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2세

웨식스•노르망디•앙주 공작

이름 윌리엄 플랜테저넷(William Ⅱ Plantagenet)

별칭

지위
웨식스 공작
재위 1103년 7월 25일 ~ 1103년 7월 25일
전임 윌리엄 1세
후임 헨리 1세
노르망디 공작
재위 1109년 8월 16일 ~ 1103년 7월 25일
전임 존 1세, 아델라이스[1]
후임 헨리 1세
앙주 백작[2]
재위 1114년
전임 앙투안
후임 로베르 1세

생몰년도 1068년 10월 24일 ~ 1103년 7월 25일

출생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버리

사망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루앙

부친 윌리엄 1세

모친 크리스티나 에아드워드스도흐토르

배우자 캐서린 노르망디(1089년 결혼 / 1106년 이혼)
잉그리드 스텐실링(1113년 결혼)

자녀 2남 3녀
헨리, 로베르, 아벨린, 리처드[3], 윌리엄[4], 콘스탄스, 크리스티나

개요

윌리엄 2세는 윌리엄 1세의 장남으로 1068년 10월 24일 윌트셔 솔즈버리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103년 윌리엄 1세 사후 윈체스터 공작을 물려받았으며 훗날 동생 존의 작위와 앙주백국을 점령함으로써 영지를 확장하였다.

생애

유년기

솔즈버리 성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 시절은 윈체스터 성에서 보냈다. 아버지 윌리엄 1세에게 교육받으며 공정과 정직에 대해 완고한 기준을 가지게 된다. 이런 꽉 막힌 성격 덕분에 동생인 존 1세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으며 이런 관계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윈체스터 공작 이후

윌리엄 1세 사후 윈체스터 공작위를 물려받아 윈체스터 영지를 다스리게 된다. 재위 초반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것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1106년 1월 아내 캐서린이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자 곧바로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삼남 리처드와 캐서린을 추방한다. 그러고는 곧장 그 사실을 교황에게 보고하여 이혼하게 되고 리처드의 친부인 알랑송 백작 미하일을 보복하기 위해 군을 준비시켰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존 1세와 백작부인이자 여동생인 시빌라는 직접 와이트섬으로 가서 용서를 구했지만 윌리엄 2세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영지인 윈체스터에서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혼후 임신한 상태였었던 캐서린이 아들을 낳자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으며 상속권도 주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윌리엄은 아닌 자기중심적이고 냉혹한 사람으로 변모했다.

1106년 9월 존 1세가 의문사하게 되자 윌리엄 2세는 곧바로 노르망디로 군을 움직인다. 윌리엄 2세의 군대는 신속하게 루앙을 향했고 존 1세의 어린 세 딸들만 있었던 노르망디령은 윌리엄 2세에게로 넘어갔다. 윌리엄 2세는 존 1세의 세 딸들을 베이유 성과 아브랑슈로 거쳐를 옮겨 그 곳에서 살게 했다.

노르망디령 점령 후 리시유 지방에서 일어난 전투로 사로잡힌 알랑송 백작 미하일은 [5]을 하였다. 하지만 윌리엄 2세는 그것을 만족하지 않았고 그를 봉역에서 추방하였다. 그러고는 곧장 알랑송령을 자신의 영지로 편입시켰다.

그 후 알랑송은 윌리엄은 1112년 돌연 알랑송 백작 작위를 시빌라의 막내아들 휴에게 수여했다.[6]

노르망디 공작위까지 얻게 된 그는 자신의 여동생 세실리아의 시누이 잉그리드와 약혼한다.

노르망디 그 너머

노르망디 공작을 얻고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체결한 윌리엄 2세는 기존에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메인과 시볼레를 포함한 앙주지역을 손에 넣길 원했다. 1112년 윌리엄 2세는 앙주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게 선전포고 한다. 스웨덴 왕국과 연합한 윌리엄 2세는 프랑스왕 앙리 2세의 군세를 에브뢰에게 격퇴하고 사르트르지역을 점령하며 최종적으로 1114년 앙주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윌리엄 2세는 앙주 지역을 아들 로베르에게 맡기고 2차 십자군에 참가하지만 이미 기세가 기운 십자군은 윌리엄 2세가 아프리카 땅을 밟기도 전에 끝이 나버렸다.

