 발전, 권익 향상을 보장하게 되며 분리독립 여론도 2012년 기준 분리독립을 지지한다는 여론이 22%에 불과할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현재까지도 소러시아 공화국의 잔존 세력들은 일본이나 한국 등지로 도피하여 "러시아계의 해방과 봉기"를 주장하지만, 현재 러시아계 중 과격한 일부를 제외하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을 거의 사라졌다. 이는 융합 정책의 성공적인 진행에 힘 업은 것으로, 온건적인 화합으로 인해 러시아계들도 "테러 집단의 과격한 주장대로라면 결국 싸움만 일어나고 모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2012년 조사 결과 80%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