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母靈影仰姸畵』에 묘사된 천모 에리스. 1420년(명화 12년)진인오승명(辰仁烏陞冥)
"祈天母兮。爲存我兩親於恩、爲生我祖國於恩、爲德我制法於恩、只報盡全生、使允德之流、以隨母元義、刻心孝忠遵、以生聖潔之。."
"에리스님께 비나이다. 나를 존시키신 양친어은(兩親於恩)에, 나를 생시키신 조국어은(祖國於恩)에, 나를 덕시키신 제법어은(制法於恩)에, 전생(全生)을 다해 보답하게 하시옵고, 윤덕(允德)의 흐름으로 하여금, 천모님의 원의(元義)를 따르게 하여, 효(孝)와 충(忠)과 준(遵)을 심저(心底)에 새기고, 성결(聖潔)한 인생을 살게하시옵소서 "
에리스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문인 도천모주문(禱天母呪文), 한국어로는 '에리스께 올리는 기도'라고 한다.

개요

에리스교(惠梨主敎)란 만화국의 토착 종교를 가리킨다. 천모교(天母敎)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만화국 전체 인구의 70% 정도인 5천만명이 신앙하는 종교임과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유일신 신앙이며, 하늘님(平天樣)(가누아가로)의 뒤를 이은 여신으로서 존재하는 만물의 어머니(億萬之母)이자 지혜의 신인 천모(天母) 에리스(惠梨主)를 섬긴다. 기본적으로 천모 에리스 이외에도 여러 신이 존재하나, 숭배 대상이 에리스 여신에 한정되기 때문에 유일신신앙인가 다신교신앙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

이비광시기 까지만 해도 북부 다마도의 민속종교로서의 영향력 정도였던 에리스교는, 그 주신인 에리스라는 이름 또한 아리승(雅利僧)이나 개모님(皆母)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체계화 되지 않았으나, 전도시대와 다마국의 성장으로 점점 그 세가 불어 났으며, 전도시대 말기쯤엔 전국으로 퍼지게 되어 국가종교로서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체계화가 되기 시작하여 정본에만 존재하던 신전인 융모전(隆母殿) 이외에도 여러 지역에 에리스를 모시는 신당인 윤천옥(胤天屋)이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정본 융모전의 대사제였던 융모증사(隆母曾使)가 종교지도자인 모윤법제(母胤法帝)로서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다마시대 초기에 불교가 들어왔으나, 세를 펴지 못하고 에리스교와 신불습합이 이루어졌으며, 이 때부터 에리스신은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천모의 아버지인 하늘님(平天樣)은 본초불의 현신으로 취급받았다. 이에 기초하여 지어진 종파가 옹헌대사의 긍계종(亘繫宗)이며, 이는 현재까지 영향을 미쳐 만화국 내의 최다수의 종파가 되었다.

다마시대를 거치면서 체계화된 에리스교는, 융모전(隆母殿)을 주축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며, 신화의 핵심을 담은 경전인 종지법윤서기(宗志法允書記)의 해석을 두고 종파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갈라져서 이단으로 분류된 종파가 바로 다강조증파(多綱照曾派)로, 이들은 전부 이단으로서 처형되거나 소수가 살아남아 탐라로 떠나 새로운 민속종교로 발전을 도모하나 실패한다.

분국시대에 도래하면서 연고지인 북부에 새로운 국가인 몽야마국이 세워지고,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자, 모윤법제의 융모전을 비롯한 대다수의 정통 에리스교 신자들이 남부의 만화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새로운 융모전을 성경에 건설하고, 남마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에리스교는 북부의 몽야마국을 지지하는 북마 에리스교와 정통성을 가진 남마 에리스교로 분리되었다. 북마 에리스교는 신불습합의 교리를 강조하여 에리스 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남마 에리스교는 불교에서 분리된 보다 자유로운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남마 에리스교는 방서국 당시 공화제의 실시로 인해 약해진 국가지도권을 비집고 들어와 종교지도자인 모윤법제의 힘이 크게 강화됨을 통하여, 방서국의 민제왕이 새로 즉위하면 에리스의 법통을 잇는 정통성을 가진 호륜대왕(護侖大王)의 직위를 하사하는 등의 아주 큰 권위를 행사하였으나, 개령국이 세워지고, 여씨 왕조가 자신들을 에리스교의 신 중 하나인 정의의 신 '호라스야'(法羅壽耶)의 현인신인 태굉제왕(泰宏帝王)을 자처하여 정교합체를 시도함으로서 그 위세가 상당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령국의 철권 통치는 국민들의 크나큰 반발을 샀으며, 이윽고 성사명국이 세워지면서 다시 모윤법제가 득세하게 되었다.

한편 북마에서는 이후 몽야마국이 멸망하고 아사모국이 세워지자, 북마 에리스교에서도 불교와의 연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이윽고 남마 에리스교와의 차별성이 거의 없어지자 소수파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전쟁이전까지의 교류가 왕성하였던 성사명-아사모의 교류시기동안 북마 에리스교는 남마 에리스교와의 잦은 교류를 통해 통합하게 되어 소멸하였다.

