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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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正皇帝
장주친 완디원고국 비인정 완디
愍王
민왕
묘호 없음
시호
(愍)
출생 ?년 ?월 ?일
이파오바 ?궁
사망 ?년 ?월 ?일 (?세)
키비코바
능묘 민왕묘(愍王墓)
재위 남연 완디
?년 ?월 ?일 ~ ?년 ?월 ?일
원고국 완디
?년 ?월 ?일 ~ ?년 ?월 ?일
연호 장주친(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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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우(開道)
야카미아(强明)
부모 부친: 카디우 시아바
모친: 카디우 메세난
배우자 없음

개요

원고 민왕(元高 愍王)은 남연 제31대 완디이자 원고국 초대 군주이다. 그리고 카디우 가문 최후의 군주이기도 하다.

생애

즉위 이전

반란을 일으키다

짧은 재위

평가

호칭 논란

그동안 원고국은 우왕이나 근왕 등 비정통 황제 또는 찬탈자에게는 묘호를 내리지 않고 시호만을 수여했다. 원고국에서 시호는 완디가 아닌 제후나 신하에게나 내려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들을 아예 완디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나마 명의 테지니들은 공식적이고 평화적인 제위계승을 통해 즉위했을 뿐만 아니라 원고국 발전에 이바지하였기에 비정통임에도 불구하고 인정 완디로써 묘호를 수여받았으나, 이마저도 최근의 일로 40여년 전까지는 아예 테지니 시대를 구분하지 않았을 정도로 비정통 황제에 대한 취급은 매우 박한 편이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민왕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고 정권을 잡은 뒤에는 폭정까지 일삼았으니 원고국 완디로써 인정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민왕은 안좋은 의미를 가진 '민(愍)'이라는 시호를 수여받고 비인정 완디로 전락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민왕은 원래 반란에 성공한 뒤 직접 남연을 무너뜨리고 원고국의 탄생을 선포하기 전의 몇주 동안은 남연의 황제로써의 치세를 이어갔고 이때 '장주친'이라는 연호를 공표하기도 했었다. 한편 원고 반도의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망국의 군주에게 칭호를 내릴때는 애종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묘호가 아닌 연호와 직위를 결합하여 살아있는 황제와 같은 방식의 칭호를 내렸다. 즉, 원칙에 따르면 민왕은 '장주친 완디'로 불려야 하는데, 이 칭호가 하필 '민왕'이라는 칭호랑 겹친 것이었다. 원고국이 민왕의 원고국 완디로써의 치세 뿐만 아니라 남연 완디로써의 치세 또한 부정하였으면 모를까, 연서에서 '야카미아는 남연의 완디였으나 원고의 완디가 아니었다'라고 못박아 남연 황제로써의 민왕은 인정했기 때문에 '장주친 완디'라는 칭호를 버릴 수도 없어 두 칭호가 혼동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전부터 학계에서는 그나마 민왕이 완디로써 인정받았던 시기인 남연 시절의 '장주친 완디'라는 칭호를 쓰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으나 겨우 몇 주 동안 재위한 것 가지고 남연 완디로써의 칭호를 쓸 수 없다는 반박이 계속해서 제기되었고 이 문제는 무려 수백년간 원고국 사학계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제정시대도 지나고 제3차 대분쟁도 끝난 1980년대에 와서야 열조의 주도 하에 원고사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며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는데, 마감이 코앞인데도 학자들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당시 남연 칭호 지지파의 대표였던 야노쿠미 교수의 제안에 따라 대국민 설문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주류 학자들이 남연 칭호론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국민들은 민왕 시절이 좀더 치세가 길고 폭정을 했다고 해도 원고국의 첫 발걸음을 내딛은 건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또한 발음이 짧아 부르기 쉽다는 점에서 원고 칭호론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전국민(성인 기준) 중 47.3퍼센트가 원고 칭호론을 지지한다고 응답했으며(22.5퍼센트는 남연 칭호론, 30.2퍼센트는 무응답), 기존의 남연 칭호론을 지지하던 학자들은 당연히 전문성을 논하며 크게 반발하였으나 열조가 '민주주의 풍조에 걸맞는 아름다운 채택 방식이다'라며 원고 칭호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학자들의 몇 주에 걸친 추가 토론과 검토를 통해, 남연 완디로써의 치세를 가리킬 때는 '장주친 완디'를 쓰고 원고국 비인정 완디로써의 치세를 가리킬 때는 '민왕'을 쓰는 방식으로 두 칭호를 병행하는 한편 대중적으로는 민왕을 사용하기로 타협하며 그렇게 수백년에 걸친 논쟁은 종식되었다.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