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첨관 공화국의 공식 설정입니다. 무단 편집을 금지합니다. 본 문서의 내용은 모두 가공의 설정입니다.

첨관 이왕가 제1대 수장
이희 | 李希
출생 1901년 5월 7일
조선 한성부 사동궁
사망 1967년 12월 28일 (66세)
첨관 센칸토 도 켄탄산 남화궁
국적 첨관 첨관
재위 첨관 리공가 공작
1922년 9월 1일 ~ 1952년 10월 19일
첨관 리왕가 수장
1952년 10월 20일 ~ 1967년 12월 28일
[ 펼치기 · 접기 ]
본관 전주 (全州)
희 (希)
부모 부친 의친왕, 어머니 수인당 김흥인
학력 센칸토제국대학 (경제학 / 학사)
이마가라대학 (경제학 / 명예박사)
부인 오료
자녀 슬하 4남 3녀

개요

이희 (李希)는 한국계 첨관인 출신의 첨관 리공가 공작이자 첨관 리왕가 수장이다. 본래 의친왕의 차남이였던 조선의 왕족이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첨관의 리공가 공작으로 옹립되었다. 독립 후에도 구왕가특별법을 통하여 첨관 리왕가 수장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생애

어린 시절

1901년 5월 7일 조선 한동부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첨관 리공가 공작

즉위까지의 배경

첨관에는 원래 왕조가 없었다. 주민들의 대다수가 내지에서 추방된 부락민들로 같은 노예였던 처지에 왕족, 귀족 따지지 않고 같은 해방민으로서 촌락을 일궈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마가라를 촌장으로 일궈진 촌락은 마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넘어온 청교도들이 일궈낸 뉴플리머스 같았다.

그러나 일본이 1870년 첨관에 첨관청을 세우게 된다. 당연히 다시 일본의 지배와 탄압을 받게 된것에 대해 첨관인들은 반발하며 시위에 나섰다. 결국 1880년 첨관 항쟁이 벌어지고 3년만에 처절한 진압을 가했다. 그리고 헌병에 의한 철권통치로 첨관을 지배했다. 그러나 첨관인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꾸준히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 3.1 운동에 영향을 받은 만세운동으로 표출되고 이것 또한 처절한 피의 진압으로 막을 내린다.

40년간 철권통치에도 굴복하지 않자 일본은 무력으로만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조선처럼 문화통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첨관청이 구상한 것이 일본령 조선에서 행하고 있던 왕공족 제도를 첨관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첨관 출신 왕족을 추대하여 그가 첨관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첨관청은 그를 허수아비로서 배후에서 조종하면 첨관인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초기 첨관청은 일본의 황족 중 한명을 첨관공작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에서 온 누군가가 자신들의 왕이라 칭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그러자 첨관청은 편법을 생각해냈는데 바로 구 대한제국 황실인 조선왕공족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조선이라는 망국의 왕족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받아 좀 더 쉽게 마음을 열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왕공족이 일본 황가에 편입된 만큼 일본과 줄이 닫아 있으니 결국에는 일본의 손아귀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의친왕의 임정 망명시도 사건에 대한 보복과 경고로서 의친왕의 적자인 이희 공을 첨관공으로 책봉한다. 이희 공을 첨관공작으로서 첨관청장의 도움을 받아 첨관을 이끌라며 천황이 직접 친서를 보낼 정도로 주목을 받았었다. 물론 현실은 얼굴마담으로서 모든 실권은 첨관청장이 쥐고 있었다.

즉위와 결혼

1922년 경성(서울)을 떠난 이희 공은 일본 군함 후소급 전함을 타고 첨관땅에 발을 들였다. 몇주간의 항해 끝에 전함은 첨관의 이시카와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첨관청의 관료들이 성대한 준비를 통해 새로온 군주를 환대했다. 물론 진심어린 존경이 아닌 첨관 통치를 수월하게 해줄 정치적 수단으로서 겠지만. 이희 공이 도착했을 당시에는 첨관의 별궁이 완공되기 전이었고 그전까지 첨관청장 관사에서 기거했다.

첨관청장 관사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첨관청장은 센칸토 시내의 한 호텔에 관사를 차렸다. 첨관청장은 이때가 가장 바쁠 시기였다. 우선적으로 할 일은 이희 공의 배필을 찾는 것이었다. 이제 22살이 된 젊은 나이에 약혼자도 구하지 못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이훤이 첨관공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첨관인의 지지를 받는 자를 아내로 맻어줘야 했다.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쇼켄에게 손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쇼켄은 이마가라의 아들로 아버지가 처형당한 이후에도 지하투쟁을 계속 해나가다 검거된 자였다. 첨관청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마가라는 첨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쇼켄에 대한 지지는 상당했다. 이를 역이용해 이마가라의 손녀를 첨관의 공작가에 포함시킨다면 그 지지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에 쇼켄의 아들들은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에도 못미치는 인물들로 물욕과 출세욕에 찌들어 있었다. 가족 대대로 반역자일 뿐만 아니라 부락민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출세길이 막힌 상황에 이러한 기회는 하늘에서 내려준 천운과도 다를바 없었다.

