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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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만 전투 1st Taiwan Batt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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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38년 6월 29일 ~ 1938년 7월 31일 | |||||
장소 | |||||
대만 영해, 대만 | |||||
원인 | |||||
일본의 대일본제국 건설을 위한 세력 확장 야욕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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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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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8년 6월 29일부터 1938년 7월 31일[1]까지 대만 내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침공과 침공 과정에서 일본군을 막으려 했던 대만인[2]들과의 전투
동중국해 함대의 움직임
1938년 6월 29일 오전 4시 오키나와 나하항에 정박해있던 일본 해군소속 동중국해 함대의 군함들이 대만 뤼순항 앞바다로 출발했다. 그리고 같은날 오후 1시경에는 총합 약 5만 명의 병력을 싣은 상륙정 500여척이 미야코 제도, 야에마제도, 구메섬, 아마미 제도의 항구에서 출항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후 8시 40분경 뤼순항 북동쪽 7km 지점에서 집결했다.
함포사격
1938년 6월 29일 오후 8시 52분, 뤼순항 앞바다에 집결해있던 동중국해 함대의 기함인 나가토급 전함 1번함 나가토의 16인치 주포들이 뤼순항을 조준한 뒤 불을 뿜었다. 이어서 나가토급 2번함 무츠가 포를 사격했고, 이후 텐류급 경순양함들이나 수많은 구축함들도 저마다 포를 쏴대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 군함들의 약 4시간에 달하는 시간동안 이어진 함포사격으로 총 2,012발의 포탄을 사용되었으며, 이 함포사격으로 무고한 민간인 9,000여명과 중화민국군 1,400명이 희생되었다.
상륙
1938년 6월 30일 오전 1시, 일본제국 육전대 소속의 11해병사단과 육군의 10보병사단[3] 그리고 기계화보병, 차량화보병, 기갑여단을 싣은 상륙정 600여척이 대만의 지룽항 코앞까지 접근했고, 동중국해 함대의 총사령관 고바야시 타케시 대장은 상륙방어군의 규모를 알기 위해 22해병여단과 19해병여단 그리고 25보병여단으로 이루어진 1차 상륙군을 투입시켰다. 일본 지휘부는 함포사격으로 와해되었을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랜동안 함포사격에 노출되어 초토화된 진지들의 잔해 사이에서 총알 세례가 날라왔고, 1차 상륙군 9,100여명은 대부분 전멸한다. 이정도로 상륙이 힘들거라 예상하지 못한 일본 군부는 당황했으나, 오전 3시경 2차 상륙군 8,500여명이 상륙방어가 철처히 되있지 않은 단수이항에 상륙하는데 성공하며, 본래 계획과는 다르게 뤼순항의 상륙을 포기하고 단수이항에 나머지 33,000명 정도의 병력을 3차, 4차에 걸쳐 상륙시킨다.[4]
지룽강변 전투
일본군이 단수이항 일대를 점령하기는 했으나, 아직 병력수로는 밀리는 상황이었고,[5] 작전에 참가하는 일본군 전부가 단수이항에 모두 모인것은 7월 2일로 먼저 상륙한 10, 11보병사단을 중심으로한 2, 3, 4차 상륙군은 6월 31일 오후 1시부터 단수이구에서 휴식을 취했다.[6] 다음날 아침 후발대인 5차 상륙군이 19,000여명이 도착했고 일본군은 그날 오후부터 단수이강을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경 베이터우시의 곡창 지대가 보였고 여기서 나머지 사단은 타이베이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베이터우 평야의 밭을 가로지르던 일본군은 지룽강 건너편에서 엄폐하고 있었던 중화민국군이 저격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순식간에 혼비백산해하며 후퇴했다. 상황이 악화되는것을 실감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제16보병여단의 92식 70mm 보병포 운용병들에게 지룽강 너머로의 포격을 명령했고, 포격으로 중화민국군쪽의 대형이 와해되며 사상자가 속출하자 지룽강을 건너 제2기계화기갑여단들을 투입해 소탕했다. 이때가 7월 6일 오전이였다. 이후 제10보병사단과 나머지 여단들은 계속진군하며 그날 오후 8시 스린구의 현 타이페이 어린이공원 쪽으로 집결했다. 그렇다면 제11보병사단은 뭘 하고 있었을까?
