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모아에 대한 미합중국, 독일제국, 대영제국 사이의 조약
Conven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the German Empire, and Great Britain Governments in Respect to Samoa

1899년 아피아 항만의 독일, 영국, 미국 전함
서명일 1899년 12월 2일
서명장소 미국 미국 워싱턴 D.C.
서명자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영국 영국
미국 미국
발효일 1900년 2월 16일

자모아에 대한 미합중국, 독일제국, 대영제국 사이의 조약(영어: Conven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the German Empire, and Great Britain Governments in Respect to Samoa) 혹은 자모아 조약(독일어: Samoa-Vertrag)는 제2차 사모아 내전이 종전된 뒤 체결된 조약으로 자모아 군도독일령 자모아미국령 사모아로 나뉘어졌다. 자모아 조약의 전신은 1887년 워싱턴 회의, 베를린 조약, 1889년 영독 협정이다.

배경

자모아인들의 국가의 경제는 외국 기업에 의해 확립되었다. 1878년, 미국이 자모아와의 우호 조약을 체결하자 독일 또한 1878년 자모아와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영국은 1879년, 미국과 독일이 조약을 체결한 파벌의 경쟁 파벌과 조약을 체결한다.

1887년 워싱턴 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독일, 영국은 1887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참여국들 간의 큰 갈등으로 회의는 성과 없이 폐회하고 말았다. 3국에 의한 자모아 내의 내전은 1889년, 아피아에서 발생한 태풍에 의해서만 완화되었다.

1889년 베를린 회의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인 헤르베르트 폰 비스마르크 후작은 휴회한 워싱턴 회의를 재개할 것을 제의했다. 1889년, 헤르베르트 폰 비스마르크 후작은 영국과 미국의 대표를 베를린으로 초청했다. 헤르베르트 폰 비스마르크 후작은 자모아 내 조약 참가국들의 국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보호, 자모아인들의 정부를 인정하는 것을 제의했다. 영국은 이에 동의하였으며, 미국은 3강 체제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1899년, '자모아인이 자모아인의 왕과 촌장을 선출할 권리'를 인정하여 자모아의 독립 정부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자모아인의 왕이 선출되면서 자모아 내 부족들에 의해 내전이 발발하였다. 자모아의 관리들은 공동 관리를 거부하며 이익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이 회의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조약 체결

워싱턴 주재 독일 외교관들은 1899년 여름, 미국 행정부가 주요 자산인 파고 파고의 기존 석탄 저장소로 투틸라 섬을 얻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모아 분할"의 의견이 지배적인 가운데, 미국은 영국과 독일에 대해 "사전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라며 아무런 반대도 표명하지 않았다.

1899년 11월, 빌헬름 2세는 영국의 초청을 수락하였고, 독일 정부는 자모아에 대한 합의가 영국으로 가기 전에 마무리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11월 9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자모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11월 14일에 서명되었다. 때문에 자모아를 분할한 것은 미국과의 비공식적인 합의와 자모아에 대한 영독의 공식적인 합의였다. 3강들이 협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3국 조약을 협상하는 것만이 남았다. 자모아 조약은 존 헤이 미 국무장관, 테오도르 폰 홀레벤 남작, 주미 독일 대사 줄리언 폰스포테 공작에 의해 워싱턴 D.C.에서 1899년 12월 2일 체결되었으며, 1900년 2월 16일, 공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