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역사

개요

온성그룹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서모릴 시기

흔들리지 않는 1위 온성(Onsung)의 역사 통합편
1952년 당시 주식회사 서모릴 상회의 모습

오영환 정부 시절인 1952년 1월 5일, 새마을정미소 주인이었던 정환이 금성시 남항동에 서모릴상회를 개업한 게 본 그룹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금성항을 통해 국내외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팔았고 가축물, 농산물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볍고 기본적인 것을 주로 판매했고 해외에서 들여온 밀가루로 만든 항구국수와 아이스크림 등 먹을 거리도 판매했었다.

당시 서모릴상회는 직원도 10명 밖에 없는 등 훗날의 온성 그룹 형태와 비교하면 차이가 현격히 나는 편이었다.[1]

1952년 2월 8일에는 원선에 있던 소규모 건설사였던 '새미래건설' 을 인수 후 '서모릴종합건설' 로 이름을 바꿔 건설업에 진출하게 된다. 훗날 서모릴종합건설은 이름을 바꿔 서모릴건설로, 2000년 6월에는 서모릴물산에 인수되어 서모릴물산 건설부문으로, 2023년에는 현재의 온성물산 건설부문이 된다.

그러던 도중 1952년 3월, 온성이 현재 이 자리까지 성장할 수 있게 한 큰 변환점이 되는 3.22 군사쿠데타가 발생한다.

온성도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동안 여타 다른 기업들 처럼 수많은 제재와 수많은 수탈을 당했었다.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때문에 매출은 20%정도로 급격히 하락했고, 정태규와 그의 가족들도 밥도 하루에 2끼 정도만 간신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지냈다.

한편 정환은 이와중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이준설 정권을 정복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뒤에서 몰래 모았던 비상금과 일부 간식 재고들, 화염병 등을 시민군들에게 지원을 했었다. 훗날 정환의 회고에 따르면 정부 군인들이 계속 감시를 하여 들킬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52년 5월 20일, 전국적으로 번진 4.28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이준설이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고 다음 날에는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이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지자 정환은 서모릴 상회 다시 일으킬 아이템으로, 그리고 더욱 큰 회사로 키우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1952년 6월, 가게 매출이 3.22 군사쿠데타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고 새로 진출한 건설업에서도 꽤 좋은 성과가 나오면서 발생한 이익으로 현재의 태광식품이 되는 태광제당을 세우며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2년 8월에는 정부 주도 국가 재건 사업에 서모릴 건설로 참여하여 서모릴이라는 이름을 전국으로 알리고, 서모릴의 위상을 높이 알렸다.[2]

외환위기

온성 시기

2022년 12월 31일, 사명을 기존 서모릴에서 현재 우리가 아는 온성으로 변경했다.

현재의 온성, 그리고 미래

각주

  1. 정환 회장의 장남인 정태규 2대 회장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금성항이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무역업을 했고, 이 무역업 덕분에 매출이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고 했다. 더불어 농산물, 가축물, 생활용품도 판매해서 서모릴상회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환 회장은 벌어들인 돈중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썼고, 나머지 절반은 직원들의 월급과 규모 확장을 통해 썼다고 정태규 전 회장이 회고했다.
  2. 정환 창업주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국가 재건 사업 참여 덕분에 현재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