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공 (서태평양 연대기)

개요

양녕공 이제(李褆)는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시인, 화가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실질적인 적장남이자[1] 세종의 큰형이다.

조선왕조에서 최초로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책봉된 세자이자 최초로 폐출된 적장남으로,[2] 이후 조선과 중원대륙을 오가며 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이라는 동아시아사의 대격동을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394년(태조 3년) 한성의 정안군저에서 정안군 이방원과 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자 시절

폐위와 명나라행

천보의 변

말년

평가

폐위를 전후한 각종 미스테리한 에피소드와 이후의 행보로 인해 그야말로 조선전기 최고의 슈퍼스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수많은 기행을 두고 일부러 왕의 자리를 사양했다거나 하는 추측은 이미 그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조야를 가리지 않고 횡행했을 지경이다.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시 폐세자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 이른바 '염마 소동'이다. 이를 두고 그저 왕이 되지 않기 위해, 좀 더 극단적으로는 태종이나 세종 쪽에서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꾸며낸 조작 내지는 쇼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양녕이 조천길 도중 낙마한 이후로 계속해서 "괴력난신은 실재한다"거나 "염마(염라대왕)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치 귀신들린 듯한 행동을 보인 정황이 너무나 세세하고, 심지어는 명나라에 가서도 자신이 염마와 소통할 수 있다면서 천보제를 구워삶고 명나라 도사들마저 그에게 벌벌 긴 모습이 조명 양측 기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낙마 당시 머리를 다치면서 일종의 해리성 정체장애를 겪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제시된다.

그러나 왕위포기론, 회피론이 아직도 대중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본인 역시 이를 시사하는 행적들을 다수 남겼기 때문이다. 조천길 낙마사고 이후의 그 임팩트 강한 행적에 묻혀서 그렇지, 이미 출발 전에도 명 태자가 주고후이며 연왕세자 주고치는 이미 정난의 변 초기에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는 듯 멘붕하는 모습도 보이고, 명에서 주고후를 만나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놓고는 돌아와선 동생 충녕대군에게 "저 인간 황제 되면 난 상대할 자신 없는데 머리 좋은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며 대놓고 디스했다는 기록도 있다.[3] 사실 양녕은 태종과 함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본 조선조 유이한 세자인데,[4] 조선 국내에서 후계자 수업만 받을 땐 절감하지 못했던 냉혹한 대명외교의 현실을 직접 겪어보면서 멘붕에 빠진 게 아니냐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직접 쿠데타까지 일으킬 정도로 강철멘탈인 아버지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양녕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본인 멘탈도, 상대의 수준도 받쳐주질 못했다는 것이다.[5]

어쨌든 그렇게 질색팔색을 하던 천보제 주고후가 정작 폐세자 된 이후 자신을 부르자, 양녕은 엄청나게 투덜대면서도 결국 조선을 떠나 그에게 가는 길을 택했고, 끝내는 그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이후 회북을 접수한 후원 조정에서는 그에게 태사세자자부 자리를 주면서까지 극진히 우대한 탓에, 사실 천보의 변의 흑막이라는 주장이 현대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남북조시대의 헬게이트가 열린 중원에서는 거의 "조선에서 독을 풀었다" 수준으로 증오했고, 그 헬게이트의 여파로 무지막지한 군비부담에 시달리는 동시에 남명으로부터는 천보의 변의 공범 내지 기획자라는 의심까지 받게 된 당대 조선에서도 양녕은 영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죽하면 세종이나 효령도 어차피 후원에서 대접 잘 받고 있다 하니 지금 절대 들어올 생각 말고 꼭 붙어있으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여담

  1. 위로 3명의 형이 있었으나 모두 이제가 태어나기 전 요절했다
  2. 양녕 이전 왕실 최초의 적장남이었던 진안대군 이방우가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밀려나기는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책봉이 되지 않았으니 폐출된 것도 아니었다.
  3. 문종정대왕실록, 문종5년(을해) 2월 11일.
  4.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봐도 왕위계승자가 외국에 사신 갔다 온 사례는 찾기 힘들다. 다만 태종은 세자가 아닌 정안군 시절에 다녀왔다.
  5. 물론 중국사에 손꼽히는 명군인 영락제(당시는 연왕)나 주원장이 자신과는 다른 스타일로 교육시킨 태손(건문제)을 만난 태종과, 중국사에 손꼽히는 암군인 천보제(당시는 태자)를 만난 양녕의 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다. 즉 태종이 '파트너가 이 사람이라면 해볼만 하지'라면, 양녕은 '파트너가 이꼴이면 그냥 안할란다'가 아니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