양밍산 공습
비슷한 시각 11해병사단은 양밍산의 게릴라 소탕에 애를 먹고 있었다. 결국 7월 6일 오전 4시 11해병사단의 사령관 나카 쇼이치 소장은 가장 가까운 오키나와의 후텐마 비행장에 폭격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낸다. 같은날 5시경 후텐마 비행장의 총책임자였던 이시다 지로 중장에게 이 무전이 전달되었고, 이시다 지로 중장은 빠른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답장했다. 오전 6시 11분, 일본제국 육군 항공대 소속 제6폭격비행단의 Ki-30 52기와 Ki-51 20기가 후텐마 비행장의 활주로에서 차례대로 이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 7시 50분경 대만 영공에 진입했고 양밍산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산 중턱에 있던 11해병사단휘하의 27해병연대의 미야케 히로시 오장[7]은 전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지(양밍산) 상공에서 저공으로 비행하는 아군기들의 날카로운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주변에서 폭탄 파편과 돌, 흙들이 흩뿌려 졌다. 주변에서는 폭탄 파편이 배에 박힌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6폭격단의 경폭격기들이 폭격 조준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였다. 이로인해 일본군 측에서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산 중턱 마을에 살던 무고한 대만 민간인 50여명이 사망했다.[8] 물론 양밍산의 중화민국군 게릴라들은 이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같은날 오후 8시경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기습으로 괴멸된다.
싼충 시가전
일본군 제10해병사단은 1938년 7월 6일 저녁부터 현 타이페이 어린이공원 일대에서 숙영했다. 그리고 7월 7일 오전 10시경 일부 여단들은[9] 다리를 건너 싼충 시로 향하고 제10해병사단을 중심으로 하는 본대는 타이베이로 가기 위해 서로 갈라졌다. 싼충으로 향한 여단들의 작전권은 이시다 타다오 대령에게 있었는데 그는 북일본 전쟁 당시 미즈키 카츠오 대장이 이끄는 정부군에 참전해 북일본군들을 소탕했었다. 즉,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싼충같은 평야전에서는 언제 어디서 적들의 공격이 날라올지 모를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사람이였다. 그는 제27기계화보병여단과 제29차량화보병여단의 장갑차와 트럭들이 움직이기 쉬운곳이니 기계화보병과 차량화보병여단을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야한다고 생각했고, 먼저 장갑차들은 각각 전방으로 나서서 적들의 공격을 튕겨내며, 기관총으로 선제사격을 가한 뒤, 그 사이에 남은 차량들로 루저우 방면으로 병력을 운송해 적의 측방을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이것은 완벽히 먹혀들었고, 전방의 장갑차에 한눈팔린 중화민국군 제20보병사단은 자신들의 측후방으로 오는 일본군 차량들을 보지 못했고, 결국 후방의 병력들이 공격을 가하면서 그들에게 쓸려나갔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많은 국가에서 기계화보병과 차량화보병을 이용한 전술들이 생겨났으며, 현재까지도 우수한 전술로 평가받는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측방을 공격받은 제20보병사단에서는 측방을 담당하던 제204보병연대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202보병사단의 지휘관이였던 양광융은 후퇴하던 병력들에게 인근의 시안세 사원[10]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병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전의를 상실한 채 아무렇게나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11] 물론 제대로 시안세 사원에 도착한 이들도 대부분 지연전을 벌이다 보급이 바닥나자 7월 15일날 일본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중화민국군의 반격
앞서 말했듯이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로 사실상 단한번의 전투조차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중화민국 공군의 2급상장[12]인 류수강은 광저우 바이윈 비행장에 있는 독일산 Hs 123 급강하폭격기 22기를 전부 출격시켜 대만에 상륙한 일본군을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폭격 전부터 대만에 주둔했던 이건화 중장이 지휘하는 중화민국군 20군단[13]과 대만의 민병대들이 대공세로 일본군을 대만에서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운다. 1938년 7월 11일 오전 6시 각각 450kg의 폭탄을 장착한 Hs 123 22기가 광저우 바이윈 비행장에서 날아올랐다. 같은날 오전 8시경 대만군의 Hs 123 비행대대가 대만 영공에 진입했고, 일본군 병력의 8할이 주둔하고 있던 스린구의 일본군 야영지[14]에 급강하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폭격이 멎은 일본군 진지는 초토화되었고, 그에반해 중화민국군에는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전무했다. 급강하 폭격기의 정밀 타격 능력이 빛을 발한것이다. 이후 폭격이 멎은 8시 20분경 이건화의 20군단 휘하의 제3포병여단이 포격을 가했고, 이는 오후 2시까지 두차례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리고 포격 직후 나머지 20군단의 병사들이 일본군 야영지로 돌격하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이때의 폭격과 포격으로 2천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고, 일본군은 일본군은 필사항전했지만 결국 7월 12일 오후 12시경 전투가 잠잠해진 사이에 지룽강 방어진지에 1,000여명의 병력[15]을 남겨두고, 지룽강 이북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무려 9,434명의 사상자를 냈다.[16] 사실상 병력의 30% 이상을 잃은 것이였다.