이후 아사모의 통일전쟁이 개시되고 통일국가인 마나라(摩國)가 세워지게 되자, 통일군주였던 홍희래는 통일국가로서의 만화국을 새로이 세우면서,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당시 모윤법제였던 조제(祚帝)와의 종교거래를 하도록 하였다. 적국이었던 성사명국의 종교지도자였던 점을 눈감아주는 대신, 새로운 법통자로서의 본인을 황제로서 지지해주며, 이에 걸맞는 교리를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제(祚帝)는 성전 중 하나인 '대승공윤문지(大承鞏胤文紙)'에 나오는 천모 에리스의 지상세계의 파수꾼인 홍광룡(紅洸龍)을 홍씨 왕조와 연관지어, 에리스의 명을 받고 전 만화국의 통치자로서 이 땅에 강림한 홍광룡의 직계 후손이 홍씨왕조라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홍희래는 1332년 '천국제제(天國製題)'를 선포하고 만화국의 황제국임과 본인의 천제(天帝)임을 선포하였다.

천국제제 이후 모윤법제의 힘은 나날히 약화되어, 복법천제(1473~1511)의 대에 이르러서 모윤법제는 말 그대로 초기의 제사장 정도의 위치로 추락하게 되었다. 이에 마지막 모윤법제인 도제(燾帝)가 차기 모윤법제로서 복법천제를 임명하고 복천(復天)하면서 천제의 위상은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이후로도 에리스교는 만화국의 중심종교로서 역할을 하였고 특히 공종(1542~1589)의 대에 들어서 광희모윤공지(光熙姆奫空紙)가 쓰여지는 등 종교적인 발전이 성했다. 그러나 1645년 정종 대영천제가 암살당하고 영본군 체제가 들어서면서 에리스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욱흥왕이라는 왕호를 쓴 1대 영본군 양정수는, 대영천제의 붕어를 빗대어 '만화국의 위기'로 포장하였다. 이에 현 상황을 이끌기 위해 차기 천제였던 영종이 직접 임명한 적통있는 영본군인 자신의 통치가 만화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낼 것을 주장하며 '영본군 지도론'을 설파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영종을 궁에서 내보내 성경의 융모전에 가두고 사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영본군을 따르는 파벌의 교단을 '욱흥 천모교'라고 분리해서 부른다.

욱흥 천모교는 일단은 공식국교였으나, 평성대기근 이후 이를 믿는 신도는 거의 없었으며, 정통 에리스교는 지하에서 계속 유지되어왔다.

이후 임신천환이 이루어지고, 근대화와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이슬람교나 기독교가 유입이 되었으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에리스교의 이단취급을 받으며 소수종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명한 근대시기 에리스교학자이자 무녀였던 요찰무낭(曜刹巫娘)등은 예수나 알라를 에리스교에 있는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보는등의 새로운 시각등도 제시하였다.

일제항전기 시기를 거치면서 에리스교는 민족종교로서의 성격도 띄게 되었다.

체계

융모전

모윤법제


母胤法帝
모윤법제 | MOINBOSEI
현직
홍경락 제신영석 / 제90대
재위기간
2020년 8월 13일 ~ 현직
연호
건호(建護)
관저
정본융모전
임기
종신
성립
550년 10월 5일 (대교각신)

도관경

대사교

신관옥

윤천대사

관옥승

윤천옥

무랑, 무낭

주요 문헌

주요 문헌은 크게 5가지이나, 이 이외에도 여러 문헌이 존재한다. 여러 장으로 묶여있는 서적은 기(記)라고 하나, 단순히 주문을 다루는 주문서등은 지(紙)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종지법윤서기

종지법윤서기는, 대군집정이 이뤄지던 730년에 남마 에리스교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성문 경전으로, 에리스교 신화와 에리스교의 교리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는 모윤법제가 중심이 되는 체제였기 때문에, 에리스교의 대사제로서 모윤법제의 역할과 중요성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후 동서대전을 거치고 모윤공제 세력이 몰락하게 되면서 홍룡을 중심적으로 서술하는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가 바로 '홍룡시영명기'이다.

혜리주법주지

혜리주법주지는 1090년 성사명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남마 에리스교의 기도문으로, 모든 에리스교의 기도문 중 가장 중요한 기도문으로 간주된다. 사본이 여럿 제작되거나 원본이 소실되거나 하는 다른 문헌들과는 달리, 남마에리스교의 총본산인 적경윤천옥에서 통일 이후 정본 융모전으로 옮겨진것 이외에는 어떠한 훼손이나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보관되어있다. 모윤공제 체제에서 만들어진 기도문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등의 문제가 없기에 종교통일의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기도문으로서의 위치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대승공윤문지

홍룡시영명기

광희모윤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