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기 제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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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기
제0장

처음으로 장교로 배치되었을때, 나는 작전실에서 한 반야만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곧은 눈매로 늙은 주름에서까지 눈빛이 강인하게 솟아났는데, 자애로움과 지혜가 깊게 담겨 있었으므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온 장교로군."

"아,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인사를 한 박자 늦게 하였으니 나는 혼날 것을 걱정했다. 장교라는 것은 무릇 계급에 기반을 둔 관료제의 일종으로, 그 계급을 곧게 새워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반발해왔고, 나 또한 속으로는 영 신통치 못하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그런다고 바뀔 일이었다면 먼 옛적에 바뀌었을 터다.


"아, 저."

"젊은 애가 들어와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나?"

"저희도 늙진 않았습니다."

"에라이, 자식들아. 헛소리 하질랑 말고. 너네가 늙었으니까 애가 벌벌 떨지."


얼타고 있던 것에 노하실까, 벌벌 떨고 있었건만,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긴장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보였고, 오히려 분위기를 타박하기까지 했다. 그런 반응에 다른 장교들도 웃으며 이것이 일상적인 광경이라고, 내게 넌지시 알려 주었다. 사관학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었다.


"예?"

"긴장 많이 했을 텐데, 쉬어라."


사람들은 분명 그를 반야만인이라고 불렀고 불신했다. 테르만티우스를 믿은 것은 황제와 그 병사들뿐이었고, 다이모니아의 귀족들은 도저히 야만인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국경 너머의 이어족(異語族)인데 도대체 이어족인 그가 어떻게 자기 동포를 배신하겠느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그는 그런 인종의 인물이 아니었다. 민족이나 그런 것에 감정이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히 말하건데 테르만티우스의 혈통은 제국에 속한 지방의 것이었을 뿐더러, 그는 자기 정체성을 제국에 더 두었다.

사관학교에서 겪었던 온갖 정신나간 인간군상에서는 다이모니아의 제1시민들도 많았다. 야만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훌륭한 귀족이라고 자부하는 인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렇게 훌륭한 리더십과 또 애정을 겸비하지는 못했다.


"나는 귀족이야. 이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계급은 중요한거야. 급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지."


이러한 얼토당토않은 언어들은 그 귀족들로부터 나왔으나, 충성과 애정과 리더는 반야만인으로부터 나왔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이다. 언제나 충성을 자부하고 있던 제국의 귀족들이 성곽 안에서 벌벌 떨고 항복만을 꿈꿀 때, 항상 최선두에서 맞서 싸우며 다치고 잃고 아파오는 사람은 내가 만난 그 야만인이었기 때문이다.

군단의 군기. 흘러내리는 피. 다쳐 떨어진 내장. 울려 퍼지는 총성. 차가운 검명. 고통스런 비명. 죽음. 약탈. 강간. 협박. 사형. 나는 그 모든 장면에서 도망치지 않고 지켜보았던 테르만티우스를 기억한다. 너무나 오래 되어버린 그적의 군복은, 해지고 찢어져서 당시의 번쩍였던 빛을 잃어버렸으나, 우리들은 그것에서 여전한 광휘를 느낀다.

이러한 연유에 따라, 위대한 야만인을 추모하면서 이 글을 쓴다.

에우케리우스, 가이사릭시아의 수도 카르타에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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