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ជលអ ដទំស្
전 왕조
파일:Flag of Jeon Dynasty.png
1831년1877년
영국령 란나 식민지 (1877년 ~ 1945년)
란나 민족당 유일 통치국 (1921년 ~ 1945년)
표어 화합이여, 불사르라.

전 왕조의 지배 영역.
수도 연경
정치
공용어 란나어, 중국어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제왕(帝王) 전합 (1831 ~ 1844)
전륭 (1844 ~ 1865)
전완 (1865 ~ 1869)
전흥진 (1869 ~ 1877)
역사
역사  
 • 전 왕조의 수립. 1831년
 • 남영조약(南英條約) 체결. 1857년
 • 영국령 란나 식민지로서 합병. 1877년
지리
면적 44,310km²
기타
국교 성리학, 천주교, 불교 등등
현재 국가 란나 왕국 란나 왕국
[1]
  1. 토납 시대 말기에 사용된 화교기(化敎旗)는 이후 전 왕조의 왕실/조정기로 사용되었다.


전 왕조(ជលអ ដទំស្ 지아웅 왕조, 중국어: 田 王朝, 1831년 ~ 1877년)는 영국령 란나 식민지 이전 마지막 왕조이며, 화교 집단이었던 전문교의 수장인 전합이 분열되었던 란나 전역을 통합하고 수도를 연경으로 확정하면서 건설되었다.

역사

건국

프톰네 왕조가 몰락한 이후, 수많은 토착 집단인 토납들의 난립은 란나 전역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하나의 통합된 세력권을 갖추지 못한 채 100여년을 보내면서, 과거 하나된 모습을 보인 란나 지역은 각 지방마다 독자적인 문화권이 정착되어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되는 모습을 양상하였다. 이 시기에 무역 가문이었던 지아웅 가문의 수장 전련은 란나 북부의 화교계 무역 집단들의 근거지를 설립하고 남양 지역의 거점지로서 활용하였다.

화교계 무역 집단은 지아웅 가문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합된 화교 사회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전문교였다. 전문교는 자체적인 치안 조직과 준행정 조직을 갖추어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토착계와 유렵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고 원활히 교류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토납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전문교에게 보호를 요청하였고, 시간이 흘러 전문교는 란나 북부 전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는 한편, 전련은 전문교의 통치 체계를 정비하면서 란나의 유력 가문과 혼인을 통해 토착계의 혹시모를 갈등의 씨앗을 줄이는데 노력하였다.

전문교는 란나 중남부에도 손을 뻗어 때로는 실력 행사에 나서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토납들은 전문교에게 원만히 통치권을 반납하였고, 어느정도의 자치권과 관작을 인정받았다. 이윽고 전문교의 고위 관작들은 란나 전역을 통치할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세우기를 희망하였고, 이에 지아웅 가문의 전합을 새로운 군주로서 추대하기 시작했다.

전합은 이 같은 일에 처음에는 반하였으나, 이들의 줄기 찬 요청으로 추대될 것을 허락하면서 마침내 1831년, 전합을 새로이 란나의 군주로 하는 왕조 체제가 수립되면서 토납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초기

왕위에 오른 전합은 청나라에 예속되지 않은, 란나 전역에 유일한 합법적 통일 정권이자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전합은 스스로를 제왕(帝王)이라 칭하였고, 연호를 태륭(台隆)이라 하고 며칠내 칭황식을 거행하였다. 또, 점진적인 중앙집권화를 꾀하여 란나 중남부에는 남원총진(南院總陳)을 두어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1832년, 태륭율례(台隆律例)를 발표하면서 중국적인 제도를 도입하였고, 청국의 제도를 모방한 중앙집권화를 꾀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이에 란나 중남부에서는 토착 집단을 주축으로 한 민란의 낌새가 보였으나, 급히 군사를 파견하여 사태를 진정시켰고,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전합은 이후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를 통해 호적과 토지대장을 정립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면서, 유교식 통치체제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토착계와 화교계의 충돌을 우려했던 그는 란나어와 중국어를 병행하여 사용할 것을 조치하였고 란나의 토착 종교와 행사를 조정에서 확립하여 실시토록 하는 등 화합책을 펼치면서 민심을 다독이는데 애를 썼다.

남영 조약의 체결과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혁

전합의 뒤를 이은 전륭은 선황이 일구어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영국과 같은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륭은 1857년, 남영조약을 체결하면서 영국인이 특정 지역에 조자치를 세워 자유로이 무역을 하는데 허락하였고, 제한적으로나마 기독교를 유입하는데에도 허가하였다.

전륭의 뒤를 이은 전완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자, 전륭의 차남이었던 전흥진은 서구의 제도를 도입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유럽이 통치하던 여러 식민지 본국과 각 서구 열강의 본토로 유학생과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며, 유럽식 군사 전술과 교리를 습득하면서 병기창과 군무국을 설립하여 근대적 개량 화포와 총기를 개발하는데도 관여했다. 또, 유럽 양식의 건축물을 세워 보는 등 유럽 문화에 유입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전흥진의 노력으로 란나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원만히 서양 열강들과 지냈을 뿐 아니라, 가장 근대적인 국가의 틀을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유럽 열강의 침탈로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일대를 장악하였고 영국은 말레이시아 지역에 해협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눈여겨 보던 전흥진은 자칫 란나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충돌 지점으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당시 해협 식민지의 총독 에드워드 엔슨과 사절단을 통한 교류를 통해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식민지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