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2020 - 2021 |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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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독립 전쟁
Irish Independence War
아일랜드 독립군 진영의 바리케이드. 신 페인(아일랜드의 민족정당)에 투표하라고 써져있다.
기간 1949년 1월 3일 - 1949년 10월 7일
장소 아일랜드 자유국
북아일랜드
원인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의 대두
결과 대영제국의 승리
  • 더블린 협약 체결
  • 아일랜드 자유국 해체
영향 탈식민지주의의 퇴조
교전국 대영제국
얼스터 홈가드
지원국
일본
프랑스
아일랜드 공화국군
아일랜드 공산당
지원국
소련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휘관 클레멘트 애틀리
버나드 로 몽고메리
루이 마운트배튼
휴 다우닝
이먼 데 벌레라
리처드 멀케이
피카델리 노턴
제임스 로루아
병력 정규군 30,532명
  29,583명
  949명
홈가드 5,043명
정규군 10,522명
비정규군 162,598명
  봉기군 102,483명
  공산당 60,115명
피해 132명 사망
203명 부상
2명 실종
1,052명 사망
10,038명 부상
1,143명 실종

개요

1949년 대영제국 아일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영국군과 이일랜드 독립군 사이의 전쟁.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던 아일랜드 독립파가 전쟁에서 패하면서 현재까지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분으로 남게 되는 직접적인 영향을 제공했으며, 1946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대두되던 탈 식민지화를 부분적으로 저지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독립군과 영국군 양측의 방화와 대규모 학살 등으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는 전쟁이다. 1949년부터 현재까지 아일랜드 전역에서 극좌 독립 단체의 테러로 인해 국지적인 전쟁을 지속되었으며, 1998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직접 이에 대해 사죄하고 아일랜드 자치령을 설치했다.

발단

1922년 아일랜드 내전에서 아일랜드 자유국을 인정하자는 조약파와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던 조약반대파가 맞붙었고, 결과적으로 조약파 진영이 승리하면서 아일랜드의 완전무결한 독립은 저지되었다. 또한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26개주만이 독립하게 되면서 성공회 신자가 다수였던 북아일랜드와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아일랜드가 분단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1947년 인도제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전세계적으로 탈식민지화 운동이 가속화되던 상황이었고 이에 강경 독립파 진영에서는 194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더블린 시내에서 아일랜드 자유국의 완전 독립과 북아일랜드 반환을 주장하는 더블린 행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자유국 경찰이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기 발포를 하면서 12명이 죽고 16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피의 크리스마스 이브'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아일랜드 내에서 민심이 흉악해지고 아일랜드 조약 찬성파마저 북아일랜드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자, 1948년 12월 10일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와 윈스턴 처칠 보수당 당수가 협의하여 아일랜드 자유국을 폐지하고 영국 직할령으로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통과된 직후 자유국 정부 수반 이먼 데 벌레라는 '우리는 영국에게 속았으며, 애시당초에 영국놈들이 아일랜드를 독립시킬 생각은 없었다'라며 무장 독립으로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자는 연설을 했고 이에 조약 반대파와 찬성파가 뭉쳐 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전개

1949년 1월 3일, 더블린에 위치한 영국인 구역이 아일랜드 공화국군 민병대의 습격을 받으면서 3명의 영국인이 사망했고, 이에 영국이 제국함대를 동원해 더블린의 항구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개전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총합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가톨릭 신자들의 도움으로 아일랜드군이 유리했다. 전쟁 극초반에는 더블린 등 일부 도시의 치안권이 넘어간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1949년 1월 30일 골웨이를 비롯한 아일랜드 전역의 통제권이 아일랜드 공화국군에 넘어갔다. 또 아일랜드는 물론 아일랜드계 출신 이민자들이 많은 리버풀맨체스터 등의 도시에서도 공산당원들과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1949년 3월 1일 들어서는 성공회 신자가 많아 영국군이 유리했던 벨파스트를 제외한 아일랜드 전역이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특히나 후일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련군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과 처칠이 주도했던 반공 정서에도 불구하고 여러 영국 지식인들이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등 반소 진영의 좌파 지식인들 역시 영국을 비난하며 아일랜드의 독립을 촉구해 1949년 중순에는 영국이 크게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소련의 여론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지원한 무기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 외무부는 결국 아이슬란드에 부탁해 소련에게 자국 영해 통행을 금지시키라고 했지만, 대구 전쟁으로 영국과 관계가 나빴던 아이슬란드는 이를 거절했다. 1949년 5월 25일 아일랜드 뿐 아니라 북아일랜드 남부의 3개주도 아일랜드 독립군의 진영에 떨어지면서, 아일랜드 독립은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영국은 1949년 4월에서 6월까지는 얼스터 지역의 홈가드를 동원해 민병대로 막아내고 있었고, 또 북아일랜드 3개주는 성공회가 다수였기 때문에 IRA의 공격에도 버티고 있었다. 거기다가 1949년 5월 알제리의 독립을 우려한 프랑스가 영국을 지원해 패전 직전까지 갔던 영국은 숨을 돌리게 되었다.

국제여론은 아일랜드를 지지하는측과 지지하지 않는 측으로 나뉘었다. 다만 2차대전에서 연합군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던 영국이었기에 아일랜드 반대를 공산주의 및 추축국으로 몰릴 여지가 있었고, 미국 국무부에서 명확한 입장 표시를 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영국군을 지원했다. 소련 측에서는 아일랜드를 공식적으로 지원했고 공산권 역시 소련을 따라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지지했다.

결과

영향

반응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