앙주가문

앙주는 풀크4세의 아들 앙투안과 아르노가 다스리던 영지였다. 윌리엄 2세는 앙주가문과 지역 남작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아벨린을 약혼시킨다. 앙주가문과의 약혼으로 앙주 일대를 확보한 윌리엄 2세는 차근차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정비를 하게 되는데 1115년 앙주백국을 공국으로 승격시켜 아들 로베르에게 다스리게 만들었다.

노르망디 공방전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노르망디를 통해 앙주지역까지 점령한 잉글랜드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잉글랜드 왕국의 봉토 중 프랑스 대륙에 속한 곳에서 한해 프랑스의 봉신인 잉글랜드 왕의 세력권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앙리 2세는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에게 선전포고 한다.

전투는 아미앵과 클레르몽, 보몽 등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일진일퇴의 팽팽한 분위기 속 프랑스가 점점 밀려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앙리 2세는 군을 돌려 잉글랜드 군의 보급을 담당하는 베이유와 아브랑슈지역을 점령하여 잉글랜드왕에게 협상을 통해 노르망디 지역 중 파리와 가까운 루앙, 외, 에브뢰지역을 얻어내기 위해 병력을 기동했다. 하지만 앙리 2세가 잉글랜드 군의 보급품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윌리엄 2세는 군을 돌려 베이유 지역으로 향했다.

윌리엄 2세는 베이유 지역에서 프랑스 왕국의 지휘관 시지스몽과 중기병들을 말그대로 박살내고 아브랑슈에 있던 앙리 2세의 군대까지도 격퇴하는데 성공하며 노르망디 지역을 지켜냈다.

이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왕국은 엄청난 빚더미를 떠안게 되어 이후 십년 간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버렸다.

역습

윌리엄 2세는 앙리 2세의 왕권이 약화 되는 틈을 타 일전에 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었던 앙주 가문이 다스리는 소뮈르까지 점령하여 앙주가문까지 봉신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앙리 2세는 프랑스 왕국의 보물인 주와이외즈를 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체결하였으며 이 전투 이후 프랑스는 점점 영토 서부권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말년

윌리엄 2세는 장남 헨리와 카스티야 왕국 페르난도 2세의 딸 인판타와 약혼시켜 후계를 위한 동맹을 구축 하였다. 첫째 아내 캐서린과의 이혼 후 자기중심적이고 냉혹한 인물로 변했던 그는 말년이 되서야 그 성격이 죽어 줄곧 사냥과 연회에 심취하고 윈체스터 인근에 대형수도원을 새로 건설하고 영지 내의 빈민 구제를 직접 하는 등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노르망디 루앙에서 루앙주교가 주관한 자선 축제에 참가 후 사망하였다. 장례는 루앙 대성당에서 치루고 시신은 윈체스터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여담

앞서 나왔던 것처럼 윌리엄 2세는 첫째 아내 캐서린과의 이혼 전까지는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이때문에 휘하 남작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던 영주였다. 하지만 이혼 이후 그는 정반대의 사람을 변했고 노르망디와 앙주 공략에 온 신경을 쏟는 등 이 시기 존 1세가 의문사한 원인이 윌리엄 2세에게 있다는 설도 있으며 실제로 이런 성격 때문에 노르망디를 얻은 후 지역 백작과 남작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반란 진압 후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 지역 백작과 남작들의 영지를 갈아 엎다시피 하였고 이 시기 이후 남아있던 토착 영주들은 외가문 밖에 없었다.[7]

존 1세의 세 딸들은 전부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지만 모계결혼이 아닌 부계결혼으로 결혼하여서 플랜테저넷의 후손들은 전부 윌리엄 2세의 후손들이다. 이는 플랜테저넷 가문의 족보와 영국왕가, 프랑스왕가의 족보에서도 볼 수 있다.

아버지 윌리엄 1세를 닮은 미남이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군재는 떨어졌지만,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리더십만큼은 동생들보다 확실히 물려받았다고 평받는다.

  1. 불과 1년 통치하였다.
  2. 후에 공작령으로 승격된다.
  3. 캐서린과 알랑송 백작 미하일의 아들이다. 즉 친자가 아니다.
  4. 캐서린과 알랑송 백작 미하일의 아들이다. 즉 친자가 아니다.
  5. 땅에 어느 곳도 몸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혀로 그의 발을 햝는 굴욕적인 자세였다.
  6. 굳이 막내아들 휴에게 작위를 수여한 이유가 윌리엄과 시빌라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7. 외 가문은 반란 때 윌리엄 2세의 편에 섰으며 이후 존 1세의 딸과 결혼하여 노르망디 내 가문의 입지를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