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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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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 제6대 수상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
응오딘지엠
吳廷琰 | Ngô Ðình Diệm
출생 1901년 1월 3일
꽝빈성 후에시
국적 남베트남
사망 1979년 8월 7일 (향년 78세)
사이공직할시 사이공대학병원
직업 정치인
임기 베트남국 제6대 수상
1954년 6월 16일 ~ 1955년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
1955년 10월 26일 ~ 1971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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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없음
자녀 없음
그 외 가족 동생 응오딘뉴
학력 미시간 주립대
종교 천주교
소속 정당
성향 우익
베트남 내셔널리즘, 반공주의, 보수주의

개요

응오딘지엠[1]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관료,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7년간 집권했다.

생애

독립운동에서 집권까지

1901년, 베트남 꽝빈성 후에시에서 고위 관리 응오딘카(Ngô Đình Khả / 吳廷可)의 아들로 태어났다. 응오딘카는 비록 식민지의 관료였지만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에 반대했었다. 응오딘지엠은 행정학교 졸업 이후 아버지와 같이 식민지 관료가 되었다. 응오딘지엠은 최종적으로 내무대신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프랑스가 베트남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며[2] 사임하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응오딘지엠은 호치민과 함께 베트남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상륙하자 응오딘지엠은 일본과 협력하여 베트남을 독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일본이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 하자 응오딘지엠은 정부를 구성해달라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얼마 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응오딘지엠의 맏형인 응오딘코이를 살해하고 응오딘지엠을 감금한 후 호치민 주도의 정부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응오딘지엠은 당연히 호찌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독립운동가로 나름 명성이 높았던 그를 억류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응오딘지엠을 석방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의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이 붕괴했으나 엘리제 협약으로 과거 베트남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였던 바오다이가 국가 원수로 복귀했다.  응오딘지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행을 택하여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각인시켰다.  동생 응오딘뉴는 베트남에 남아 반공주의 세력을 모아 혁명위를 창립하는 등 응오딘지엠의 입지를 다졌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민에 패하자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에게 수상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응오딘지엠은 수락하여 베트남국의 수상이 되었고 탈북민 정착 정책과 반대파 제거로 민중의 지진들 얻었고, 곧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였다.  이와 함께 중도 좌파부터 극우까지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던 혁명위를 재편, 반공 우익 정당인 공화혁명당으로 개명했다.

남베트남의 첫 총통

1958년 대선 당시 투표하는 응오딘지엠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에 당선된 응오딘지엠은 농업, 경공업 육성 정책과 전면적인 교육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 성장을 견인하였고 동시에 군대의 편제를 미국식으로 뜯어고치며 호치민과의 대결을 준비했다.  또한 친미적인 외교정책과 여러 성과로 미국의 신뢰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 대규모 원조를 얻어냈다.  부패 근절과 경제 성장, 불교 존중은 민중이 그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응오딘지엠은 농촌 정책에 큰 공을 들였다.  베트콩이 세력을 빠르게 넓힐 수 있는 지역이 농촌이었기 때문이다.  응오딘지엠은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모방하여 농지개혁을 단행하였고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또한 농지 개발 정책을 폈다.  무주지를 개간하는 이에게 그 땅의 소유권을 주고 일정한 기간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빈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얻었고 정부는 불안 지역 안정화와 농작물 생산 증가를 통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

1955년부터, 북베트남은 지속적으로 남베트남에 평화공세를 하였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통일 총선거를 제의하였으나 서방 진영은 설령 총선이 치루어진다 하여도 북베트남에서 광범위한 선거조작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 예상에 동의했던 응오딘지엠은 통일 총선 거부 방침을 밝혔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의 결정에 찬성했다.  당시 북베트남은 소련의 남북베트남 UN 동시 가입 제안도 거절하였다.  남북베트남의 UN 동시 가입은 북베트남에게는 영원한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응오딘지엠이 농촌 안정화를 위해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하여 지방에서의 베트콩 세력이 궤멸 위기에 빠지자 북베트남 수뇌부가 공격적인 전략을 채탁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공화국군 만으로는 각지에서 준동하는 베트콩을 완전히 토벌할 수 없었다.  이에 응오딘지엠은 미국과 서방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미국과 한국 등 5개국이 전투병력을 보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늘 효율적으로 활용하였고 연합군은 각지에서 베트콩을 차례차례 격파하였다. 

큰 수세에 몰린 베트콩은 상황 반전을 꾀하며 1970년 구정에 임시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5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구정 공세다.  하지만 연합군은 미리 첩보를 입수하여 만반의 대비를 한 상태였고 베트콩은 대패하였다.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남베트남에서의 베트콩의 세력은 와해되었다.

은퇴 이후

노년의 응오딘지엠[3]

구정 공세 직후, 4선 총통이던 응오딘지엠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은퇴하였다. 1973년에는 자서전을 냈으며 이외에도 여러 권의 수필집 등을 냈다. 1974년에는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막 총통 자리에서 내려와 당시에는 민국당 주석을 맡고있던 이승만과 다시 만나 양국 간 협력을 논의하기도 했다. 1977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는 대외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1979년 사이공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으며 베트남 각계각층의 인사와 해외 사절들이 조문했다. 이승만도 조문하고 싶어했지만 이승만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걷던 상황이라[4] 장시간 비행이 치명적일 거라는 의사들의 만류에 뜻을 접었다.

묘소는 남베트남 애국지사릉 총통묘역에 마련되었다.

성향과 평가

강경한 반공 성향의 우익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반공이라는 대의가 같으면 세부적인 이념이 달라도 포용하는 등 융통성은 있었다. 그의 어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응오딘지엠은 보수주의보다는 반공주의를, 반공주의보다는 민족주의를 더 우선시했다.

남베트남에서는 대다수의 국민으로부터 국부로 추앙받고있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지켜낸 것과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것이 그의 공으로 꼽힌다.  하지만 야당에 자행한 정치공작 등의 행위는 비판받고있다. 반면 북베트남에서는 악당으로 묘사되며 제3국에서는 그런 대로 괜찮은 건국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정국가의 수상을 역임했으나 왕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수립한 뒤 총통(혹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태국쁠랙 피분송크람과 종종 비교된다. 차이점이라면 응오딘지엠은 고국에서 생을 마쳤지만 피푼송크람은 쿠데타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하여 객사했다는 것.

어록

내가 앞장서면 나를 따르라. 내가 달아난다면 나를 죽여라. 내가 적들에게 죽는다면 나의 복수를 해다오.
1954년, 측근들에게 군벌 제압 의지를 내비치며
저는 보수주의자이기 전에 반공주의자며, 반공주의자이기 전에 민족주의자입니다.
1959년, 국회 연설 중
용맹한 월남인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 분연히 싸우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가족과 조국을 지키자!
1961년, 라디오 연설에서

여담

  • 독신주의자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고로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 1951 정계 입문
혁명위 1951 - 1954 창당
1954 - 1979 당명 변경, 사망

  1. 1961년, 베트콩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후 타임지 겉표지를 장식한 응오딘지엠이다.
  2. 식민지에 무슨 주권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사실 프랑스의 독특한 식민지 경영 방식 때문이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겉으로는 독립국으로 남겨놓고 뒤에서 조종했다.
  3.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다.
  4. 이승만은 지엠이 죽은지 반 년도 안 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