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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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통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 Syngman Rhee
출생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삼리 능안골
(現 황해도 봉천군 성기리)
사망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46년 5월 10일 ~ 195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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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배우자 박승선 (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재혼)
자녀 친아들 이봉수
양아들 이강석, 이인수
학력 조지 워싱턴 대학교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종교 개신교 (감리회)
신체 188cm
정당 무소속
병역 해당사항 없음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써 일본에 맞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시 지도자이다.

초대 대한민국 하원의장을 거쳐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8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의 유엔 가입,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국적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센서스 시행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으며, 1956년 더 이상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 후 여생을 보냈다.

생애

출생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파였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몰락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1877년에 서울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엔 서당을 다녔다.

청년기

20살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해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 영어를 배우기 위해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한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의 대중집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고, 이 연설을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으로 외국 소식과 개화에 대한 내용도 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던 1904년에 미국 유학을 결정한다.

1904년 12월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1월 워싱턴포스트와 기자회견을 통해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했다. 8월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이후에도 미국에서 공부하며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

일제 시대

한일합병 이후 1910년 10월 10일 한국으로 귀국해 YMCA 청년회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1910년 12월의 회사령 발표로 조선 내에서의 모든 자본의 흐름을 총독부에서 감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도회의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1년 일본은 기독교인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운 105인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하와이로 건너간다. 하와이에서도 한인 학교 건립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잡지를 계속해서 발행하였으며, 반도회의를 주재하며 독립의 기틀을 잡아갔다.

그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는데, 그 중 8곳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급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반도회의 시기

이후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반도회의는 각 임시정부에서 3명의 대표를 뽑아 반도회의에 참여토록 했으며, 이승만이 반도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외교독립 노선을 추구하며 1920년대에 미국 의회에 많은 로비를 감행했는데, 이는 반도회의의 자금난과 맞물리면서 무장독립파의 큰 비난을 받았다. 1925년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의 회담장에 참석해 미국 본토로 돌아간 이승만의 부재 상황을 노려 안창호파에 의해 제2차 반도회의에서 의장직을 상실했다.

이승만은 의장직을 상실하자 반도회의에서 외교독립파 구성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반도회의 하와이 지부를 폐쇄하였다. 무장독립파 반도회의 역시 반도회의의 이름을 버리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한다. 이로써 1910년부터 명목을 이어오던 반도회의는 공식적으로 1925년 막을 내린다.

하와이 임시정부 시기

이승만은 하와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하와이 임시정부가 운영하는 코리아 에너지를 설립해 미국 해군과 석탄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자금난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미국 의회에 계속해서 한국 독립에 대한 로비를 멈추지 않았다.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일어나며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자, 1931년 12월 미 국무장관 스팀슨에게 편지를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위험성을 경고했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국제연맹총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국 문제를 회의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의제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국제사회 여론이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환기한 점과 자금난을 해결한 에너지 사업 운용,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 반대파의 약화를 통해 1934년 하와이와 상하이의 두 곳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합쳐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1939년 세계 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본부보다 워싱턴 임시정부 지부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1941년 6월에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초기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실제로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한인 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서 이승만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이 벌어지자 당시 일본이 식민지 각지에 세운 군관 학교에 입학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변 생도의 포섭을 주문함과 동시에 여유자금을 군복과 탄약, 총기 등 무기를 구입하는데 힘쓰도록 지시했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외교독립파였지만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고 이후 한국이 어느정도 독립 이후 발언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개전 후 국무장관 비들에게 미국내 한인들을 적국인 일본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1942년 2월 받아들여져 한국인에 대한 규제를 면제한다는 특별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군 내부에서 한인을 적성국민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자 1943년 3월 미 육군장관 스팀슨에게 시정을 요구해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미국 유력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한미협회를 설립해 미국의 지식인과 자본가들이 참여하는 교류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한국의 병합을 인정한 대가로 지금 큰 비용과 병력을 낭비하게 되었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정해서 일본에 선전포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라스와 호머 헐버트 선교사, 윌리엄스 기자 등이 동의하고 민주당 내 한미협회 참가 의원들이 이를 지지하는 전화 이후 6월 5일 행정명령 9378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를 지원하는 기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상하이의 임시정부 본부로도 전해졌는데, 이 때 이승만은 전화를 통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장제스 총통과의 회담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발표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 OSS 첩보부대에 한인을 참여시키기 위해 조율을 거듭했으며, 50여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합동훈련을 받는다.

이후 장제스 총통과 만나 항일전선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으며, 그동안 중화민국군에 포함되어있던 독립군을 대한민국 국군으로 정식으로 재편할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국군은 중일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2]

1945년 4월 유엔 창립총회에 창립국으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1945년 7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한반도 북부를 점거한 후 치안 유지를 위해 한국에 돌려줄 수 없다고 선언하자 분노했고, 그가 공산주의를 광적으로 싫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 정국

1945년 8월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통해 대한민국이 독립한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의 절반을 점거한 상황에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귀국할 경우 소련이 미국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모두 점령할 것을 우려해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을 거부했다.[3]