쇼켄의 손녀 오료는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린 만큼 빛을 보지 못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첨관청에서 사람을 보내 혼담을 제시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오료의 의사를 묻지 않고 무작정 혼인관계를 맻을 것을 간청했다. 오료에게는 결정권이 없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희 공과 오료의 첫 만남은 그해 연말에 이뤄졌다.

이희 공은 정치적인 이유로 먼 타향에 팔려온 처지고 오료의 경우 아버지의 탐욕으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되어 두 사람 다 침울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니 생각보다 괜찮은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희 공은 아버지 의친왕과 닮아 이복동생인 이우 공 못지 않은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오료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타고난 미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호감을 가졌고 같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설움을 함께 나누며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첨관에 온 것을 운명이라 여기며 이 땅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 센칸청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적인 첨관 공작과 공비로서 이희 공과 오료는 같은 길을 걸어갔다. 시로가네의 별궁이 완공되면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민심을 헤아리고 어려운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첨관순환철도에 쓰일 신형 기관차의 도입을 직접 명하고 시운행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첨관 전역을 순회하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방안을 고민하고는 했다. 첨관의 공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희 공은 첨관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첨관청은 이러한 인기를 이용하려 했지만 이희 공은 쉽게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첨관 섬 전체가 전장이 되면서 첨관공 내외는 나루미 제도로 피신하게 되었다. 결국 첨관섬에 성조기가 걸리게 되자 첨관공은 곧장 미군에게 투항했고 미군정 하에서 첨관공의 직위를 인정받았다.

첨관 리왕가 수장 (이희왕)

독립 후 근왕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간 대립이 극심했는데, 첨관 임시정부도 근왕파와 공화파로 나뉘며 내전 위기까지 몰리자 독립된 신생 국가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던 이희공은 퇴위 선언을 하며 권한을 내려놓았다. 그 결과 공화파들도 결단에 감탄하였고 대신 유럽의 구왕가들처럼 리왕가의 명예적 위치를 인정하는 방안을 내놓게 되었다. 해당 방안에 리왕가도 동의하였고 왕가도 공화국 체제에 협조하며 외교적 사안에 도움을 주고 국민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군정의 지원과 구왕가특별법을 통한 국비 지원을 통해 살림이 나아지자 이희왕은 한국에 계신 아버지 의친왕을 첨관으로 모시고 별궁에 새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해방과 독립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첨관 전투로 인해 국토 전체는 초토화되었고 그러한 상황에 동생 이우공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한국에 전화의 불길에 휩쌓인다. 남한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 상황. 이희왕은 왕궁 호위병를 포함해 의용군을 조직하여 파병,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첨관을 최우선 수교국으로 지정하여 수교를 맻었고 첨관의 구왕실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더욱 돈독한 유대관계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 첨관 구왕실은 한국의 황실의 후손들을 후원했고 이 유대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독립 이후 신생 국가에서 리왕가는 정부에 협조하며 국민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왕정복고 여론도 다수 생겼으나 리왕가는 "약속에 따라 우리는 영원히 왕으로 군림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사망

1963년 마에바라의 발렌타인 쿠데타 및 군부정권 수립 이후, 왕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마에바라 신이치는 인기가 높았던 왕가에게 위기감을 느꼈으며 왕가 역시 신이치와 대립하며 민주화 운동을 비밀리에 지지하며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희왕은 사실상 가택연금 상황에 처해져 있었기에 직접적인 활동이나 지원은 불가능하였고, 말년에는 시종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일제에게 첨관 백성들이 해방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백성들이 총칼 아래에서 신음해야 하는가."라며 오열하였다고 한다.

결국 군부정권 수립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1967년 12월 28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왕가장으로 치루어졌으며 시신은 현재 센칸토 켄탄산에 안장되어 있다.

평가

비록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옹립되었던 신분이였으나, 일제의 의도대로 휘둘리지 않고 진정으로 첨관인들을 위해 노력하여 첨관 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본인도 첨관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첨관 지리에 대해서도 직접 순방하며 공부하였을 정도로 첨관에 애착을 가졌다. 그 덕분에 미군정 하에서도 공작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독립 이후에도 구왕가특별법에 의해 구왕실 수장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기타

1950년대 당대 한국에서는 이승만에 의해 구왕실이 천대받았지만, 첨관에서는 구왕가특별법이 통과되며 지위와 권리가 인정되었다. 즉 조선의 직계보다 첨관의 방계가 더 잘 나가고 대우를 받았던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실제로 이희왕이 작은아버지 영친왕과 숙모 덕혜옹주가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들을 첨관으로 초청했고, 1963년 박정희가 조선왕족의 귀국을 허락할 때까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는 켄탄산 왕궁에서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