7월 31일 대부분 소탕된다.[17]
- ↑ 후술하겠지만 7월 31일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한 대만 원주민, 한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시점은 제2차 대만 전투가 끝난 1943년 3월 30일로 보는 시선도 있다.
- ↑ 이 대만인에는 대만 거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한족과 중화민국군, 이외의 대만 원주민들이 포함된다.
- ↑ 이 두 사단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후 해체될뻔 하였으나 일본에 최소한의 군대는 주둔해야 한다는 일본 내부의 여론을 의식한 대한국이 해체를 반대하여 가까스로 일본 해안 방어부대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있다. 물론 실질적인 작전권은 일본에게 없다.
- ↑ 3차 상륙은 6월 31일 오전 5시경에 이루어졌고, 4차 상륙은 3차 상륙과 동일한날 오후 2시경에 이루어졌다.
- ↑ 물론 일본군은 정규군이였고 대만군은 중화민국군이 소수 있긴했으나, 대부분 섬을 지키려 작전에 참가한 일반 시민들이였다. 즉 사용장비나 받은 훈련 면에서는 일본군이 월등히 뛰어났다.
- ↑ 그들은 대부분 집주인들을 협박해서 집에서 잤으나 워낙 상륙병력이 많아 그것조차 못하는 인원들도 있었고 이들은 야외에 천막을 설치해 취침했다.
- ↑ 현제의 대한국군으로 설명하자면 하사 정도의 계급이다.
- ↑ 현재 그 장소에 가면 실제로 당시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피해자들을 기리는 6m 높이의 비석이 있다.
- ↑ 여기서 일부여단은 제27기계화보병여단과 제18보병여단, 제21보병여단, 제29차량화보병여단을 말한다.
- ↑ 1782년에 지어진 도교 사원이다. 전쟁기간동안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완벽하게 파괴된건 아니였고, 현재는 전후 복구작업으로 복구된 후 관광지로도 쓰이고 있다.
- ↑ 도망친 자들은 두가지 케이스로 나뉘었다. 첫번째 케이스는 운좋게 단수이강을 건너 반차오구로 도망친 케이스, 다른 하나는 결국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케이스로 전자의 경우는 반차오구에 주둔하던 제218보병사단에 편입되어 후에 후술할타이베이 완화 전투에 참가하게되는 경우가 많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이루말할수 없는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 ↑ 상장은 1급과 2급으로 나뉘며 대한국으로 치면 1급은 합동참모본부장 2급은 각군의 참모총장이다. 즉 후술할 류수강은 현재의 공군 참모총장급이라고 보면된다. 암튼 현재는 대만이 한국령이 되면서 없어지고 대만 내에서는 실질적으로 없는 계급으로 중국 본토 내에서는 아직도 쓰이고 있는 계급이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대만이 한국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 대만에 남기로 선택했던 한족들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아직도 합참의장, 참모총장을 1급상장, 2급상장이라고 부른다.
- ↑ 여담으로 이 군단은 당시 중국의 정규군단중 민족구성이 가장 다양한 군단 이였다. 한족부터 조선족, 만주족, 좡족, 징족, 기낙족, 고산족(대만 원주민)과 이외의 미식별민족 40여족이 속해있었다. 1938년 기준으로 병력 수는 76,976명이였으며, 대만 내의 유일한 정규군단이였다.
- ↑ 현재의 타이페이 어린이공원이 위치한 곳이다.
- ↑ 이 병력들이 남게된것은 일본군 지휘부의 판단이였다. 일본군 지휘부는 지룽강을 도하하는것은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고, 이때를 대비해서 일본군 주력부대가 지룽강을 도하할때까지 소수의 병력이 시간을 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행동은 작전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 작전을 위해 1,000여명의 목숨을 미끼로 한것은 이후 국제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 ↑ 신원확인이 가능한 전투중 사상자만 집개한 것으로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던 죽은 병사들까지 집계한다면, 실제로는 조금 더 많을것이다.
- ↑ 대부분이라고 말한 이유는 산속에 숨어서 저항을 계속한 대만 원주민들이 소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만 전투 당시 대만에 상륙한 연합군을 도와서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시켰고, 소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명예훈장을 수여받기도했다.