이후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했다. 이승만의 이름은 이미 한반도 내에 널리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귀국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모든 정치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며 반도회의를 재차 조직했다. 반도회의는 대한민국 헌법 등의 문서 작성에 참여했다. 1946년 4월 경 헌법 작성이 완료되고 이를 비준하기 위해 총선거와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며 남한만의 단독선거 시 미소간의 한반도 균형이 깨진다고 주장했다. 미국도 이에 동의하며 이승만에 일단 정부와 의회 등의 총선거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 결과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이북에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정부가 사실상 수립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구성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미국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모두 관장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이승만을 퇴출시킬 방법을 모색하라고 지시하였으나, 맥아더도 이승만과 같은 견해였기 때문에 아주 작은 견제정도만 받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미소공동위원회의 발목을 잡는 책임을 물으려 하였으나, 이승만의 국내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에 항의를 표시하고 주한미군의 33%를 일본으로 철수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보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끈질기게 선거 개최를 요구했지만 이는 계속해서 거부되었다.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이었음에도 주한미군과 계속해서 주권투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체되자 1947년 5월 10일 1947년 대한민국 제헌의원 선거를 통해 1년 임기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미국식 대통령제와 양원제를 완전히 마킹한 대통령제 공화국을 모토로한 헌법을 제정했으며, 1948년 5월 10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하였다.

헌법에 따라 1948년 7월 23일 대통령 선거와 양원-부지사 선거를 통해 첫 공식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승만은 단독으로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해 만장일치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통령은 이범석 장군이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시기

대통령 재임기

이승만은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당시 제1야당이던 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행정명령 1호를 통해 밀어붙인다. 이 행정명령을 통해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1949년 행정명령 13호에서는 동해상에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와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949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19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의 애치슨 라인의 설정으로 북한에 한반도 정세를 오판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불법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한다. 6월 26일 피난길에 올랐으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대전행 기차에 오른다.

7월 1일에는 부산에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임시수도 역할을 하게된다. 다부동 전투 등으로 낙동강을 지킨 후 인천 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38선까지 수복했고, 그 상태로 전진을 멈췄다. 이에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군 간부들을 불러 왜 38선을 넘어 북진하지 않느냐고 호통쳤다.[4] 이승만은 국군에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으며,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했다. 전쟁은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반전여론이 높아지던 미국은 더 이상의 북진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결국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미군 없이 북진통일을 완수해내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미국은 처음에 미국은 단 한번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며 반대 의사를 표시했지만, 이승만이 행정명령 28호를 통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미국은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남은 미수복 지역을 국군이 교전을 통해 수복하는 것을 약속하라는 조건을 제시해 1951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었다.

이후 1952년 2월 25일 김일성과 로동당 지도부가 중국에 망명하면서 한국전쟁을 승리로 마감하게 된다.

이를 통해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승전 이후 이승만은 교육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 행정명령 35호를 통해 초등학교 교육을 의무화하고 대대적인 학교 건립에 나섰다. 또 인구총조사와 부동산총조사를 시행해 건물의 측량과 세입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에 뇌물이 오가는 부패한 공무원들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며, 의회에 요청해 청탁금지법을 만들었다.[5]

미국은 한국에 경제원조금을 지원해 필요한 물품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승만은 스스로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주 비료공장과 문경 시멘트공장, 인천 판유리공장을 지으며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또 시슬러 박사로부터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승만은 1954년 자원부 산하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5년 원자력법을 개정해 원자력 발전소를 향한 연구를 시작했다.

퇴임과 사망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이승만은 바로 귀국 당시 살았던 자택인 종로구 이화동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그 이상 집권하게 되면 고종 시절과 같은 황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정중앙 돔의 천정에는 이승만과 기초 헌법을 마련한 반도회의 33명이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최대 권력을 미련 없이 의회로 돌려준 이승만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일단 어떠한 추문 없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신생국의 지도자 자리를 더럽히지 않고 고결하고 존경받는 자리로 유지시켰다. 그리고 당시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본인이 2선까지만 하고 물러났으므로, 장기집권을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이승만보다 대단함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후임 대통령들은 이승만의 전례를 따라 암묵적으로 세번째 대선에 나가는 것을 금기시했다.

사실 이승만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립 이전부터 이승만은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으며, 한국전쟁에서 탁월한 식견으로 북진통일을 이뤄내 군부의 충성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이런 이승만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두 번의 선거 모두 90%가 넘는 득표를 하며, 한민당이나 독립촉성국민회들의 지지 세력을 상회하는 인기를 혼자서 누리고 있었다. 8년간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을 안정시키며 통치능력도 증명했다. 군대마저 이승만의 개인 사병에 가까웠다. 종신집권이 불법도 아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3선 출마를 원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황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본인의 확고한 철학과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8년만인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했다.

평가

기타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년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무소속 19,457,572 (100.0%) 당선 (1위) 초선
1952년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27,641,910 (93.0%) 재선

각주

  1. 이는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으로, 이 이력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 1944년에 진행된 일본의 대륙타통작전에서 헝양에 배치된 국군은 1944년 5월, 7월, 8월의 헝양 전투에서 중화민국의 10군과 함께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당시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중국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후 파죽지세로 얼마 전 함락된 10월 창사를 수복했다. 일본은 이에 심각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남부에서 구이린을 칠것을 요구했지만 작전군 사령관이 전멸을 우려해 공세를 거부할 정도였다.
  3. 특히 폴란드의 사례처럼 연합국이었지만 완전한 공산화를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4.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38선이 어찌 됐다는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5. 국가직, 지방직, 의회 공무원을 불문하고 공무원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속한 정부 부처에서만 선물을 받을 수 있고, 그 외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심지어 생일파티도 외부인사를 초청하지 못하게 하고 공직사회 내부인원들끼리만 시켰다. 청탁금지법은 위반이 적발되면 즉시 공무원 직에서 파면하는 법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