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기계들의 유산)


Indonesian War of Independence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1942년 우리는 떠오르는 해 앞에서 해방의 신년을 맞을줄 알았습니다. 도쿄의 황궁은 우리에게 꿈의 장소였죠.
하지만 그들은 30년전 우리를 통치하던 서양인들과 다를바 없었고 간악한 위선자에 불과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의지와 처절한 항전의 증표로써 기억될 것이며 인도네시아의 모든 민족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부모님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불행하게도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 수하르토

개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진행된 인도네시아 독립 세력과 대동아공영권(일본,중화민국,필리핀)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전쟁으로 2차 기업전쟁 이후로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평가 받는다. 양측 합쳐서 400만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 참가했으며 OFN과 라이히스팍트도 개입하기도 하였다.

전쟁 자체는 일본의 승리로 끝나지만 피해가 막심해 이전부터 문제가 있던 경제가 끝내 붕괴하며 2년뒤 입헌정우회-대정익찬회로 이어지는 80년 일당 독재가 무너졌고 자유주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이 집권하였으며 중국과 한국에서는 대규모 반일 폭동인 우한 폭동과 인천 시위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2년 일본군의 남방작전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함락되고 일본령 동인도가 설립된다. 초기에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이유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보다 많은 양의 자원들을 수탈 당한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는 계속되 불만을 누적시켰으며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1년 수카르노가 국민연합을 창설하였고 모하맛 하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부활시켜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규모를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한편 사회적으로 일본이 발표한 경제무역자유협정으로 자국내 시장마저 일본 기업들한테 넘어가자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고 1954년, 일본군한테 한 민간인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수마트라 섬을 시작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1955년 1월이 되며 시위는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 각 도시의 관공서와 경찰서가 습격 당하고 무기가 탈취 당하며 게릴라 부대가 등장했고 일본군도 치안안정을 이유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수카르노와 모하맛 하타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자카르타에서 모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선의 창설을 결의하고 각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며 2월부터 본격적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전개



수마트라 전역

1955년 2월 4일 수마트라섬 남부의 최대도시인 팔렘방에서 처음으로 독립군과 일본군,일본령 동인도군 사이의 첫 교전이 일어나고 현지 민병대와 게릴라의 지원에 힘입어 2월 14일 팔렘방이 함락되고 초기에 10만에 달해있던 독립군의 숫자는 순식간에 30만명으로 불어나고 게릴라와 민병대도 100만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에 일본에서도 대정익찬회의 주도로 인도네시아 전시조치법을 통과시켜 중국군과 일본 육군을 대규모로 파병하기 시작한다. 동인도 정부와 일본군이 우왕좌왕 하는 틈을타서 수마트라 슬라탄,람풍,븡쿨루 주를 함락시키며 수마트라섬 남부를 장악했고 방카 섬과 잠비에서 공영권 군대 40만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거두며 북부로 일본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뚫고 중부의 페칸부루를 함락시키며 말라카 해협의 통제권을 가져오고 싱가포르를 포격 사정권에 놓게된다.

하지만 붕 토모가 이끄는 50만의 대규모 동인도군은 수마트라섬 최대도시인 메단을 요새화 시키며 독립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5월 5일 메단 바로앞의 루북 파감을 함락시키며 본격적인 메단 공방전이 시작된다. 양군은 치열하게 싸웠고 일본군의 공중지원과 막강한 화력앞에 한때 위기에 놓여있었지만 6월 1일 일본한테 탄압 당하던 야채족이 반란을 일으키며 메단 북부를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8월 4일 메단 시청을 점령하며 3달간의 치열한 전투와 200만명의 사망자를 낳은 끝에 수마트라 섬을 완전히 장악 하였고 말라카 해협의 재해권을 가져오며 인도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한다.

수카르노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메단으로 입성하였고 인도네시아 국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들이 얼마못가 전멸 할것이라 판단하고 무관심하게 대처했지만 수마트라섬을 함락 시켰다는 소식에 당시 대통령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도네시아 지원을 추진하였고 상원에서 인도네시아 지원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며 9월 1일 호주를 통해 미국과 OFN의 대규모 지원이 시작되었다.

수하르토의 합류

수마트라섬의 합락 이후 서로간의 전투는 소강 상태로 접어드나 여전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당시 일본령 동인도군 제1 집단군의 사령관이자 1000만이 넘는 시민즐이 사는 도시인 자카르타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수마트라에서의 지원 요청을 자카르타의 치안을 이유로 애써 무시하고 있었고 전투에 나서지 않고있었다. 그러던중 10월 1일 독립군이 싱가포르를 포격했고 미국의 지원에 맞춰 믄타와이 제도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에 배신을 결정 하게 되고 10월 10일 기습적으로 자카르타 시청을 점령해 정부인사들을 모조리 생포하게 되고 독립군에 합류하게 된다 동인도 정부가 통치하던 인도네시아 영토 전역이 무정부 상태로 변하게 되고 일본은 동인도 군정청을 설치하게 된다.

11월에는 반둥에 무혈입성하고 자와 섬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지만 12월 4일 허잉친이 이끄는 300만에 달하는 남방 파견 중화민국군이 말레이시아를 걸쳐 보르네오 섬에 도착하게 되고 1956년 1월 4일 푸르웨케르토에서 중국군과 독립군 사이에 교전이 일어났고 허잉친의 중국군은 인해전술을 이용해 모하맛 하타가 이끄는 인도네시아군 제1 군단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황은 공영권 측으로 기울지만 미군이 계속해서 폭격 지원을 해주고 있었고 인도의 지원으로 진격을 할수는 있었다. 2월 1일 수하르토는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교전에 나섰고 이전에 패배했던 푸르웨케르토를 함락 시키고 마디운을 걸쳐 4월 3일에는 자와섬 동부 최대도시 수라바야를 함락 시키는데 성공하지만 독립군도 매우큰 피해를 봤고 일본군이 신형 전쟁병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서자 이제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수비자의 위치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